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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9 13:45최종 업데이트 25.09.09 14:33

과학 법칙이 흔들흔들, SF가 세계관을 확장하는 법

영화 <컨택트>와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

SF를 그냥 우주 공상 소설로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SF는 당신의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근본을 흔든다. 그렇다면 먼저 'SF(Science Fiction)'란 무엇일까. <SF, 시대정신이 되다>를 집필한 이동신 교수는 SF를 "과학 기술적 요소가 작품의 전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장르"라고 정의한다. 과학 기술이 어떤 방식으로 중심축이 되느냐에 따라 자연과학·공학을 전면에 세우는 하드 SF와 사회과학·심리학을 탐구하는 소프트 SF로 나뉠 수도 있다. 과학 기술이 세상을 바꾸듯, 과학 기술을 다루는 소설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바꾼다.

SF만의 특성, '노붐'과 인지적 낯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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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비평의 기초를 닦은 다르코 수빈(Darko Suvin)은 SF를 다른 장르와 구분 짓는 핵심 개념으로 '노붐(novum)'과 '인지적 낯섦(cognitive estrangement)'을 제시했다.

낯섦은 '새로운 것'이고, 인지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전혀 다른 두 가지 특성이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 SF이며 이를 '인지적 낯섦'을 뜻한다. 판타지가 낯선 존재나 상황 자체에 집중하고 개연성을 굳이 따지지 않는 장르라면, SF는 새로운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의 틀 속에서 다시 해석하게 만든다. 바로 이 점이 두 장르의 가장 큰 차이다.

이때 SF가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정도를 '노붐'이라고 표현한다. 노붐(novum)은 라틴어로 '새로운 것'을 뜻한다. 신기하고 낯선 요소를 전부 노붐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정도가 세계관과 우주관이 다 바뀔 정도로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인지적 낯섦 과정을 통해 총체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노붐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세계관이 확장된다.

SF 속 등장 인물도 노붐을 느끼고, 독자도 노붐을 느끼게 하는 작품으로는 영화 <컨택트>(원제 arrival), 그리고 영화의 원작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예로 들 수 있다.

테드 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의 소설당신 인생의 이야기 ⓒ 엘리 출판사

이야기는 지구에 나타난 외계 생명체 '헵타포드'와의 조우에서 시작된다. 언어학자인 주인공 루이스는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외계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전혀 다른 시간 개념까지 받아들이게 된다. 헵타포드의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원형이며, 그들의 물리학적 세계관은 인류의 뉴턴 역학이 아닌 '페르마의 원리' 위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 루이스와의 소통 과정에서 드러난다.

소설의 저자 테드 창은 "외계인과 인류가 물리학의 기초를 달리한다면 어떨까?"라는 발상에서 이야기를 출발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인간이 수백 년에 걸쳐서 이해한 페르마의 원리를, 헵타포드는 마치 '1+1=2'처럼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이 간극을 깨닫는 순간, 독자는 인지적 낯섦이 시작된다. 이 차이를 이해하며 낯선 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노붐에 다다른다.

페르마의 원리(Fermat's principle), 혹은 최소 시간의 원리에 따르면 빛은 두 점 사이를 이동할 때 가능한 모든 경로 중 가장 시간이 적게 걸리는 길을 선택한다. 즉, 빛은 출발 순간부터 도착 지점까지 가장 빠른 경로를 '알고' 움직이는 셈이다. 선형적 시간관에 익숙한 인간에게는 낯선 개념이다. 인간은 '인과적' 법칙이 적용되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인과적 세상에서는 사건에 원인과 결과가 있다. 이는 사건에 선후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시간 축을 넘나들 수 없는 3차원의 존재라서, 시간의 흐름이 존재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사건을 시간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빛이 반사되거나 굴절될 때 일어나는 현상에서 시간 축의 개념을 배제하고 현상을 이해한다. 매질이 달라졌다는 '원인'이 있어서 빛이 굴절됐다는 '결과'로 현상을 해석하는 것이 인류의 뉴턴 역학적인 관점에서는 익숙하다.

