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잃어가고 있는 WTO 시스템의 정체성을 극복하고, 글로벌 ‘무역 재난’에서 벗어나는 ‘제3의 길(GTO)’을 개척해야 할 때이다. 한국이 앞장서야 한다. ⓒ @ Perplexity AI 생성 이미지
세계무역기구(WTO)가 설립된 지 30년이 지났다. 하지만 통상교섭(라운드) 하나 제대로 성사시키지 못하고, 시스템 에러 상태이다. 2016년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 영국의 EU 탈퇴(브렉시트, British Exit) 등 무역 시스템의 블록경제화로 인해 국제규범은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급기야 '무기징역'과 같은 중대한 제재를 받은, 더 이상 기대기 힘든 '재난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 불안정한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어 처방전이 절실한 상황이다. '잃어버린 WTO 시스템'은 보호무역 등 자국 우선주의에 관한 리스크 관리가 전혀 작동하지 못한 결과이다.
잃어버린 WTO 30년, 대안은 무엇인가
WTO는 지난 30년간 다자간 무역질서 구축에 기여했으나 불공정무역, 분쟁해결절차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함에 따른 회원국의 규정 이행 실패, 다른 무역제도로의 전환으로 인한 협상력 상실 등 구조적 한계에 직면했다.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의 장기 교착과 더불어 미국 등 주요국의 보호무역주의 강화, 상소기구(DSU)의 마비로 분쟁해결 기능(Appellate Body)이 거의 붕괴되어 시스템 신뢰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따라 복수국간 지역주의 협정, 즉, 소(小)다자주의(Mini-Multilateralism)가 확산되고 있으며, 새로운 국제무역질서가 모색되고 있다.
국제무역 시스템의 '게임 체인저'로 한국이 나서야 한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잃어버린 WTO 시스템의 정체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한국 외교가 가야 할 길(방향성)은 무엇인가? 글로벌 무역 재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이제는 국제무역 시스템의 게임 체인저로 직접 나서야 한다. 아울러 복수국간 협정과 메가 FTA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규범을 주도하는 전략에 적극 참여하며, 선도적 규범 제안국으로서 역할을 다해야 한다.
미국의 관세 장벽 강화에 대응해 세계 각국이 연대하여 새로운 무역 협력체를 구축하는 현시점에서, 한국이 주도적으로 국제무역판을 재편하는 중심에 서야 한다. EU와 인도는 연내 FTA 체결을 추진 중이며, 남미공동시장 메르코수르(MERCOSUR: Mercado Común del Sur)도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태평양 연안 국가들은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Comprehensive and Progressive Agreement for Trans-Pacific Partnership)를 중심으로 결속을 강화하며 중국까지 가입 의사를 밝히는 다자 협력체로 성장했다. 2018년 출범한 CPTPP는 이미 글로벌 무역 협력의 새로운 축으로 자리 잡았으며, 영국이 지난해 가입해 그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이러한 변화는 다자간 협력을 통한 새로운 무역질서 구축이 필연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도 CPTPP 가입 등 적극적으로 이 흐름에 참여해 세계무역 판도를 바꾸는 '레짐 체인저'로 나서야 한다.
오는 8월 23일 예정된 한일 정상회담에서는 이 같은 전략적 협력이 주요 의제로 논의되길 바란다. 특히, 관세협정과 무역 규범 분야에서 양국이 긴밀히 협력해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무역강국에 공동 압박을 가할 수 있는 협력 시스템을 구축하는 첫걸음이 되길 기대한다. 이는 단순한 한일 경제협력 차원을 넘어 동북아시아 역내 안정과 번영을 위한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다.
양국이 서로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고 글로벌 무역 질서 변화에 주도적으로 대응한다면, 동아시아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판의 중심축으로서 위상을 더욱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한국은 올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의장국으로서 다자무역 체제(규범)의 신뢰회복을 중점 과제로 삼아야 한다. 특히 미국 트럼프 행정부 시절 나타난 시스템의 불확실성과 보호무역주의 부활에 대응하기 위해 국제제도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선 아시아·태평양 지역 21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지역경제 레짐'인 APEC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좋은 기회이다.
2025년 경주 APEC 정상회의(10.30~11.1)의 주요 아젠다는 '지속가능한 내일(Building a Sustainable Tomorrow)'로, 연결, 혁신, 번영의 3대 핵심 의제에 AI 협력과 인구구조 변화 대응이 포함되어 있다. 미래 지향적 의제를 주도함과 동시에 한국은 APEC에서 '트럼프의 국제레짐으로 복귀'를 위한 제도적 발판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다자무역 체제 강화를 통한 안정된 제도화 구축에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우선 회원국(시장)들이 APEC를 통한 협력망을 넓히고, 나아가 리스크 관리에 힘써야 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새로운 세계무역제도 설립도 기대해 볼 수 있다.
뉴 GTO의 탄생을 바란다
셋째, 경제적 포용성, 기후변화 대응을 포함한 환경 가치, 디지털 전환(DX) 등 다양한 현안에 대해 국제적 협력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 WTO를 수술대에 올리는 데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 국제무역 질서가 '포스트 WTO' 시대로 접어들며 불확실성이 커진 지금, 한국은 수동적 수용자가 아닌 적극적 개혁자로 나서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곧 '잃어버린 WTO 30년'으로부터의 부흥(복구) 혹은 법제도의 진화의 소중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물론 WTO 내 상소대체수단인 다자분쟁해결기구 (MPIA, Multi-Party Interim Appeal Arbitration Arrangement)를 적극 활용하는 보완책을 병행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무역 영토 대국인 한국은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도 한·미 FTA, 한·EU,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 등 국제무역 레짐을 통해 자유무역 회복을 선도하고 있다. 또한 디지털 무역협정과 국제표준화 경쟁에서 선도적 위치를 확보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는 국제규범 설정과 '경제안보'를 둘러싼 조율 능력을 강화하며, 변동성 높은 무역환경에서 '제도 전환'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는 데 필수불가결하다.
무엇보다 한국이 새로운 '글로벌무역기구(GTO: Global Trade Organization)' 구상을 이끄는 것이야말로 아시아태평양지역(APEC)을 넘어 세계무역질서(WTO) 재편의 핵심 '게임 체인저'로 자리매김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