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한국자생식물원은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깊은 산속에 자리하고 있다. 동해시 망상 해수욕장에서 가족캠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지난 8일, 여행을 조금 더 의미 있게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에 들른 곳이었다.
이곳은 원래 사유지를 조성해서 사립으로 운영되다가, 설립자인 김창렬 원장이 산림청에 기증해 2021년부터 국립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대중을 위해 '내어줌'의 철학이 깃든 곳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와닿아,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로 정했다. 직접 와 보니 입구에서부터 '진심'이 느껴졌다.
친절한 직원의 안내로 다자녀 혜택을 받아 무료로 입장했다. 뜨거운 햇빛과 갑작스러운 비를 대비하라는 의미에서 입구에는 예쁜 무지개 우양산이 비치되어 있었다. 청결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방문자 센터부터 기분 좋게 관람을 시작했다. 구역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어 처음 와도 순서대로 둘러보기 좋았다.

▲털부처꽃국립한국자생식물원의 털부처꽃 ⓒ 김은유

▲삼쥐손이국립한국자생식물원의 삼쥐손이 ⓒ 김은유
식물원 안으로 들어서니 짧은 반바지를 입고 온 것이 후회되었다. 깊은 산속이라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벌레들이 다리에 달라붙었는지 따끔거렸다. 해충이 눈앞에 보이는 상황은 아니어서 다행이었지만, 산속을 찾을 땐 긴 옷이 안전하다.
역시 강원도 산골답게 식물원은 희귀하고 다양한 식물들로 가득했다. 이름도 재미있고, 생김새도 신기했다. 종류가 너무 많아 하나하나 세심하게 볼 수 없었다. 어떤 식물들은 너무 닮아 차이를 구별하기 어려웠다. 식물마다 고유한 특성과 이름이 있을 텐데, 나는 '도대체 뭐가 다른 거지?' 하며 그냥 지나쳤다. 모양조차 잘 구분 못 하는 걸 보니, 새삼 내가 식물에 무지하다는 걸 느꼈다.
아이들은 식물보다 움직이는 생물에 더 관심을 보였다. 희귀한 식물과 자연을 보며 연신 "와, 와!"를 외치더니, 나비를 보고는 "제비다!" 하고 소리쳤다. 메뚜기, 방아깨비, 사마귀를 쫓아다니며 즐거워했고, 잠시 후에는 책 속에서나 보던 생태계의 냉혹한 장면 앞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거미가 메뚜기를 칭칭 감싸는 순간이었다.

▲꿀풀국립한국자생식물원 ⓒ 김은유

▲먹이가 거미줄에 감긴 모습메뚜기가 거미줄에 꼼짝 없이 감겨있다 ⓒ 김은유
한참을 자연 속에서 보내고 마지막 코스인 '숲속 책장'으로 향했다. 예상치 못한 근사한 공간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공원의 책 쉼터와는 달랐다. 1층에는 어린이 서적이 방대한 규모로 가득해 마치 도서관 같았다.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받은 자극으로 왕성해진 호기심을 이제 책으로 마음껏 채웠다. 부모로서 이보다 더 보람찬 순간이 있을까.
자연과 책이 아이들을 지혜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온전히 느끼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2층에는 어른을 위한 '조정래 서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의 대표 소설가 조정래 작가의 서가를 만난 건 정말 뜻밖의 행운이었다.
서가에는 인간의 세상사를 다룬 온갖 책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국 근현대사를 그려낸 거대한 세계관처럼, 분야도 다채로웠다. 책 제목만 훑어보는데도 내 견문이 한 뼘 넓어지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의 방향이 한층 또렷해졌다.

▲조정래 서가조정래 작가는 2020년에 소장도서를 식물원에 기증하였고, 후에 사립에서 국립으로 전환되면서 국립한국자생식물원은 '조정래 서가'를 새롭게 단장했다 ⓒ 김은유

▲국어대사전을 보는 아이아이가 국어대사전을 신기해 하며 보고 있다. ⓒ 김은유
책에 대한 갈증이 내 안에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삶에 대한 열정이 뜨거워졌다. '좋은 책을 많이 읽고, 지혜롭고 사랑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조정래 서가를 나서며 그렇게 순수한 다짐을 했다.
그날, 국립한국자생식물원은 우리 가족 여행의 마지막을 보석처럼 장식해 주었다. 깊고 고요한 산속의 이 식물원이 안겨준 선물을 더 많은 사람이 알아주었으면 한다. 인생이 희미하게 느껴질 때, 삶의 방향이 모호해서 시야가 좁고 답답할 때 이곳을 찾는다면, 생생한 자연과 거대한 책장이 찾는 이로 하여금 삶의 지혜를 얻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