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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이야기하면 그래도 들어주는 세상이라고 아직 믿고 있다. 사람들은 내게 순진하다고들 하지만, 순진한 사람들이 잘 사는 사회야말로 정의로운 사회가 아닐까? 법은 기득권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겉으로는 약자를 위한다고 표방하는 것이 또한 법이기에 부조리한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법으로써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마주한 세상의 모습을 이곳에 전한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등교하고 있는 모습 (기사 내용과 관련 없습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등교하고 있는 모습 (기사 내용과 관련 없습니다) ⓒ 연합뉴스

언젠가부터 "학폭"(학교폭력)이라는 단어가 자주 들리기 시작했다. 연예인들의 과거 학창시절 학폭 논란이 꾸준히 나오고, 몇 해 전 학교폭력을 다룬 드라마 <더 글로리>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제 '학교폭력은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공고히 형성되었다.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아래 학폭위) 위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할 무렵에는 이처럼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다뤄지는 학교폭력 사안 처리에 법률 전문가로서 관여하고, 학교 현장의 아이들의 모습도 볼 수 있는 귀한 기회라고 생각하며 임했다. 이런 마음가짐은 변함없지만, 활동한 지 3년이 조금 넘은 지금은 학폭위라는 제도에 상당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손쉽게 학교폭력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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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이라는 이름 하에 상대방의 의사와 무관하게 행해지는 여러 행위들에 경각심을 갖게 하여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주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 현장에서 접수되는 학교폭력의 모습을 보면, '몸에 고데기를 갖다 대 지지는 연진이'(<더 글로리>의 내용) 같은 심각한 수준의 폭력 사안은 그렇게 많지 않다. 실제로는 욕설, 놀림, 장난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경미한 물리력 행사 정도의 행위들 즉, 충분히 대화나 교육으로 해결될 수 있을 법한 수준의 일들이 많다.

학교폭력예방법은 학교폭력을 "학교 내외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발생한 상해, 폭행, 감금, 협박, 약취·유인, 명예훼손·모욕, 공갈, 강요·강제적인 심부름 및 성폭력, 따돌림, 사이버폭력 등에 의하여 신체·정신 또는 재산상의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내용만 보면 매우 심각한 것들로 이해되나, 예컨대 아이들끼리 장난치다가 밀치는 행위가 있었다면 "폭행"이, 놀리는 등의 말을 했다면 "모욕"이 될 수 있고, 무엇보다 "...등에 의하여 신체·정신 또는 재산상의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어 피해 학생이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고 하면 어렵지 않게 학교폭력으로 구성할 수 있는 구조다.

솔직히 말하면, 학교 안에서 충분히 잘 해결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왜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을까(왜 학교폭력 신고까지 하게 됐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사안들도 다수였다. 심의를 하다보면, 서로 오해가 쌓여 있어서, 충분히 대화를 통해 오해를 풀고 화해할 수 있어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미 학교에서 별문제 없이 화해하여 잘 지내고 있는데 학폭위 절차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 상황도 있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갈등 해결 방법 배울 기회를 잃어버린 아이들

 2024년 2월 19일 오전 서울 중구 성동공업고등학교에서 열린 학교폭력 전담 조사관 역량강화 연수 개회식에서 한 조사관이 안내 책자를 읽고 있는 모습.
2024년 2월 19일 오전 서울 중구 성동공업고등학교에서 열린 학교폭력 전담 조사관 역량강화 연수 개회식에서 한 조사관이 안내 책자를 읽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서로 다른 욕구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갈등은 필연적이고, 우리는 이러한 인간관계 속에서 마음을 다치기도 한다. 이는 인간 사회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이를 경험하며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것 또한 아이의 성장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그리고 학교는 이러한 성장을 가능케 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의 학폭위 제도는 이러한 아이들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학교폭력 신고가 이루어지는 경우 당사자들이 대화할 기회가 너무나 쉽게 차단된다. 사안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피해/가해 학생 간 분리 조치가 손쉽게 이루어지다 보니, 가해학생은 사과를 하고 싶어도 피해 학생에게 다가갈 수 없다. 부모들끼리도 마찬가지다. 가해학생의 보호자측에서 사과의 의사를 전하고자 해도 대체로 이 역시 잘되지 않는다.

