
▲83세의 나이로 사망한 김설형의 영정사진올해 1월 남편의 간첩조작 사건 무죄 판결 후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어 요양원에서 생활 중 사망했다. ⓒ 김순애
고향 친구의 어머니(김설형)가 여든셋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엄마와 함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친구의 아버지 김양진은 조작 간첩 사건으로 13년을 감옥에서 지내다 나왔고, 올해 1월에서야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참고로 김양진은 엄마의 8촌 오라버니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엄마는 "아이고, 남편 감옥 가고 고생만 하면서 살았는데, 나라에서 배상금을 줘도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버렸네"라며 탄식했다.
사라지는 기억
작년 4월, 재심의 길이 열렸다는 친구의 문자를 받고도 차일피일 미루다 그해 12월이 되어서야 오도롱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뵌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2022년 찾아갔을 때만 해도 김양진·김설형 부부는 나이답지 않게 모두 정정했다. 하지만 2년 사이, 김양진은 밭으로 가던 중 운전하던 경운기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고, 그 일로 허리를 다쳐 대부분 침대에서 지내고 있었다. 거동이 불편해진 김양진이 화장실에 가거나 움직일 때 옆에서 돌봐야 했던 김설형은 2년 만에 찾아온 나에게 자꾸 기억이 사라진다고 하소연했었다.
찾아뵙고 두 달이 지난 올 1월, 무죄 판결이 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들 가족에 작은 평화가 찾아오리라는 기대에 뱃속이 뜨끈해졌다. 하지만 그토록 바랐던 남편의 무죄 판결이 현실이 되자, 그녀가 평생 매달렸던 질긴 끈이 탁 풀려버린 걸까(관련 기사:
"이렇게 쉽게 될 것을..." '간첩 누명 53년' 김양진 무죄 선고 https://omn.kr/2bx6m)
그녀의 모든 움직임이 점점 어눌해지고 굳어갔다. 검사 결과 파킨슨병이었다. 김양진보다 더 심하게 일상생활이 어려워지자 가족들은 고심 끝에 김설형을 요양원에 보냈다.
조작된 20만 원
무죄 판결 두 달 전, 그들을 찾아갔을 때 김설형은 재판 이야기를 끊임없이 했다. 일본에 있는 남편의 누나가 살아 있을 때 재판이 열려야 하는데, 누나의 상태가 온전치 못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일본에 있는 아이들 고모가 옛날에 20만 원을 보내줬는데, 그걸 북한에서 보낸 공작금이라고 조작했어. 그 장본인이 살아 있을 때 재판을 해야 하는데, 그 20만 원이 공작금이 아니라고 증언해줘야 하는데...
2년 전 일본에 갔을 때, 아이들 고모를 만나 손을 이렇게 잡았는데 날 모르는 사람이라며 툭 쳤어. 이미 정신이 온전치 않았고, 사람들을 잘 알아보지 못해 계속 병원에만 있대. 그 고모가 그때 우리가 너무 힘들게 사니깐 돈을 모아 보내준 건데 그걸 북한 공작금이라고 조작했어."
김설형은 김양진보다 11살 어렸다. 일본에 살던 김양진은 1964년 아버지 사촌의 양자로 고향 오도롱에 돌아왔다. 약 2년 후 이웃 마을에 사는 김설형과 결혼했다. 당시 김설형은 스물다섯이었다. 결혼 후 세 아이가 태어났고, 평생 농사를 지어본 적 없던 김양진은 이웃에게 물어가며 농사를 지었다.
1972년 8월, 김설형이 일곱 살 된 큰아이를 데리고 눈오름까지 걸어가 소먹이를 구해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일곱 살, 세 살, 두 살 된 세 아이들과 걷지 못해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니가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 김설형은 남편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다녔다.
"백방으로 수소문해도 어디로 갔다는 말을 들을 수 없었어. 크리스마스 조금 전에야 간첩 혐의로 잡혀 구치소에 있으니 면회할 수 있다는 편지가 왔어. 잡혀간 후 넉 달 동안 어디에 있는지 가족들에게 알리지도 않았어. 나중에 들으니까 잡아간 다음에 일주일 동안 잠도 안 재우고, 먹을 것도 안주면서 다른 사람 먹는 거만 보게 했다고 해."
김설형이 그때를 떠올리며 분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자, 옆에 있던 김양진이 김설형을 말렸다.
"좋지도 않은 얘기 이제 그만 해. 옛날 일 자꾸 말해서 뭐해."
그러면서 김양진은 말을 돌렸다.
"나는 밭에서 일할 때가 참 좋아. 가만히 싹 올라오는 거 보고 있으면 정말 좋아. 일본 살 때는 공장에서 매일 같은 일만 반복했는데, 제주에 와서 자연과 함께 일하는 게 참 좋았어. 그런데 지금은 일도 못나가고 집 안에서만 있으니까 너무 답답해."
재심을 앞둔 김양진은 여전히 과거에 분노하고 재판에 희망을 거는 김설형과 달리 모든 것에 초연한 듯 보였다. 괴로웠던 과거를 더 이상 떠올리지 않으려 했고, 분노에 휩쓸리지 않으려 작정한 듯 했다. 재심에서 무죄 결정이 났을 때도 김양진은 허탈해 하며 "이렇게 쉽게 될 것이었는데"라며 짧게 말했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관련 기사:
조작간첩이자 원폭피해자였던 동네 삼춘 김양진 https://omn.kr/29xx8)
갑작스러운 이별

▲2022년 김설형과 김양진의 모습. ⓒ 김순애
1972년 8월에 잡혀간 김양진은 10월에 서울 감옥에 수감되었다. 남편이 잡혀가고 넉 달이 다 되도록 제대로 된 소식을 받지 못했던 김설형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즈음에야 면회가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남편을 만나기 위해 육지로 가는 날, 오도롱에서는 길을 넓히는 작업이 있었다. 모든 동네 사람들이 나와 일을 해야 했고, 김설형도 오전에 잠깐 일을 마치고 서울로 가려 했다. 그러나 담을 허물고 흙을 파내는 작업 중 흙더미에 깔리는 사고를 당했다.
