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김용균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의 추모 조형물이 태안화력 정문 앞에 조성됐다. ⓒ 신문웅
2021년 4월 28일 태안화력발전소 앞에 많은 이들이 모였다. '김용균 추모조형물'을 사고가 발생한 그곳에 세우기까지 2년을 노력했다. 크기가 크다고 안 된다고 했고, 장소가 마땅찮다고 거부당했고, 왜 세우냐는 근본적인 질문을 가장한 반대도 있었다. 김용균 추모조형물을 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 세워서는 안 된다는 입장의 유인물을 배포하는 이들도 봤다.
그래도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기 위한 투쟁을 했고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에 "내가 김용균이다"를 외쳤던 우리 스스로를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추모조형물을 세웠다.
그리고 김용균의 추모조형물은 겨울에 따스한 목도리를 두르기도 하고, 여름이 되면 누군가가 알아서 그 목도리를 벗겨놓는다. 휑하던 정문 앞 로터리 공간에는 이제 김용균 추모조형물보다 몇 배나 큰 소나무가 가득 들어왔다. 추모조형물이 작게 보일 만큼 큰 소나무들은 발전소의 거대함을 느끼게 만든다.
그 나무들을 뒷 배경으로 김용균 추모조형물은 색이 조금씩 바래가며 햇빛도, 비도, 눈도, 안개도 맞으며 그 자리를 지켰다.
기후위기 속 비정규직을 활용한 이윤 남기기
그러는 사이 석탄화력발전소 폐쇄는 점점 현실적 선택이 되었고 노동자들은 석탄화력발전에서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적극적으로 고민했다. 정부 차원으로 재생에너지 중심의 에너지 정책을 내기도 했지만 그건 오로지 에너지에 대한 선택일 뿐이었다. 노동자들이 생각하는 에너지 정책의 전환은 일터와 삶의 전환이었고, 우리 사회 운영시스템의 전환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에너지 전환 과정은 누구를 중심으로 사고되어야 하는지, 무엇을 목표로 이뤄져야 하는지, 공동체에 좋은 에너지가 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운영해야 하는지를 다 고민해야 했다.
그런 과정은 이해관계자가 다른 상황에서는 당연히 서로가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부딪힘을 풀어야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는데, 그럴 때 양쪽 다 한 발씩 양보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가 나아가고자 하는 에너지 정책 방향에 따라 누군가는 세 발을 앞으로 가고 다른 누군가는 한 발 옆으로 가야 할 수도 있다.
김용균의 동료들은 그런 조정과 조율의 과정을, 우리 사회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아가는 투쟁을 시작했고 '기후위기'와 노동자들의 투쟁이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변화는 더디었고 정부의 방향은 불명확했다. 기후위기를 극복하자고 하면서도 원자력과 석탄화력발전소의 유지나 민간운영 석탄화력발전소를 인정했다.
공공을 위한 에너지 정책이라고 했고, 발전소는 공공기관이지만 운영방식은 '공공성'을 담지 못했다.
여전히 이익을 많이 내야 했고, 원청 발전사의 이익을 위해 하청구조를 활용하여 다단계로 하청업체에게 주는 수익은 줄이는 대신 비용과 위험을 책임지게 했다. 줄어드는 이익을 수용할 수 없는 하청업체는 다시 2차 하청업체를 쓰면서 똑같은 방식으로 수익과 비용과 위험을 이리저리 나눴다.
경쟁적으로 갉아먹은 공공성
정규직 고용구조가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규직 고용구조는 일반적인 고용형태이며 안전의 기본적 조건이다. 기본이 무너지니 산업재해는 발생할 수밖에 없고 그럴 때마다 하청업체를 갈아치우는 방식으로 유지해온 발전사들이다.
발전사들도 공공기관이라고는 하지만 경쟁시스템이다. A발전사가 살아남으려면 다른 발전사가 실수를 하거나 이익을 내지 못해야 한다. 그러니 같은 지향점을 가진 에너지 공공기관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효율성도 협력구조도 생기기 어렵다.
