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종로구 롯데리아 동묘역점에서 열린 디지털 약자 어르신 키오스크 교육에 참여한 서울재가노인복지협회 소속 어르신들이 키오스크로 음식을 주문하는 과정을 체험하고 있다. 2022.10.17 ⓒ 연합뉴스
"나이 들어 저렇듯 민폐를 끼치고 싶을까?"
젊은 연인들끼리 마주 보며 나누는 말이었지만, 줄 선 이들 모두에게 들릴 만큼 큰소리였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 부부가 카페 입구에서 키오스크로 커피를 주문하느라 쩔쩔매고 있었다. 마치 얼굴을 화면에 파묻을 듯 가까이 대는 모습이 조금은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아마도 돋보기안경을 두고 온 모양이었다. 설령 챙겨 오셨다고 해도 별 쓸모는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그때 멀찍이 뒤에 서 있던 한 중년의 신사가 도와주겠노라며 다가섰다. 대화하며 버튼을 눌러 화면을 넘기는데, 두 어르신은 마냥 신기한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막상 결제를 위해 건네받은 카드가 먹통인 모양이었다. 연신 다시 시도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두 어르신도, 중년의 신사도 당황한 낯빛이 역력했다.
어르신은 현금으론 결제가 안 되는지 물었고, 결국 그 신사는 현금을 건네받은 뒤 자신의 카드로 대신 결제했다. 수호천사를 자임했던 그 신사의 목소리에도 약간의 짜증이 묻어났다. 기껏해야 5분 남짓이었을 뿐인데, 순서를 기다리던 손님들 사이에선 비난인지 욕설인지 모를 뒷담화가 이어졌다. 어떻든 두 어르신은 천신만고 끝에 커피를 주문하는 데 성공했다.
무심히 내뱉는 말에 배어있는 노인 혐오
내 순서가 되자, 무언가에 쫓기듯 자꾸만 시선이 뒤를 향했다. 그 어르신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손님들이 주문 속도가 느리다고 눈치를 줄까 싶어 괜히 신경이 쓰였다. 키오스크 앞에서 어떤 메뉴가 있고, 가격은 어떤지 찬찬히 살펴보는 건 애초 불가능하다. 욕먹지 않으려면, 주문 전에 미리 정하고 버튼을 재빠르게 눌러야 한다.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쳤다. 당장 두 어르신의 '카페 나들이'를 민폐라며 손가락질하는 젊은이들의 각박한 심성이 안타까웠다. 언뜻 무심히 내뱉는 그들의 말속엔 '노인 혐오'의 정서가 배어 있었다. SNS에선 요즘 노인들은 '○리단 길'로 불리는 젊은이들의 거리까지 기웃거린다고 조롱하며, 그들을 향해 '물을 흐린다'고 쏘아붙이기도 한다.
마치 자신들은 영원히 나이 들지 않은 채 젊은이로만 살 것처럼 위세를 부리고 있다. 언젠가 수업 중 뜬금없이 '동방예의지국'이라는 표현을 두고 아이들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노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세뇌 교육의 일환'이라는 한 아이의 되바라진 대꾸가 화근이 됐다. 여태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는 내겐 문화적 충격이었다.
봉건적인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습속일지언정, 노인을 공경하는 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도리라고 봤다. '인륜(人倫)'이 한자어라고 해서, 단어에 담긴 의미마저 고루하고 퇴행적인 건 아닐 테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 들고, 병이 들어 죽음에 이르게 되니, 삶에 겸손해져야 한다는 뜻으로 여겨왔다. 굳이 비유하자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의 한국적 버전 정도로 이해했던 거다.
노인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도서관 하나가 문을 닫는 것과 같다고 나름 거창하게 표현한 이들도 있다. 그가 평생 겪은 경험과 차곡차곡 쌓아 올린 지혜의 유산이 사라지는 것이라며 애통해 하는 것이다. '꼰대', '애비충', '틀딱' 등 이 시대 노인을 향한 온갖 혐오 표현이 난무하지만, 그들 각자가 세파를 견디며 살아온 서사의 합이 곧 지금 대한민국의 역사다.
