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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1 10:27최종 업데이트 25.09.11 11:13

K-문화시대, 쉬운 우리말이 먼저다

외래어 배척을 넘어, 세계와 소통하는 언어의 길을 묻다

바야흐로 K-문화의 시대다. BTS와 '오징어 게임'이 세계인의 일상에 스며들고, 한국의 기술과 산업이 글로벌 표준을 논하는 오늘날, 우리말 '한국어' 역시 그 위상이 달라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정부와 언론계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는 '쉬운 우리말 쓰기 사업'은 우리 언어의 공공성을 높이고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려는 소중한 노력임에 틀림없다. 무분별한 외래어와 어려운 한자어 대신 아름답고 쉬운 우리말을 쓰자는 취지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쉬운 우리말 쓰기'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바로

하지만 선한 의지가 언제나 최선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외국에서 들어온 말을 일괄적으로 배제하고 기계적인 순화를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우리는 더 큰 가치를 놓칠 위험에 처해 있다. 한국어의 고유성을 지키는 일은 물론 중요하지만, 글로벌 시대의 흐름에 맞춰 국제적 소통 가능성을 확보하고, 각 분야의 전문성과 정확성을 담보하는 일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쉬운 우리말 쓰기'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하며, 순화를 넘어 세계화를 지향하는 균형 있는 언어 정책의 필요성을 역설하고자 한다. 이는 단순히 외국어를 옹호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더 깊이 있게 한류 콘텐츠 즐기려는 외국인들이 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말을 더욱 풍성하고 경쟁력 있는 언어로 만들기 위한 현실적인 제언이다.

주장 1: 외국어·외래어는 언어의 불순물이 아닌, 시대의 창(窓)이다

언어 순화 운동에서 외래어는 종종 우리말의 순수성을 해치는 '불순물'이나 '오염원'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외래어는 단순히 외국에서 온 이질적인 요소가 아니라, 세계와 우리를 연결하는 소통의 창구이자, 전문 지식을 담아내는 정교한 그릇이며, 언어의 진화를 이끄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세계와의 소통을 여는 '글로벌 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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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인공지능)', '리스크(위험 관리)', '미디어 리터러시(매체 이해력)' 같은 용어들은 단순히 외국 단어가 아니다. 여기에는 전 세계가 수십 년간 축적해 온 개념과 기술, 그리고 사회적 합의가 압축되어 있다. 우리가 이 용어들을 '인공지능', '위험 관리', '매체 이해력'이라는 우리말로 완벽히 대체했다고 가정해 보자. 국내에서는 소통이 원활해질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연구자와 기업가들이 국제 학술논문을 읽거나 해외 파트너와 소통할 때, '인공지능'이 곧 'Artificial Intelligence'의 약자인 'AI'와 같다는 부연 설명을 다시 해야만 한다. 이는 소통의 효율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필요한 비용을 발생시킨다.

한국어가 세계적 담론에서 고립되지 않으려면, 외래어를 일종의 '언어적 다리'로 삼아 외국과 실시간으로 호환가능한 지식 자산을 쌓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중 표기 예를 들어 'AI(인공지능)'는 언어적 혼란이 아니라, 국내적 이해와 국제적 소통을 동시에 돕는 매우 유연하고 실용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는 우리말의 정체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의 지식을 우리말로 끌어안는 적극적인 언어 활동이다.

개념의 미묘한 차이를 지키는 '전문성과 정확성'

모든 단어는 그 자체의 역사와 사회적 맥락을 품고 있다. 특히 전문 용어의 경우, 단순한 일대일 치환은 개념의 핵심을 훼손하고 심각한 오해를 낳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리스크(risk)'다. 이를 단순히 '위험'이나 '손실우려', '악재'라고 번역하면, '기대 손실', '변동성', '불확실성' 등 통계, 금융, 보건, 안전 등 각 분야에서 정교하게 사용되는 복합적인 뉘앙스가 사라진다. 금융 시장의 '환율 리스크'는 단순한 '환율 위험'이 아니라, 환율 변동에 따른 이익과 손실의 가능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를 '위험'이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리는 순간, 개념의 정밀함은 무뎌지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워진다.

