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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태 열사의 자화상 김종태 열사의 자화상
김종태 열사의 자화상김종태 열사의 자화상 ⓒ 김종태의집

김종태 열사는 1958년 6월 7일 부산 초량동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 서울 성북구 미아리로 이사하였으나 얼마 후 서울시의 도시미관정리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시)로 옮겨갔다. 철물점을 하던 아버지가 일찍 숨지고 그는 여섯 살 때부터 성남의 목걸이공장에 다니며 심부름을 하는 등 생활전선에 나섰다.

김종태 열사는 배움의 열망으로 1974년 제일실업(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주경야독으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글재주가 남달랐다. '사도신경'을 변형하여 '라면신경'을 써서 동료들의 호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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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하사 배고픈 자를 배부르게 하여 주시는 라면님이여
라면님을 내가 믿사오며 그의 자매품 소고기 라면을
믿사오니 이는 공장에서 생산되어 상인들의 손을 거쳐
식순이의 손에 들어가 고난을 당하사 끓는 물에 죽으시고
끓으신지 3분 만에 상에 오르사 유능하신 젓가락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써 배고픈 자를 배부르게 하심이라
입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위 속에서 소화되는 것과
항문을 통해 나와 거룩하게 되는 것을 영원히 믿사옵나이다.

김종태 열사는 1975년 고입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했으나 진학을 포기했다. 자신의 영달보다 그동안 자신이 겪고 지켜본 하층 노동자들의 열악한 실태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이듬해 서울 신당동 소재 현대특수철이라는 가내공장에 취업했다.

이후 김용기 장로가 운영하는 가나안농군학교를 나와 버스회사 계수원, 금마실업의 봉제 완구공장 등을 거쳐 지인의 소개로 인천산업선교회와 관계를 맺게 되면서 근로기준법과 노동문제를 깊이 공부하기에 이르렀다. 힘없는 노동자들이 착취당하고 산업 청소년들의 비인간적 처우에 분개하면서 이들과의 연대를 준비했다.

현역의 면제 대상이어서 방위병으로 근무하며 어릴 적 미아리 초등학교에 다닐 때 사귀었던 친구와 후배들을 모아 사학을 열고 독서회를 조직, 노동운동에 나섰다. 그러던 중 전기검침원으로 가장한 형사들이 사무실을 급습하여 회의록과 회원 주소록 등을 압수하고 김종태 열사를 주모자로 몰아 붙잡아 안양 군기교육대에 구류하여 극심한 고문을 했다.

유신 말기 박정희 정권의 타락상이 말단 경찰의 불법상태로 나타났다. 구속영장 없이 노동자들을 끌어가고 자택과 사무실을 압수수색했으며 고문을 하였다. 10.26사태에 이어 5.17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의 5공은 더욱 악랄했다. 그리고 광주학살을 자행했다. 이같은 사태에 그는 침묵하지 않았다. 광주의 참상을 직접 쓰거나 프린트하여 공중박스와 대형서점에 놓아두었다.

김종태 열사는 이같은 소극적인 방식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마침내 자신을 던지기로 결심했다. 유서를 쓰고 전단을 준비하였다. 제대를 며칠 앞둔 방위병 신분이었다.

김종태 열사의 분신 추정 장소 김종태 열사의 분신 추정 장소
김종태 열사의 분신 추정 장소김종태 열사의 분신 추정 장소 ⓒ 자료사진



1980년 6월 9일 오후 6시경, 신촌 로타리에서 행인들에게 직접 만든 광주학살을 규탄하고 민주인사들의 석방을 주장하는 전단을 나눠주었다. 얼마 후 사람들이 모여들자 형사들이 쫓아왔다. 김 열사는 한꺼번에 전단을 살포하고 준비한 석유를 자신의 몸에 뿌리고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인 김 열사는 "유신잔당 물러가라!", "광주학살 중단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고 외치다 그대로 쓰러졌다.

경찰에 의해 트럭에 실려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옮겼으나 치료를 거부하였다.

김종태 열사는 6월14일 새벽 응급실에서 스물 두 살의 짧은 생애를 접었다.

김종태 열사는 신념을 밝히는 <성명서>와 평소 자신이 따르던 전도사에게 별도의 <유서>를 남겼다.

성명서

10.26사태 이후 우리 국민은 19년 간의 일당독재를 청산하고 민주화를 꽃피울 것을 꿈꾸며 말없이 정국을 지켜보았으나, 일당독재의 연장을 꿈꾸며 정권을 탈취하려는 유신체제의 잔당들의 음모와 계략으로 국민들의 기대는 무산되었으며 작금 소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의 구성 등 군사정권이 그 마각을 드러내고야 말았을 때, 모든 국민과 더불어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하는 바이며, 광주 사태의 책임전가와 왜곡보도는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임을 재확인한다. 우리는 어떠한 형태의 독재도 부정하며 목숨을 바쳐 항거할 것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그러므로 유신체제를 존속시키려는 구체제의 잔존세력들의 어떠한 책동도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경고한다.

1. 유신잔당들은 전원 퇴진하라!
1.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고, 군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라!
1. 김대중씨를 포함한 민주인사와 학생들을 전원 석방하라!

1980년 6월 7일
성남에서 김 종 태

유서

이 전도사님!
며칠을 두고 고민했습니다.
전단을 제작해서 살포도 해보았습니다.
술을 마시고 목이 터져라 고함을 쳐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앞에 가로막힌 벽은 꿈쩍도 안했습니다.
꽉 막힌 가슴은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질식해 버릴 것 같은 이 체제에 의분을 느껴 자제의 힘을 잃었습니다.
이 세계의 환멸을 느낄대로 느꼈습니다.
이상이 제 심경입니다.
제가 무슨 말을 드려도 전도사님은 못난 놈이라고 나무라시겠지요.
무의미한 죽음이라고 비판하시겠지요.
하지만 저는 저의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계산된 죽음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의분을 느껴 몸을 던지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나의 가슴, 지금 고동치고 있습니다.
무례한 제자, 용서를 빕니다.

80년 6월 7일
종태 올림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민주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민족민주열사열전#김삼웅인물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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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민주열사 열전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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