나이가 들면 행동이 굼떠지고 눈이 침침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꾸준히 근력 운동을 하고, 현대 의학의 도움으로 노안 시술을 하고, 피부 노화를 개선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보지만, 생로병사의 엄연한 노정 앞에 '회춘'이란 그저 입에 발린 칭찬에 불과하다. '노인 혐오'는 결국 '자기 혐오'의 미래형일 뿐이다.
5분도 기다리지 못하고 조바심 내며 안달
한편, 채 5분도 기다리지 못하고 조바심 내며 안달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정서도 당혹스럽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가장 먼저, 자주 듣는 이야기가 '빨리빨리'라는데, 조급함을 우리 국민 공통의 'DNA'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다. 심지어 '빨리빨리 정신'이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에 견인차 노릇을 톡톡히 했다고 상찬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빠름'은 '편리함', 나아가 '좋음'과 동의어다. 뭐든 늦거나 더딘 건, 불편하고 개선해야 할 나쁜 거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기다림은 시나 소설에서 등장하는 문학적 용어일 뿐 현실에서는 자신의 천금 같은 시간을 빼앗는 행위로 치부된다. 자판기의 음료처럼,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컵이 내려오는 걸 당연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정작 분초를 다투는 일을 앞두고 있느냐면 딱히 그것도 아니다. 대표적인 게 신호 대기 중인 자동차에서 울리는 요란한 경적이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는데 곧장 출발하지 않으면 대번 경적이 울린다. 단 1초의 기다림도 없다. 앞 차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수 있다는 건 아예 염두에 없다. 창문이 열려 있는 경우, 경적과 함께 운전자의 험한 욕설까지 들린다.
한번은 지인의 차를 타고 퇴근하면서 겪었던 일이다. 바로 출발하지 않는다고, 또 노란 신호등에 멈춰 섰다고 빵빵거리는 운전자를 향해 그가 되뇐 혼잣말에 무릎을 쳤다. '저렇게 바쁘면 어제 미리 출발하지.' 뒤 차 운전자에게 '멕이듯' 건넨 조롱이 통쾌했다. 그는 젊은 운전자들일수록 더 조급해하는 것 같다면서 자신의 경험담을 이어 들려주었다.
뭐든 바삐 하다 보면 놓치는 게 있고, 편리함만 추구하다 보면 불가피하게 환경에 해를 끼치게 된다. 살다 보면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신중함이 필요할 때가 있고, 불편함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단련시키기도 한다. 한 동료 교사는 학교에 설치된 와이파이의 속도에 연연하는 요즘 아이들의 일상을 두고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단언했다.
더디 가는 사람들 배려하는 사회라야 건강한 공동체
이미 키오스크에 익숙해진 탓일까. 키오스크 주문에 서툰 노인을 향해 손가락질할 뿐, 정작 키오스크로만 주문하는 시스템을 문제 삼는 손님은 없는 듯했다. 모두가 사람을 향해 화를 내면서도 기계를 향해 화내는 이가 없다는 게 서글펐다. 매장 내엔 마치 키오스크 주문 시스템은 '선'이고, 그것을 배우지 못한 노인이 '악'이라는 식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어떤 기술이 추가되고 보완되든 키오스크는 노인들에게 친화적일 수 없는 도구다. 이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결국엔 노인을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들이 현재의 시스템을 배워 익숙해질 때쯤이면 한층 업그레이드된 키오스크가 등장해 있을 것이고, 또다시 젊은 세대로부터 '민폐'를 끼친다고 손가락질당한 게 불 보듯 환하다.
나이를 떠나 빨리 가는 사람들과 더디 가는 사람들을 함께 배려하는 사회라야 건강한 공동체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비장애인이 누리는 이동권 등의 당연한 권리를 침해당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키오스크로만 주문이 가능한 시스템은 첨단 기술의 발전이 노인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과 혐오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주제라고 여겨 이 경험담을 아이들과 공유했더니, 한 아이가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며 대안을 제시했다. 이를 듣고 솔깃해하는 아이들의 맞장구에 더는 할 말을 잃었다. 솔직히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배제와 차별, 혐오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주는 게 교육의 본령일진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너무 멀리 와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의 주장인즉슨 이랬다.
"그냥 '노인 전용 카페'를 만들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