비극적인 사례지만, '이태원 참사'를 초기에 일부에서 '사고(accident)'로 표현하려던 움직임도 같은 맥락이다. 'accident'가 예측 불가능한 우발적 사건의 뉘앙스가 강하다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재난 대응 용어인 '인시던트(incident)'는 시스템의 부재나 관리 실패가 개입된, 보다 광범위하고 복합적인 사건을 의미한다. 문맥을 무시한 단순 순화가 현실을 왜곡하고, 재난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혼선을 주며, 나아가 국가적 대응 매뉴얼의 작동마저 어긋나게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는 뼈아픈 교훈이다.

언어의 역동성을 증명하는 '진화의 과정'

역사적으로 완벽하게 '순수한'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언어는 다른 문화권과의 교류와 접촉을 통해 끊임없이 진화하고 풍성해져 왔다. 우리말 역시 고대부터 중국의 한자어를 받아들여 사유의 깊이를 더했고,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의 여러 개념어를 수용하며 어휘의 폭을 넓혔다. '학교', '사회', '민주주의'와 같은 단어들 없이는 오늘날 우리의 '지적 대화'가 불가능하다.

외래어의 유입을 무조건적인 오염으로 보고 이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살아 숨 쉬는 언어의 역동성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무분별한 수용도, 맹목적인 배척도 아닌, 우리말의 체계 안에서 외래어를 건강하게 소화하고 경쟁력 있는 우리말 어휘를 함께 발전시키는 것이다. 외래어는 그동안 한국 사회가 세계와 교류하며 축적해온 '국제적 연결고리'의 증거이며, 이를 스스로 끊어낼 필요는 없다.

주장 2: '우리말 쓰기 50개 제안', 훌륭한 대안이나 '상황 맞춤형' 적용이 관건이다

 (사)국어문화원연합회에서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국민의 알권리 보장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정부와 언론의 ‘쉬운 우리말 쓰기 사업’ https://www.plainkorean.kr/
(사)국어문화원연합회에서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국민의 알권리 보장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정부와 언론의 ‘쉬운 우리말 쓰기 사업’ https://www.plainkorean.kr/ ⓒ 쉬운 우리말 쓰기 사업
 (사)국어문화원연합회에서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국민의 알권리 보장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정부와 언론의 ‘쉬운 우리말 쓰기 사업’ https://www.plainkorean.kr/
(사)국어문화원연합회에서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국민의 알권리 보장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정부와 언론의 ‘쉬운 우리말 쓰기 사업’ https://www.plainkorean.kr/ ⓒ 쉬운 우리말 쓰기 사업
참고할 내용
[개선 용어 보기]
[쉬운 우리말 사전]
https://www.plainkorean.kr/ko/intro/notice.do?mode=view&articleNo=132407&article.offset=0&articleLimit=10
최근 발표된 '쉬운 우리말 쓰기 50개 제안'은 그 자체로 매우 훌륭한 결과물이다. 어려운 외래어를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로 다듬어 소통의 문턱을 낮추려는 노력은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 다만, 이 좋은 제안들이 현장에서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일괄 적용'이 아닌 '맥락 중심의 유연한 적용'이라는 지혜가 필요하다.

매체와 독자에 따른 '맞춤형 활용'

'AI'와 '인공지능' 중 어느 표현이 더 쉬울까?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누구에게, 어떤 글에서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IT기술 전문가들이 보는 전문보고서에서는 '인공지능'이라는 포괄적인 표현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오히려 머신러닝, 딥러닝 등 세부기술을 지칭하는 원래 용어가 더 정확한 소통을 보장한다. 반면, 노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건강 정보 안내문에서는 '키오스크'보다는 '무인 주문기'가 훨씬 효과적이다. 언론보도, 학술논문, 산업 보고서, SNS 콘텐츠 등 각 매체의 장르와 독자층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하나의 기준을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소통 장벽을 만들 뿐이다.

득실 분석을 통한 '단계적 전환' 전략이 필요하다

새로운 우리말 대체어를 도입할 때는 그로 인해 얻는 '이해도 향상'의 이익과, 치러야 할 '학습 비용', '번역 비용', '사회적 혼란' 등의 손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단계적인 전환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현명하다.