노동자들은 업체가 바뀌는 와중에도 큰 문제가 없으면 그곳에서 계속 일해왔다. 한전KPS비정규직들 중 20년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한 노동자도 있다. 같은 현장에서 더 오래 일하고, 현장을 더 잘 아는 노동자들이고 큰 문제 없으면 같은 곳에서 계속 일한다지만 업체 계약 기간만 되면 불안했다.
김충현과 김충현의 동료들은 그랬다. 그래서 원청 관리자들과 친하게 지내려 노력했고 그들에게 하소연도 해보고 상담도 했다. 계약서에 없는 일을 시킬 때도 하청업체는 하청노동자들을 방어해주지 못했다. 원청이 요구하는 일은 해야 하는 것이고, 제대로 된 보수의 지급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그렇게 유지한 일자리였지만 김충현은 재계약이 되지 못했고 1년 동안 발전소 일용직으로 간혹 일을 했다.
1년 후 김충현은 다시 발전소로 돌아왔고 노동조합을 만든다고 하여 기대도 했다. 그러나 2차하청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단결은 금방 큰 성과를 보이지는 못했다. 조금씩 변해갔지만 근본적 문제들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업무가 정규직 한전KPS노동자들과 다르지 않음을 점점 확신하게 되었고, 2022년 자신들을 스스로 '불법 파견노동자'라 규정하고 자신들의 사업주는 '한전KPS'원청임을 제기하는 소송을 시작했다. 김충현은 동료들과 곧 잃을 수도 있는 일자리에 대해 이야기 나눴고, 어떻게든 정규직이 되기 위해 공부도 더하고 기술도 익혔다. 새벽5시면 집에서 출근했고 새벽 출근길을 사진으로 남겨놓기도 했다.
그러다 김충현은 고인이 되었다. 어느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아니 예고는 있었다. 다만 그의 노동과 환경은 끊임없이 알려주는 위험을 없앨 수 있는 권한이 김충현에게는 없었다. 김충현의 노동이 보내는 위험의 신호를 한국서부발전과 한전KPS가 접수하고 받아들여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전KPS노동자 김충현이었다면
![[서울출발]태안화력발전소 고 김충현노동자 기억버스 신청 9월 10일 태안화력발전소 정문앞에서 진행될 고 김충현 노동자 기억식에 참가할 서울출발 버스를 운행하니 신청하시면 된다.](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5/0901/IE003516987_STD.jpg)
▲[서울출발]태안화력발전소 고 김충현노동자 기억버스 신청9월 10일 태안화력발전소 정문앞에서 진행될 고 김충현 노동자 기억식에 참가할 서울출발 버스를 운행하니 신청하시면 된다. ⓒ 고 김충현 대책위
김충현은 고인이 되었고 동료들은 싸웠다. 사업장에서, 태안에서, 서울에서, 법정에서, 용산에서. 그리고 법은 김충현과 그 동료들이 스스로 이름새겼던 '불법파견 노동자'들이라고 판단했다. 그러하니 원청이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했다.
이미 고인이 된 김충현에게 그 판결이 무슨 의미냐고 말하지 말라. 그 판결은 김충현이 죽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비정규직이어서 죽고 다치고 세상에서 사라지는 잘못된 반복을 끊어내려고 김용균 옆에 김충현을 세우기로 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런 죽음이 있었다는 것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그 죽음 너머의 이야기를 각자가 기억해야 한다. 그리하여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 그 기억들의 조각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 역사가 될 것이다.
<태안화력발전소故김충현 노동자 기억식>
-2025. 9. 10.(수) 11:30~12:00 태안화력발전소 정문
<서울출발 기억버스신청>
-출발: 9.10.(수) 08:30 사당역 주차장/14:00 태안 출발 예정
-참가비: 무료 *단 9.7.(일)까지 25명 이상 신청 확인시 운행
-신청: bit.ly/김충현기억식
-문의: 김충현대책위 남성화 (010-8398-7648), 권미정 (010-3365-9404)
[태안화력 故김충현 비정규직노동자 사망사고 대책위원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김용균재단 운영위원장인 권미정 님이 쓰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