"30분만 더 일하면 육지로 면회하러 갈 시간이었어. 흙을 바깥으로 옮기는데 내 몸 위로 흙더미가 와르르 무너졌어. 만약 몸이 위쪽으로 향했으면 죽었을 텐데, 다행히 바닥 쪽으로 향해 있어서 살 수 있었어.
동네 사람들이 급히 흙을 파내 내 몸을 꺼냈는데, 혀와 팔, 다리가 이미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혀는 밖으로 나와 있었대. 그 모습을 본 동네 사람들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어. 병원에 입원해 3일 동안 혼수 상태로 있었어.
의식이 돌아오자 기침이 심하게 났어. 폐가 상하고 갈비뼈 다섯 개와 골반뼈가 부러졌거든. 그 때 제주시장이 와서 제주시가 모든 비용을 다 낼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돌아갔는데, 병원비를 해주지 않아 친척들이 다 도와줬어."
생사를 헤매던 김설형은 간신히 살아 돌아왔지만, 김양진은 다음 해 2월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대법원의 최종 판결은 징역 15년, 자격 정지 15년이었다. 국가가 남편에게 간첩 누명을 씌우고 감옥에 가두자, 김설형은 남은 가족의 가장 역할을 하며 이를 악물고 살아갔다.
"내가 왜 이 사람과 결혼해 이런 고생을 하나 생각하다가도 그렇게 생각해서 뭐하겠나? 내 운명이 그러니 앞만 보고 살아야지 마음먹었어. 그때 남은 세 아이를 보면서 내가 없으면 다 거지가 될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막 나는 거라.
굶어 죽지 않을 방도를 찾아 아무 일이나 다 했어. 동네 사람 탈곡기 일 돕다가 나중엔 탑동에 있는 유창산업에서 야간 작업도 자주 했어. 그러다 조금이라도 움직일 시간이 나면 동네 사람들 일 돕고, 밭에도 나가서 일했지. 그렇게 노력하며 돈 10원 한 장 빚지지 않고 살아왔어."
낙인의 그림자
김설형은 아이들을 기죽이지 않으려고 탁아소 자모회장을 맡고, 딸아이를 걸스카웃에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그어진 빨간 줄은 자식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놈의 사건, 그런 조작이 어디 있냐? 평생 잊지 못해. 그 때문에 아이들도 아무리 수석하면 뭐할 거라? 빨간 줄 쳐놓으니까 어디 들어갈 수도 없고 공무원도 못했어. 자식들이 모범생이고 장학금 받으며 공부해도 아버지 때문에 자기들 살고 싶은 데로 살지 못했지."
가족과 주변의 오랜 노력 끝에 불가능할 것 같던 재심이 확정되었다. 재심을 앞두고 김설형은 기대와 불안, 그리고 지난 시간의 억울함을 계속 나에게 하소연했다.
"박정희 계엄령 때 생각하면 징글징글해서 못 살아. 그게 몇십 년이냐. 이제 다 죽어가는데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게 너무 억울해서 눈물만 나."
김설형의 억울함은 53년 만에 풀렸다. 83년의 인생 중 2/3 정도의 시간을 김설형은 가슴이 콱 막힌 상태로 억울하게 지냈다.
부인의 장례식장을 지키는 김양진의 눈빛은 허공을 맴돌았다. 지난 겨울, 잠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의식이 더 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큰딸이 내 이름을 알려줬지만, 김양진은 끝내 나를 기억하지 못했고, 그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의례적인 말만을 되돌려주었다.
법복을 입은 법관들은 김설형과 김양진 가족에게 53년간 '빨갱이'라는 굴레를 씌웠다. 한 가족을 지옥으로 내몬 그들의 잘못된 판결에 대해 국가는 알량한 돈으로 배상을 마쳤지만, 법관들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수많은 이들이 잘못된 판결로 돌이킬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지만, 법관들의 죄를 묻는 이는 없다.
김설형을 마지막으로 본 날, 그는 자신이 다녔던 화장품 방문 판매 회사에서 받은 비누를 검은 봉지 가득 담아 내게 건넸다. 반짝이는 빨간색 박스에 담긴 작은 비누들이 지금도 내 집 욕실 선반에서 진한 향기를 풍기고 있다.
판결의 주인들은 어디에
집에 돌아와 그 비누를 바라보며, 나는 무기징역과 15년 형을 선고했던 판사들을 떠올렸다. 무기징역을 선고한 판사는 제주 출신으로, 나중에 제주에서 국회의원을 세 번이나 지냈다. 그 판사들을 포함한 법관들은 잘못된 판결에 대해 형사상·민사상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절대적인 면책 특권을 누리고 있다.
판사들의 개인 직업 윤리에 기대는 우리 사회에서 현재의 법관들은 53년 전 김양진에게 판결을 내렸던 이들보다 과연 조금 더 공정하고 정의로워졌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필자는 제주녹색당 운영위원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