새로운 우리말 대체어 도입을 위한 '단계적 전환' 전략
1단계: 이중 표기 병행
새로운 개념이 도입되는 초기에는 '미디어 리터러시(매체 이해력)'처럼 두 표현을 함께 사용해 국민이 자연스럽게 새로운 우리말 표현에 익숙해질 시간을 준다.

2단계: 우리말 중심 사용
사회적 수용도가 충분히 높아졌다고 판단되면, 우리말 표현을 중심으로 사용하되 괄호 안에 원래 용어를 표기하여 전문성을 보완한다.

3단계: 완전한 대체 및 정착
대체어가 원래 단어의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자리 잡았을 때 비로소 완전한 전환을 고려할 수 있다.

'미디어 리터러시'를 '매체 이해력'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면, 단순히 용어 제안에 그쳐서는 안 된다. 초·중·고 교과 과정, 공공기관 업무 매뉴얼, 언론인 교육 프로그램 전반에 걸쳐 해당 용어를 일관되게 반영하고 교육하는 후속 조치가 뒤따라야만 전환의 효과가 온전히 발휘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국민과 함께 만드는 '개방적 언어 정책'

'쉬운 우리말 쓰기'는 몇몇 전문가의 제안만으로 완성될 수 없다. 실제 언어 사용자인 국민의 참여와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되어야 한다. 단순한 항목별 치환 목록을 제시하는 것을 넘어, 특정 표현에 대한 대국민 설문조사, 연령별·직업별 이해도 테스트, 실제 '사용현장 모니터링' 결과를 반영해 대체어의 수용성을 과학적으로 측정해야 한다.

특히 '빅데이터(Big Data)', '블록체인(Blockchain)', '디지털 트윈(Digital Twin)', '메타버스(Metaverse)'와 같이 아직 우리말 대체어가 정착되지 않은 핵심 신기술 용어에 대해서는 더욱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관련 산업계 전문가, 기술자, 학자들이 참여하는 공론의 장을 열어 가장 적절한 우리말 대체어를 제안하고, 그 용어가 실제 현장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구체적인 로드맵을 함께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일방적인 '계도'가 아닌, 살아있는 '언어 생태계'를 가꾸는 길이다.

결론: 순화를 넘어, 풍요로운 세계화를 향하여

K-문화가 세계를 향해 뻗어 나가고 있는 지금, 우리 언어 정책의 지향점 또한 안으로만 향하는 '닫힌 순화'가 아니라 밖으로 향하는 '열린 세계화'가 되어야 한다. '쉬운 우리말 쓰기'와 그 결과물인 '우리말 사전'은 그 자체로 소중한 출발점이다. 하지만 그 의미를 온전히 살리기 위해서는 기계적인 배척이 아닌, 맥락을 읽는 지혜와 단계적 전환을 꾀하는 전략적 사고가 반드시 필요하다.

외국어 및 외래어를 단순히 배제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2차원적 시각에서 벗어나, 우리말의 고유한 힘을 지키면서도 국제적 호환성을 높이는 3차원적 언어 정책을 펼칠 때, 한국어는 비로소 더욱 풍성하고 강력한 소통의 도구로 거듭날 것이다. 세계와 소통하며, 세계를 이끌어갈 K-문화 시대의 언어는 바로 그런 모습이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파인에도 실립니다.글쓴이 김영근은 고려대학교 글로벌일본연구원 겸 인문학과동아시아문화산업과정 교수이다. “‘문화외교’를 통해 본 한일관계 60년: 소프트파워 및 위기관리를 중심으로”, “한일간 위기관리의 정치경제학”,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중층적 경제협력 구도와 일본의 경제적 리스크 관리”, “세계무역구조의 변용과 지경학 : 글로벌화 vs. 지역주의” 외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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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근 (ikimyg) 내방

현재 고려대학교 글로벌일본연구원 교수로 있으며, 사회재난안전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주된 관심분야는 글로벌 위기관리 및 재난·안전학, 일본의 정치경제, 동아시아 국제관계, 국제기구론, 국경학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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