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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다."
많은 부모들이 하는 상상이다. 아파트 단지 대신 바다, 미세 먼지 대신 바람, 키즈 카페 대신 숲. 도시 육아에 지친 부모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떠올리는 로망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리고 실제로 지난 2021년 4월, 제주에 내려와 둘째를 23년 6월에 낳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로망은 현실 앞에서 처참히 깨진다. 그러나 그 깨짐이 오히려 내 삶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제주바다에서 노는 아이제주바다에서 노는 아이 ⓒ 이현숙
제주 서귀포 법환 포구는 태풍만 오면 뉴스에 꼭 등장하는 곳이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바람에 휘청이는 가로등, 출렁이는 방파제 풍경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여행자로 올 때는 "와, 자연의 위대함이 이거구나!" 하며 감탄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바람 속에서도 유모차를 끌어야 하는 엄마다.
아이와 함께 바닷가 산책길에 나서면 영화 같은 장면이 펼쳐질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바람이 세게 불면 아이 모자가 하늘 높이 날아가고, 모자를 주우러 뛰는 동안 아이가 옆으로 달려나갈까 심장이 철렁한다. 한 손으로 아이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날아간 소지품을 챙기며 아수라장이 된다.
관광객 눈에는 그림 같은 풍경이지만, 엄마 눈에는 긴장과 체력이 동시에 소모되는 전쟁터다. 사진으로는 낭만인데, 현실은 생존이다. 아이들은 바다를 보면 망설임이 없다. 조개껍질 줍기에 몰두하고, 물에 발을 담그러 달려간다. 그때마다 부모는 전력질주한다. 모래사장에서의 웃음은 아이 몫이고, 젖은 옷과 신발, 쌓이는 빨래감은 부모 몫이다. 아이의 자유는 부모의 체력과 노동 위에 세워져 있다.
특히 모래가 문제다. 모래놀이를 즐기던 아이가 집에 돌아오면 주머니와 양말에서 끝없이 모래가 쏟아진다. 욕실 바닥, 거실 구석, 심지어 침대 시트에서도 모래가 발견된다. 집은 순식간에 해변 2호점이 된다. 로망은 사라지고, 청소 전쟁이 시작된다.

▲제주바다를 바라보는 가족제주바다를 바라보는 가족 ⓒ 이현숙
로망 속의 제주 바다는 아이에게는 최고의 놀이터지만, 부모에게는 체력을 시험하는 운동장이다. 도시에서는 그저 미끄럼틀 한 번 밀어주면 끝났던 육아가, 이곳에서는 전신 근력 운동으로 변한다. 바람과 파도에 맞서 뛰다 보면, 체력 고갈은 순식간이다. 낭만적 풍경 속에서 아이는 더 자유로워지고, 부모는 더 고단해진다. 결국 제주살이는 자연 육아라는 이름의 '부모 체력 검증 프로그램'에 가깝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제주살이가 좋다. 이유는 단순하다. 힘들지만 아이와 내가 동시에 자라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라면 늘 놀이터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보며 아이를 지켜보기만 했을 나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내가 직접 뛰고, 같이 넘어지고, 같이 웃는다. 아이가 바람을 맞으며 성장하듯, 나도 함께 단단해진다.
육아가 나를 잠식한다고 느끼던 때도 있었다. 하루 종일 아이에게 매달려 살다 보면, '나는 어디에 있나' 허무해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아이와 함께 움직이며 "내가 살아 있구나"를 실감한다. 아이와 나를 억지로라도 분리하지 못하는 환경이 오히려 득이 된다. 결국 나도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셈이다.

▲제주바다를 바라보고 싶은 아이제주바다를 바라보고 싶은 아이 ⓒ 이현숙
제주로의 이주를 시작하기 전, 나는 인터넷 카페와 유튜브에서 '제주 한달살이'를 꿈꾸는 부모들의 글을 읽으며 부러워했다. 아이가 바다와 숲에서 뛰어 노는 장면만 상상했다. 그러나 정작 내가 해보니, 자연은 아이에게만 주는 선물이 아니었다. 부모에게도 새로운 과제를 던졌다. "너도 같이 뛰어야 한다. 같이 맞서야 한다"라고.
도시 부모들이여, 제주에서의 삶은 달콤한 로망만은 아니다. 바람은 세고, 파도는 무섭고, 모래는 끝없이 들어온다. 육아는 여전히 버겁다. 그러나 그 안에서 아이와 나, 가족 모두가 단단해진다.
로망은 깨져야 진짜가 된다. 법환 포구의 거친 바람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