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11월 민중총궐기 당시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백남기 농민, 그는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쳤다. ⓒ 오마이뉴스
동학혁명의 주력은 농민이었다. 동학혁명 이후 활빈당·영학당·의병으로 한말 저항운동의 주역은 농민이었다. 무능·부패한 박근혜 정권을 몰아내는 2015년 연인원 1,700만 명이 참여한 촛불집회, 윤석열의 불법 계엄령과 내란에 트랙터를 몰고 남태령에 집결한 주역도 농민들이었다.
이승만 독재를 타도한 데는 김주열 열사의 죽임이, 전두환을 쫓아내는 데는 박종철·이한열, 박근혜의 탄핵에는 농민운동가 백남기의 희생이 불쏘시개 역할을 하였다면 과언일까.
백남기 열사는 1947년 10월 8일 전남 보성군 웅치면 유산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웅치면 면장을 지냈다. 광주서중과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8년 중앙대학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그의 대학시절은 박정희 독재가 칼춤을 추던 시기였다. 그는 법대 학생회장을 맡아 반독재 학생운동에 나섰다. 1971년 10월 정부의 위수령에 반발해 시위를 벌이다 제적되었다. 그후 복교했으나 정부가 유신을 선포하자 교내에서 유신철폐 시위를 주도하고 공안 당국의 수배가 내려지자 명동성당으로 피신했다. 이때 세례를 받고(세례명 임마누엘)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다시 복교하여 학업에 열중할 때 정부가 잇따라 긴급조치를 선포, 이에 맞서 전국대학생연맹에서 활동하다가 2차 제적을 당했다. 인천의 포도밭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중 10.26사태로 정세가 바뀌어서 1980년 3월 다시 복교하였다.
1980년 민주화의 봄을 맞아 어용 학도호국단을 폐기하려는 중앙대 총학생회 부회장을 맡아 그해 5월 8일 유신잔당 장례식을 주도하고 5월 15일에는 중앙대생 4천여 명과 함께 서울역까지 도보행진에 나섰다. 전두환의 5.17 계엄 확대로 체포되고 학교에서는 퇴학 처분을 당했다. 3차 제적이다.
백남기 열사는 1980년 8월 수도군단 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디음해 3월 3.1절 특사로 가석방되었다. 풀려난 그는 귀향하여 농부가 되었다. 박경숙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아들 하나, 딸 둘을 두었다. 아들 이름은 '백두산', 큰 딸은 '백도라지', 막내는 '백민주화'라고 지었다. 이같은 이름 짓기는 이승만 독재에 저항하다 투옥된 서민호가 손자 이름을 '타이', '타승', '타만' 즉 '이승만 타도'라 지은 이래 처음이다.
농부가 된 그는 가톨릭농민회에 참여하고 1992년부터 1년여 동안 가톨릭농민회 부회장을 맡았다. 그가 귀향하여 열중한 사업은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이다. 우리 밀 되살리기는 고향 살리기 운동, 생태계 균형과 환경보전 운동을 목적으로 1991년 11월에 시단법인으로 출발했다. 그는 광주·전남본부의 창립을 주도하고, 1994년 공동의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동안 우리 밀은 미국 등 수입 밀의 공급으로 국내 생산이 크게 줄어들고 자급이 낮아지면서 식량 안보와 환경문제가 대두되었다. 우리 밀은 GMO(유전자 변형)에 걱정이 적고 소화가 잘 되며, 지역 농가와 상생하는 효과가 있다. 또한 친환경 재배와 소비 확대를 통해 생태계 균형과 환경 보전에도 기여한다고 믿었다.
그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교육을 통해 우리 밀의 우수성과 올바른 소비 방법을 알리는 교육, 체험 프로그램, 학교급식 등에 열정을 바쳤다. 식량주권·건강·환경·지역경제 등 다양한 가치를 확보하는 데 이만한 품목도 찾기 어렵다고 보고 활동한 것이다.
그의 대학시절과 수형생활, 농민운동 등을 함께 했던 분들은 하나같이, 대학생 시절에는 세 번이나 제적을 당할 정도로 민주화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귀향해 농민으로 살면서 가톨릭농민회를 주도하며 농민운동을 했고, 우리 밀 살리기 운동에도 주도적으로 나섰다고 회고한다.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는 바위 같은 사람이었고, 세상 경험의 연륜과 학식에서도 지도자적인 카리스마가 넘치는 리더로서 모든 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웃기만 하고 좀처럼 말이 없는 분이지만 쇠처럼 단단한 체구에 정신력도 남달라서 모두가 그 품에 안길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우리가 백남기다 - 백남기 농민이 뿌린 민주주의의 씨앗>, 출판사 서평)
2015년 11월 14일 오후 제1차 시민총궐기 시위가 서울 광화문에서 열렸다. 쌀값이 추락하는 등 박근혜 정권의 농정은 실패를 거듭했다. 백남기 열사는 상경하여 시위에 나섰다. 그리고 맨 앞에 섰다. 경찰이 차벽으로 시위대를 가로막았다. 차벽을 뚫기 위해 참가자들과 함께 버스에 묶인 밧줄을 잡아 당겼다. 이때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거센 물대포를 쏘았다. 경찰이 그의 머리를 향해 직사 살수한 것이다.

▲장례 미사를 마친 이들은 고인의 영정 사진을 확대한 그림을 선두로 해 고인의 꽃상여, 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은 글인 '만장' 등을 뒤따라 고인이 쓰러진 종로 르메이르 빌딩까지 행진했다. ⓒ 유성애
백 열사는 현장에서 쓰러지고 구급차에 실려 서울대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경찰의 잔혹한 진압으로 농민운동 지도자가 쓰러진 사실이 알려지자 민중총궐기를 주도했던 시민단체 지도자들을 비롯 농민·노동자·신부·수녀들이 서울대병원 농성장으로 몰려왔다. 이들은 정부에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연일 시위를 계속했다.
백남기 열사는 쓰러진 지 317일 만인 2016년 9월 25일 숨을 거뒀다. 서울대병원은 사망진단서에 '병사'라고 기록했고 경찰은 그의 시신을 탈취하려고 했다. 정부와 경찰은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다. 서울대병원의 주장을 반박하는 의사들이 모이고 진실을 말하지 않은 의사들을 향해 의과대학 재학생들의 비판 시위가 있었다.
백남기 열사의 사고 당일 경찰의 사고 보고서는 경찰의 물대포 사용으로 인해 뇌출혈을 입었다고 적혀 있다. 그럼에도 새누리당을 비롯한 일각에서는 그가 쓰러졌을 당시 동영상에 빨간 우의를 입은 자가 쓰러진 백 씨를 덮치는 장면이 있다며 사고 원인이 물대포 아닌 시위대의 폭행 즉 자작극으로 몰아갔다.
2016년 10월 3일 15개 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 809명은 그의 사망 원인은 외인사임이 명백하다며 잘못된 진단서로 의사 전체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상황을 비판했다. 이 해 12월 6일 박근혜 탄핵소추안이 발의되고, 이에 앞서 11월 12일 광화문에 100만 시민의 촛불시위가 있었다.
경찰이 무고한 농민을 죽이고 박근혜 정권의 경찰·검찰·정치권·의료진들의 은폐 조작이 저질러졌으나 진실을 밝히려는 시민항쟁이 계속되고 결국 박근혜는 탄핵으로 쫓겨났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민주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