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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대로 못 찾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지난 25일 작성한 '아침에 받은 문자 한 통, 4만 8590원을 아꼈다' 기사는 평소 눈치채지 못했던 서비스에서 얼마나 많은 돈이 새어나가는지 확인한 계기가 됐다. 매번 대수롭지 않게 지출했던 작은 돈들이 켜켜이 쌓이면, 시간이 지나 큰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렇게 소비란 작은 균열이 둑을 무너뜨리듯, 사소한 지출이 쌓이면 삶을 흔드는 힘으로 변했다.

이번에 불필요한 구독을 정리하면서 새로운 벽을 만났다. 구독 다이어트는 단순히 지출을 줄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과정 하나하나가 예상보다 훨씬 고된 싸움이었다. 처음엔 내가 서툴러서 그런 줄 알았다. 아무리 찾아도 '해지하기'는 보이지 않았다. '요즘 세대가 아니라서 그런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끝내 이 버튼을 찾아냈을 때, 이 불편함이 우연이 아닌 '의도된 설계'임을 깨달았다.

들어올 땐 쉽게 들어와도, 나갈 땐 쉽지 않았다. 해지를 시도하는 순간부터 난관은 시작됐다. 버튼 하나 누르면 끝날 줄 알았던 과정은 미로처럼 복잡했고, 스크롤을 한참 내려야 작은 글씨로 숨어 있는 버튼이 겨우 나타났다. 그 사이 소비자는 수많은 광고 문구와 심리적 압박에 시달린다. 바로 이 장치들이 구독 다이어트를 힘겹게 만드는 진짜 이유였다.

깜놀하고도 남을 복잡한 셈법의 해지과정

검색을 조금만 해보면, 이런 경험이 결코 나만의 일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기업들은 소비자의 '해지 의지'를 최대한 약화시키기 위해 이런 장치를 설계한다. 업계에서는 이를 '다크 패턴(Dark Pattern)'이라 부른다. 온라인 서비스에서 사용자가 원하는 행동을 어렵게 만들고, 반대로 기업에 유리한 선택을 유도하는 디자인 기법이다.

 해지를 시작하기 위해 톱니 모양 버튼을 눌렀지만, [해지하기] 버튼은 바로 보이지 않았다. 뒤로 나가면 다시는 해지할 수 없고, 스크롤을 지속적으로 내려야만 화면 맨 하단 왼쪽에 작은 글씨로 [해지하기] 버튼이 나타난다. 그 과정에서 소비자는 여러 서비스의 광고 문구와 버튼에 심어 놓은 심리적 장치와 먼저 마주한다. ⑤번 그림 하단에 작은 빨간색 네모박스가 최종 [해지하기] 버튼이다.
해지를 시작하기 위해 톱니 모양 버튼을 눌렀지만, [해지하기] 버튼은 바로 보이지 않았다. 뒤로 나가면 다시는 해지할 수 없고, 스크롤을 지속적으로 내려야만 화면 맨 하단 왼쪽에 작은 글씨로 [해지하기] 버튼이 나타난다. 그 과정에서 소비자는 여러 서비스의 광고 문구와 버튼에 심어 놓은 심리적 장치와 먼저 마주한다. ⑤번 그림 하단에 작은 빨간색 네모박스가 최종 [해지하기] 버튼이다. ⓒ 김관식

실제로 와우 쇼핑몰 멤버십을 해지하는 과정에서 첫 단추부터 막혔다. '멤버십 관리' 페이지를 아무리 뒤져도 '해지' 버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겨우 [설정]을 들어가 톱니바퀴 그림을 눌렀다(①). 내 정보관리와 함께, 와우 멤버십을 눌렀다(②). 하지만 해지로 가는 길은 감감무소식이다. 결국 한참을 헤맨 끝에 화면 하단 구석에서야 버튼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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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하나 알게 됐다. 빠른 배송을 앞세운 쿠팡은 유료 멤버십 해지 과정에서도 '심리적 장치'를 활용한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혜택'을 두고 심리적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해지를 원하는 고객은 이 정교한 장치를 뛰어 넘어야 했다. 그 이유는 이랬다.

해지 절차에 들어서면 '그간 (내가 소비자로서) 누려온 혜택'이란 설명이 먼저 상세히 제시된다(③
). 스크롤을 좀더 내리다보면 해지 버튼에도 '멤버십 해지하기'라는 직접적인 문구 대신, 진한 파란 바탕색 버튼에 [내가 받고 있는 혜택 유지하기]라는 문구가 먼저 배치됐다. 그 아래 [와우 전용 혜택 그만 받기]라는 문구의 버튼 역시 해지를 주저하게 만드는 요소다. 게다가 이 버튼은 아무 색이 없어 상대적으로 눈에 잘 띄지 않는다(④).

