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진료실에서 보내는 편지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지만 소속기관의 배려로 영국에서 잠시 머물며 여러 가지를 새로 배우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진폐증과 같은 직업성 호흡기질환 환자를 자주 만났습니다. 영국에 와서도 이러한 환자들을 보는 클리닉에 방문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몇 번 외래진료를 참관하였는데, 석면폐증과 악성중피종 환자가 한국보다 훨씬 많더군요.
한국에선 비교적 드물게 보이는 질환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에 한번 놀라고, 석면폐증 환자에게 처방하는 약제에 두 번 놀랐습니다. 제가 본 영국의 석면폐증 환자들에게 사용되고 있던 약품은 닌테다닙(nintedanib)이라는 성분의 약으로, 폐섬유화를 막아주는 기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증 질환자에게 더 많은 자원이 가게 한다'는 명제는 일견 쉬워 보이지만, 사실은 훨씬 복잡한 이야기일 수 있다 ⓒ 게티이미지뱅크
다양한 치료전략을 더 많은 이들에게 적용하기 위해
제가 의과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폐섬유화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방법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스테로이드를 사용하여 염증반응을 전신적으로 막아주는 것만이 최선일 뿐이었죠. 이러한 현실에서 제약회사들은 폐섬유화 치료제를 개발하려 노력하였고, 일본에서 개발된 피르페니돈(pirfenidone)이라는 성분의 신약이 출시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5년 말에 건강보험 적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아주 제한적인 환자들에게만 적용되었지만, 2019년부터 적용범위가 대폭 확대되어 많은 환자가 이 약의 혜택을 볼 수 있었습니다.
폐섬유화 치료제가 승인되고 건강보험 적용이 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었지만, 아쉬운 면 또한 상당했습니다. 치료제가 딱 하나뿐이라는 것은 치료전략을 짜는 데 제한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기술적으로 대체제가 없다면 어쩔 수 없지만, 닌테다닙은 피르페니돈과 다른 기전으로 폐섬유화를 막는 약으로 출시되어 있었고, 2016년에는 한국에서도 사용 허가를 받습니다. 피르페니돈 복용 중 부작용이 발생하거나 효과가 미흡한 경우, 닌테다닙은 기전이 다른 대안 치료제로 고려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높은 약가는 오랜 기간, 이 약을 진료실에서 사용하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닌테다닙의 보험급여 적용 심사는 2021년에 다시 이루어졌는데, 이때도 경제성평가를 통과하지 못하여 부결되었습니다. 그러다가 2025년 5월 최근에 드디어 보험급여 대상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알아보니 특발성폐섬유증(IPF)은 보험급여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조항이 있더군요. 이 약을 필요로 하는 많은 경우는 특발성폐섬유증 환자이고, 약의 적응증(어떠한 약제나 수술 따위에 의하여 치료 효과가 기대되는 병이나 증상) 중 1번은 특발성폐섬유증으로 명시되어 있지만 정작 보험급여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편 특발성폐섬유증의 경우 영국에서는 노력성폐활량(FVC)이 80% 미만인 경우에 한해 제한적으로 영국 국가건강보장제도('NHS')의 지원이 가능하였는데, 2023년 2월부터는 80% 이상인 경우에도 지원이 가능하도록 지침이 변경되었습니다. 즉, 아직 폐기능이 많이 떨어지기 전이라도 약제 사용을 통해 폐기능의 감소 속도를 유의하게 낮출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지원이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더 많이 아픈 이에게 더 많은 자원을'이라는 명제는 한정된 자원과 만나 복잡한 문제가 된다
그간 치료법이 없던 질환에 대해 개발된 신약은 일반적으로 약값이 비쌉니다. 기존 재정에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기에, 보험으로 보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비교적 잘 알고 있는 분야인 폐섬유성 질환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지만, 폐고혈압 치료제, 새로운 항암제 등 여러 분야에서 비슷한 성격의 문제들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정되어 있는 유한한 자원을 배분해야 하는 문제이기에, 이해당사자들 간의 입장이 갈리게 되고,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제도는 '중증 환자에게 더 많은 자원이 가게 한다'라는 명제가 근본적인 철학으로 적용되지 않는 때가 많은 것 같아 아쉽습니다. 물론 제가 사례로 들고 온 영국의 NHS에 대해서는 진료 지연, 접근성 문제 등 다양한 한계점이 국내외 언론에서도 자주 지적되고 있습니다. 가벼운 증상으로는 의사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그로 인해 진단과 처치가 지연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고, 실제로 심각한 진료 대기 문제는 영국에서도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중증 질환자에게 더 많은 자원이 가게 한다는 명제는 일견 쉬워 보이지만, 사실은 훨씬 복잡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암과 같은 심각한 질병에 걸렸더라도 초기 증세는 대부분 가벼울 수밖에 없고, 그렇다 보니 진단이 지연되면서 치료가 가능한 시기를 놓치는 사례가 많이 발생할 수 있으니까요. 다만 중증으로 확인된 환자들의 경우 보장 범위는 한국보다 훨씬 넓고, NHS에서 커버하지 못하는 조기진단 부분은 고가의 사설 클리닉에서 메꾸는 구조입니다. 자원이 무한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지점이 최적인가 하는 논의는 훨씬 넓은 시야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진료실에 자리한 한 명의 의사로서는, 외국이었다면 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중증 질환을 가진 환자들에게 드릴 수 있는 도움이 제한된다는 것에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번에 제한적이나마 보험급여 대상이 된 닌테다닙의 경우 최초 허가로부터 보험급여 적용까지 9년이나 걸렸고, 이제 곧 특허 만료를 앞두고 있습니다.
보험급여 적용이 지연되면서, 일부에서는 재정부담을 고려해 의도적으로 시기를 늦추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적 시선도 존재하고, 제약산업 전반에서 한국 시장은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곧, 한국에서 신약의 혜택을 조기에 보는 것은 어렵다는 이야기이지요.
더한 고통을 진 이들의 삶을 고려한 분배를
오늘 다룬 석면폐증은 잘 알려진 직업병이고, 특발성폐섬유증의 경우 몇몇 직업군들에서 호발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어 일부의 경우 업무관련성을 인정받아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적용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발병 원인이 분진 노출과 같은 단독 요인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고, 많은 요인이 모여 질병을 유발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어 일하면서 노출된 유해요인이 있다고 해서 전부 업무관련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굳이 업무관련성이 명확하지 않더라도, 중증 질환을 앓는 분들이 의료비 부담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려면 공공 재정이 유한한 만큼, 건강한 사람들이 누리는 혜택의 일부를 줄이는 대신 중증 환자에게 더 많은 자원을 배분하는 방향으로 조정하는 것도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의 노동안전보건 월간지 <일터> 8월호에도 게재됩니다. 이 글을 쓴 이종인님은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