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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한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3~40여년 전. 젖은 새 한 마리처럼 떨고 있던 작은 생명이었다. 세월이 꽤 흘렀지만 유난히 비 내리는 날이면 그 울음소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 살아난다. 스쳐간 장면이라기 보다는 아직도 내 안 어딘가에 아릿하게 머무는 기억이다.
그날도 종일 잔비가 지루하게 흩날렸다. 흐릿한 시야 너머, 젖은 거리 위를 지나면서 길가에 선 채 울고 있는 아이가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비에 젖은 얇은 티셔츠가 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서너 살쯤 돼 보이는 아이였다. 며칠은 씻지 못한 채 거리를 떠돌았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얼굴과 손엔 먼지와 때가 엉겨 붙어 있었고, 아이는 울다 지친 듯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갓길에 세웠다. 아이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몸을 낮추며 물었다.
"아가야! 엄마는 어디 계시니?"
말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아이의 눈빛이 나를 붙잡았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깊은 두려움과 피로가 고여있었다. 아이에게 숨겨진 뒷얘기는 모른다 해도 그 어린 생명을 그대로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아이를 안아 조심스레 차에 태웠다. 아이는 지친 듯 뒷좌석에 앉아서 무심히 밖을 내다봤다.

▲비내리던 날, 거리를 헤매던 아이. ⓒ anant90 on Unsplash
곧장 욕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줄기가 부드럽게 쏟아지자, 아이는 말없이 몸을 맡겼고 땟국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축 늘어진 어깨, 작고 앙상한 두 팔, 손톱 밑엔 검은 때가 단단히 박혀 있었다. 흙탕물처럼 탁 하던 눈빛이 조금씩 맑아졌다. 마치 오랫동안 비에 젖은 날개를 말리는 새처럼 아이는 점점 제 모습을 찾아갔다.
미역국에 밥을 말아 한 수저씩 떠 먹였다. 아이는 몇 번 씹지도 않고 꿀꺽 삼켰다. 두 수저, 세 수저 어느새 그릇이 반쯤 비어갔고, 그 모습에 목이 메었다.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을까. 걸레처럼 헤진 옷을 벗기고, 아들의 옷으로 갈아입혔다. 옷은 조금 컸지만 금세 말쑥해졌다. 낯선 공간에서 불안했을 아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등을 토닥이며 속삭였다.
"아가야, 괜찮아! 이젠 괜찮아!"
잠시 후, 아이는 슬그머니 거실 바닥에 내려 섰다. 한참 눈치를 보던 아이는 조심스레 발끝을 움직이더니 이내 양손을 벌리고 거실 한쪽 끝으로 달려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조심스러움이 점점 호기심으로 바뀌는 게 보였다. 그러더니 아들의 장난감 자동차를 발견하곤, 망설임도 없이 엎드려 바닥에 밀기 시작하며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손을 흔들며 "부릉부릉" 소리를 흉내 내는 모습엔 어느새 두려움이 사라지고 있었다. 얼굴은 발그레 달아올랐고, 눈동자는 장난감보다 더 반짝였다. 그 웃음소리는 집 안 구석구석을 따뜻하게 채웠고, 내 마음에도 아늑한 햇살처럼 번져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웃음이 머무는 동안 만큼은 세상의 모든 근심이 멈춘 듯했다. 나는 속으로 기도했다. 이 젖은 새 한 마리가, 이 작은 생명이 이대로 평온 속에 머물기를.
그러나 그 웃음을 오래 지켜줄 수 없었다. 아동 보호기관에 신고해야 한다는 이웃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이를 품에 안은 채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과 함께 보호소로 이동하는 동안 아이는 내 품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서류 몇 장을 작성하고 무표정한 직원이 "이제 가셔도 됩니다"라는 한마디를 차갑게 던졌다.
그 순간, 아이는 와락 내 품에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 작디 작은 몸이 떨렸고, 주먹으로 내 옷을 움켜쥐며 절박하게 온몸으로 외쳤다. 마치 벼랑 끝에 매달려 뻗는 손길 같았다. 아이는 그때 또 한 번 버려졌다고 느꼈을 것이다. 나 역시 아이의 등을 떨리는 손으로 쓸어 내리며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미안해'라는 말은 너무 가벼웠고, '괜찮을 거야'는 너무 거짓이었다. 아이를 어렵게 보호사에게 넘긴 뒤에도, 나는 몇 번이고 돌아보았다.
울음소리는 문 너머에서 점점 멀어졌지만 내 귓가엔 더 선명하게 박혔다. 마음속으로 이 생명이 누군가의 품에서 다시 웃을 수 있기를 몇 번이고 되뇌어 기도했다. 바람이 한 차례 불고 나서야,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마음속 어딘가가 조용히 찢겨진 채로.
그날 이후, 내 마음 한 편에 늘 젖은 새 한 마리가 숨죽여 웅크리고 있다. 그 아이는 그렇게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이름도,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지만 비가 내리는 날이면 가슴이 저릿해진다. 귓가에 아직도 남아 있는 아이의 울음, 팔에 닿았던 가느다란 떨림, 그 모든 기억들이 물기 젖은 숨결처럼 스며든다.
그땐 왜, 더 용기를 내어 아이의 뒷소식을 수소문하지 못했을까. 무엇이 나를 주저앉혔을까. 아이는 지금 어디쯤을 걷고 있을까. 내가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었던 것이 고작 하루였다는 사실이 시간이 지날수록 미안하고, 더 아프다. 그래서 지금도 비 내리는 날이면 그 아이를 떠올린다. 마음 속 어딘가, 여전히 축축한 깃털을 털며 그 새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 짧은 마주침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품고 있었는지를. 그 아이가 내게 머물렀던 하루가, 내 삶 속에서 얼마나 길고 깊은 여운으로 남게 되었는지를. 아이와 비슷한 또래였던 아들을 바라볼 때면, 문득문득 그 아이의 얼굴이 겹쳐진다.
누군가에게 닿지 못한 마음은 그저 흩어져 사라지는 걸까. 아니, 어쩌면 그런 마음이기에 더 오래 남는 것인지도 모른다. 잊었다고 믿었지만, 어느 날 비 냄새와 함께 떠오르는 그날의 공기, 젖은 눈빛, 아이의 체온 하나가 아직도 내 안 어딘가를 조용히 적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