더 심각한 건 [결제일 전에 알람 받기] 버튼을 중간에 끼워 넣었다는 사실이다. '(해지를) 한 번 더 생각해달라'는 압박처럼 보였다. 정작 소비자가 여기저기 찾던 실제 최종 해지 버튼은 화면의 맨 하단끝에 왼쪽에 배치돼 있다(⑤). 소비자는 이러한 도장깨기 관문을 모두 거쳐야만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에이 몰라'하고 넘어가는 순간, 구독자는 한달 요금이 한 번 더 통장에서 빠져나간다.

그런가 하면, 다른 서비스 해지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해지하기] 버튼은 흐릿한 회색 글씨로 처리된 반면, [모든 혜택 유지하기] 버튼은 진한 바탕색에 굵은 글씨로 눈에 띄게 강조돼 있었다. 단순한 시각적 차이 같지만, 의도적으로 소비자를 붙잡기 위한 장치였다.

 좌우 [해지하기] 버튼은 흰색 배경에 상대적으로 작은 글씨인 반면, [모든 혜택 유지하기] [배민클럽 계속 이용하기]버튼은 초록색의 버튼, 큰 글씨로 현격한 차이를 이루고 있다. 이는 최근 개정된 전자상거래법(제21조의2 제1항 제4호) 위반으로 '잘못된 계층구조'를 이루고 있다.
좌우 [해지하기] 버튼은 흰색 배경에 상대적으로 작은 글씨인 반면, [모든 혜택 유지하기] [배민클럽 계속 이용하기]버튼은 초록색의 버튼, 큰 글씨로 현격한 차이를 이루고 있다. 이는 최근 개정된 전자상거래법(제21조의2 제1항 제4호) 위반으로 '잘못된 계층구조'를 이루고 있다. ⓒ 김관식

'다크패턴', 이제 법이 규제한다

구독을 유도할 때는 편리함을 발빠르게 내세우던 기업들이, 막상 해지를 시도하면 소비자의 결심을 꺾기 위해 온갖 교묘한 장치를 총동원한다. 화면 속 작은 버튼 하나, 색 하나, 단계 하나까지 모두 전략의 일부다.

다크패턴에 대한 규제 가이드라인이나 관련 법령이 있는지 찾아봤다. 다크패턴을 규제하는 전자상거래법의 계도 기간이 지난 8월 13일 종료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따라 공정거래위원회는 다크패턴 6개 유형을 규율하는 개정 전자상거래법에 맞춰, 정기결제 증액이나 무료 서비스의 유료 전환 시 소비자 동의 기간 등 세부 사항을 담은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개정해 시행에 들어갔다.

 전자상거래법 개정으로 규제하는 6개 다크패턴 유형
전자상거래법 개정으로 규제하는 6개 다크패턴 유형 ⓒ 공정거래위원회

이러한 사례는 단순 불편을 넘어 법 위반 소지도 있다. 최근 개정된 전자상거래법은 다크 패턴 6개 유형을 규제하며, 특히 '잘못된 계층구조''취소·탈퇴 등의 방해' 유형 등을 명확히 금지한다. 버튼의 크기·색상·위치 차이로 소비자가 원하는 선택을 어렵게 만들거나, 해지 절차를 복잡하게 설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올해 2월 배포한 '온라인 다크 패턴 규제 문답서'에서 "선택항목 간 시각적 차이로 소비자가 오인하지 않도록 병렬적·무차별적 구조로 설계돼야 한다"고 밝혔다. 또 "과도하게 복잡한 절차는 소비자의 합리적 의사결정을 왜곡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상이 된 구독경제 시대, 소비자 주권 되찾기 위한 첫 걸음

불필요한 구독을 정리하며 겪은 불편은 단순한 개인적 경험에 그치지 않았다. 다크 패턴은 소비자의 시간과 주의를 갉아먹고, 때로는 경제적 부담을 떠안게 만드는 구조적 문제였다.

기업들은 가입을 쉽게 만들면서도 해지는 어렵게 설계해, 소비자의 선택권을 사실상 제한하고 있었다. 내가 '못 찾아서 그런가?'라고 자책했던 순간조차 사실은 기업의 계산된 설계 때문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구조가 특히 노인이나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훨씬 더 가혹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작은 버튼 하나, 단계마다 배치된 광고성 문구, 미묘한 색깔 차이 같은 요소는 디지털 기기에 서툰 이들에게는 '벽'으로 작용한다. 클릭 한 번의 차이가 매달의 지출로 이어지고, 이 과정에서 제대로 해지하지 못해 불필요한 비용을 장기간 떠안는 경우도 흔하다. 결국, 다크 패턴은 단순히 귀찮음을 넘어 '사회적 약자를 더 깊은 소비 함정에 가두는 장치'로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

구독 경제가 일상이 된 시대, 진짜 문제는 '얼마를 내는가'가 아니라 '언제든 얼마나 쉽게 해지할 수 있느냐'다. 소비자가 주도권을 되찾지 못한다면, 구독 다이어트는 언제까지나 험난한 싸움일 수밖에 없다.

#다크패턴#구독서비스#구독경제#전자상거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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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식 (seoulpal) 내방

"나는 당신이 하는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의 말할 권리를 위해서라면 목숨 걸고 싸우겠다" - 영국 작가 에블린 홀 - / seoulp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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