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금이 작가 <슬픔의 틈새> 책 앞표지 ⓒ 사계절출판사
"1945년 8월 15일은 조국이 해방을 맞은 날이지만, 사할린 한인들에겐 그로 인해 다시 한 번 고향과 가족을 잃게 된 날이었다." - 본문 중에서
화태이자 가라후토이자 남사할린으로 불렸던 땅. 그곳은 1940년대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국적과 고향을 빼앗긴 채 떠밀려온 사람들의 무덤이자, 기어이 삶을 일궈낸 사람들의 터전이었다.
이 비극의 시작은 1938년 일본이 제정한 '국가총동원법'이었다. 소설 속 단옥의 아버지 만석은 월급 200엔, 2년 계약, 의식주 해결이라는 감언이설에 속아 사할린 탄광으로 향했다. 당시(1930~40년대), 일본에게 속은 조선인들이 '돈 벌러 잠시 다녀오겠다'며 바다를 건너가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며, 심지어 탄광 노동이라는 사실 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사할린에서 그들을 기다린 것은 혹독한 강제 노동과 위험한 환경, 끝없이 늘어나는 빚뿐이었다. 기차 삯, 배 삯, 심지어 작업복 값까지 빚으로 떠안아야 했고, 대부분의 임금은 강제로 저금되었다. 기존에 맺었던 2년 계약은 지켜지지 않았고,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아버지가 고향을 떠나고 3년 뒤, 결국 단옥은 가족들과 함께 사할린으로 향한다.
그런 식으로 사할린 땅에 살게 된 많은 조선인들이 전쟁과 패전, 그리고 냉전의 장벽에 의해 반세기 넘게 갇혀 지냈다. 이 책은 바로 그 땅, 그 세월 속에 살았던 여성 디아스포라 단옥과 그녀를 둘러싼 이웃들의 생애를 담는다.
사할린 한인 여성들의 삶
이금이 작가의 신작 <슬픔의 틈새>는 80여 년에 걸친 사할린 한인 여성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국적'과 '혈통'의 의미에 얼마나 협소한 시선을 가져왔는지 꼬집는다. 작품 속 인물들은 역사라는 거대한 격랑에 휩쓸렸지만, 그것이 그들의 인간됨을 지배하게 두지 않았다. 이금이는 인물들을 특정한 국적의 대표자로 그리지 않는다. 대신, 서로를 친구로, 가족으로,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순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주인공 단옥과 이웃 유키에의 관계다. 유키에는 일본인 어머니와 첫 남편 사이에서 태어나, 이후 조선인 새아버지(정만)와 함께 살며 단옥의 이웃이 됐다. 시대의 편견 속에서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었지만,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삶의 굴곡을 함께 견뎌냈다.
이들은 상황상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있어야하는 때에도 서로에게 편지를 했고, 도움이 필요할 때 발 벗고 나섰다. 아이에서 어른이 되고, 첫 직업이 생기고, 연인을 만나고, 자식을 낳을 때 늘 옆에 있었고, 주름이 깊어져 가는 매 순간을 함께했다. '조선을 지배한 일본인'이라는 낙인을 넘어, '유키에'라는 한 사람을 보게 된 순간, 미움은 사라졌다. 이는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사실은 '국적'에 의해 생긴 추상일 뿐, 타자화를 멈추고 개인을 본다면 세상은 전혀 달라질 수 있음을 환기한다.
이 소설은 여성 디아스포라로서의 단옥을 입체적으로 그린다. 단옥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문을 놓지 않고 원하는 배움을 찾아나갔다. 원치 않는 결혼 대신 사랑을 쟁취했으며, 결혼 후에도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이 패전국이 되고, 사할린이 소련 아래에 지배되며 소련 국적, 북한 국적 선택을 강요 받던 시절, 단옥은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겠다는 뜻으로 '국적 없음'을 고수하던 시아버지의 뜻을 깨고, 소련 국적을 선택했다. 그 선택으로 자신과 아이들이 받던 차별의 벽을 넘어섰다.