그러나 헵타포드는 우리와 달리 비선형적 시간관 속에서 존재한다. 그들은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이미 그 결과를 알고 있으며, 과거나 미래라는 구분 자체를 갖지 않는다. 따라서 물리 현상도 선후관계가 아니라 전체 맥락 속에서 파악한다. 빛의 이동 역시 과정이 아니라 전체를 기준으로 이해한다. 그들에게 페르마의 원리가 가장 직관적이고 기본 법칙이 되는 이유다.

여기서 우리는 노붐을 마주한다. 시간관이 달라지면, 그 존재를 지배하는 물리 법칙이 달라진다. 인간이 견고한 진리라 믿어온 과학 법칙조차 뒤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 바로 그 지점에서 SF는 우리에게 낯설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영화의 각색에서 가져오는 노붐

영화 컨택트 스틸컷 헵타포드의 원형적 언어를 마주한 루이스
영화 컨택트 스틸컷헵타포드의 원형적 언어를 마주한 루이스 ⓒ 필름네이션

영화 <컨택트>는 두 시간 남짓한 러닝 타임 속에서 소설이 제시한 물리학 원리인 '페르마의 원리'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물리학 대신 언어학을 강조해 노붐을 만들어낸다. 순환적 시간관을 가지는 외계인의 언어를 배우면서 그들의 시간관까지 습득하게 되는데, 이 과정을 '사피아-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로 설명한다. 사피아-워프 가설이란 언어가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결정한다는 이론이다. 외계인들의 시간관을 주인공 루이스가 받아들일 때 언어가 매개한다는 설정을 더 강조하기 위해 작중 대사로 언급된다.

물리학의 개념을 가져오지 않아도, 시간관의 변동으로 루이스가 노붐을 겪으며 관객에게도 완전히 다른 세상, 즉, 노붐을 경험하게 한다는 점은 소설과 동일하다. 영화는 소설에서 더 나아가, 루이스가 미래의 불행을 알게 되었음에도 다른 선택을 하지 않는, 능동적인 주체임을 강조한다. 소설에서 딸의 죽음이 우연한 사고로 제시되는 반면, 영화에서는 불치병으로 각색된다. 딸의 죽음이 예견되었지만, 루이스는 헵타포드처럼 자신의 삶을 받아들인다. 이어 이를 이행하기로 '선택'했음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로 각색해 관객에게 직관적인 노붐을 전달하고자 한다.

우리가 얻는 노붐

다른 시간관을 갖게 되면,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달라진다. 우리는 선형적 시간관 속에서 미래를 알 수 없는 존재로 살아간다. 그러나 만약 인생의 모든 순간을 미리 안다면 어떨까. 그때도 삶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헵타포드는 자신들의 미래를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주어진 운명을 실행하기 위해 살아간다. 그들에게 삶은 미지의 사건이 아니라 예정된 과업이다.

인간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시작과 끝이 있다는 사실은 모두 예견된 것이고, 다만 우리는 그 사이의 과정들을 알지 못할 뿐이다. 헵타포드의 세계관을 이해하게 되면, 인간 역시 '삶을 수행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바로 노붐이 작동하는 순간이다. 익숙한 세계관이 낯설어지고, 삶을 수용하는 방식까지 새롭게 재구성된다.

인생을 더 이상 인과의 연속으로만 보지 않게 되면, 매 순간은 거대한 흐름의 일부가 되고 전체적 맥락 속에서 삶을 바라보게 된다. 헵타포드는 미래를 모두 알면서도 살아가고, 인간은 무엇이 일어날지 모른 채 살아간다. 어쩌면 알 수 없다는 사실 덕분에 우리의 삶은 더 예측 불가능하고, 그래서 더 흥미로운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이 지점에서 SF는 당연한 현실을 낯설게 만들고 그 낯섦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엘리(2016)


#SF#컨택트#당신인생의이야기#테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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