전쟁과 냉전 속에서 정체성이 조선인에서 일본인, 무국적자, 소련인으로 바뀌어 가는 혼란 속에서도, 그는 스스로의 삶을 설계하고 지켜냈다. <슬픔의 틈새>는 단옥을 동정이나 연민의 시선에 갇힌 피해자나 생존자로 그리지 않는다. 시대를 가르고 나아가는 주체로 세운다. 이러한 입체적인 면모는 사할린 한인들의 삶을 기록해둔 아카이빙을 바탕으로 생겨났다. 그러한 점에서 소설이자 동시에 에세이이고, 다큐멘터리다.
이금이가 그려낸 과거, 우리의 현재를 비추다
소설은 이 같이 디아스포라의 주체적인 삶을 서술함과 동시에 '광복'이라는 단어 뒤에 가려진 또 다른 상처를 꺼내놓는다.
1994년, 광복 이후 49년 만에 한국과 일본 정부가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 시범사업에 합의했을 때, 사람들은 마침내 가족과 함께 고향 땅을 밟을 날을 꿈꿨다. 경기도 안산에 '고향마을'이라는 이름의 아파트가 지어졌고, 입주를 앞둔 설렘이 한인 사회를 감쌌다.
그러나 대상자 기준이 발표되자, 그 설렘은 곧 절망으로 바뀌었다.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할린에 이주했거나 태어난 사람만이 귀환 대상이었던 것이다. 광복이 가져온 날짜가 50년 뒤 또다시 가족을 갈라놓았다.
"단옥은 다시 또 천륜을 끊어놓는 한국과 일본의 결정에 마음이 상했다. 한인노인회에서 1세대를 1945년 8월 15일 이전 생으로 규정한 것은 고령인 1세대부터 우선 보상을 해주라는 뜻이었지, 그날을 이산가족을 만드는 용도로 이용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단옥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자신들을 불쌍한 존재나 문젯거리로 생각하며, 시혜와 처리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 같았다." - 본문 중에서
국가가 얼마나 느리고 섬세하지 못한지, 소수자에 얼마나 무관심한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목이었다.
소설 속에서 그들의 고향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유니콘 같았다. 정치적 결정과 국경선이 사람들을 갈라놓는 현실을 다루며 이 소설은 결국 '고향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단옥과 그의 가족, 그리고 유키에처럼 사할린 땅에서의 시간이 삶의 대부분인 사람들에게 더 이상 고향은 특정 국가의 땅이 아니었다. 함께 살아온 사람, 함께 일군 시간, 그 속의 공동체가 곧 고향이었다. 고향을 향해 끝없이 '돌아가는' 대신, 닥치는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내는' 디아스포라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천아동문학상, 윤석중문학상, 방정환문학상을 수상하며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한 이금이 작가는,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2016), <알로하, 나의 엄마들>(2020)에 이어 이번 작품으로 '일제강점기 한인 여성 디아스포라 3부작'을 완성했다. 줄거리와 인물은 다르지만, 세 작품 모두 역사의 변방에서 살아낸 여성들의 목소리와 감정을 중심에 놓는다는 점에서 한 흐름을 이룬다.
<슬픔의 틈새>는 단옥과 유키에,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 겪어낸 80여 년의 시간을 세밀하게 엮으며, 사할린 한인사의 큰 줄기를 개인의 일기장을 읽어주듯 들려준다. 역사책이 전하지 못한 삶과 그들의 목소리, 그리고 그 고통을 견디게 한 연대와 애정을 기록한 이 책은, 더 나아가 우리가 앞으로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할지에 대한 방향까지 품고 있다.
전 세계 약 7백만 명에 이르는 재외동포는 그 자체로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살아왔고, 디아스포라 공동체로 나아가고 있다. 이금이가 그려낸 과거는 우리가 사는 현재를 비추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