학교는 괜히 관여했다가 양쪽에서 민원을 제기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갈등 해결에 나서지 않는 경우가 많고, 오히려 교육지원청의 학폭위로 넘겨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당사자 간 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하다 보니 오해가 해소되거나 마음이 풀리기는커녕 피해학생 측은 가해학생에 대해 엄한 처분을 바라고, 가해학생측은 자신들의 사과 의사를 학교에서 전달을 안 해줘 답답하다고 호소한다.

그러다가 가해학생의 부모는 우리 아이도 피해를 입었다며 맞신고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이제 양측은 과거 해묵은 일까지 다 꺼내 신고를 하게 된다(심의 과정에서 물어보면, 이미 예전에 다 서로 사과하고 넘어간 일이다). 학폭위 제도가 갈등을 해결하기는커녕 갈등을 더 키우고 있는 것이다.

학폭위 심의라는 엄숙한 절차를 통해 아이들이 무엇을 배울지도 매우 걱정스럽다. 심의는 큰 회의실에서 5~7명의 어른 위원들이 엄숙하게 둘러앉아 10대에 불과한 아동·청소년 학생을 앉혀 두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조사를 한다. 이 절차는 대화와 소통의 장이 아닌, 사실관계를 밝히고 가해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준사법절차다. 아이들을 앉혀놓고 어른들이 취조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이다.

고등학생은 그나마 낫다. 초등학생 사안인 경우 정말이지 심의하기가 괴로울 지경이다. 이 작은 아이를 상대로, 이랬니 저랬니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아이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당시 우리 위원들은 초등학생의 경우에는 학폭위 대상에서 제외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경험하는 아이는 이후 삶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 대화, 소통보다 신고, 고소 등 (준)사법절차로 곧장 달려가게 되는 것은 아닐지 걱정스럽다. 반대로 가해학생으로 지목당한 학생이라면 사람에 대한 불신과 냉소를 배우게 되지는 않을까 우려된다.

학교폭력예방법을 폐지하라는 요구

 2025 학교와 폭력 연속 포럼 1차 - 학교폭력예방법을 폐지하라 웹자보
2025 학교와 폭력 연속 포럼 1차 - 학교폭력예방법을 폐지하라 웹자보 ⓒ 교육공동체벗

교육 현장에서는 이런 문제점들 때문에 학교폭력예방법을 폐지하라는 요구도 높다. 지난 2월 "교육공동체 벗"의 주최로 열린 포럼 <2025 학교와 폭력 연속 포럼 1차 - 학교폭력예방법을 폐지하라>에서는 학교폭력예방법의 폐해를 지적했다. 요지는 현행 학교폭력예방법은 사소한 다툼도 징계와 분쟁으로 이어지게 만들고, 교사의 교육적 개입의 여지는 사라졌으며, 학생들은 범죄자 취급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위 포럼에서 서울 중등 교사인 김성보는 "교육의 관점에서 볼 때 학교에서 학생 간 갈등과 충돌이 발생했다면, 학생들이 비약적으로 발달을 이룰 수 있는 교육 기회의 장이 열린 것"인데, "지금 학교에서는 갈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학생들을 분리하고 차단"하고, "갈등이 발생하면 관련 학생을 공동체에서 분리시켜 법적 기구에서 처리"함으로써 "학생들은 안전하게 다투면서 발달할 기회를 박탈"당한다고 말했다.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의 이윤경은 "학생에게는 교화가 아니라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범죄는 형법으로 다스리고 갈등 조정은 학교가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폭위 심의에서 항상 강조되는 사항 또한 이 절차의 목적은 가해학생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선도라는 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 심의는 가해학생에 대해 어떤 조치(서면사과, 접촉 및 보복 금지 교내봉사, 사회봉사, 특별교육 또는 심리치료, 출석정지, 학급교체, 전학, 퇴학)를 취할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아이들에게 관계 속에서 성장할 기회 주어야

나는 아동 전문가도, 교육 전문가도 아니지만, 학폭위 위원으로 활동하며 현재의 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분명히 알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성장할 기회를 주어야 하는데, 지금의 제도는 그 기회를 빼앗고 스스로를 가해자 또는 피해자로 규정하게끔만 만든다. 이 절차는 가해학생뿐 아니라 피해학생에게도 상처를 남긴다(친구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을 "학교 폭력" 상황으로 규정하고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드는 것이 과연 그 아이에게 좋을까?).

얼마 전 있었던 심의에서 어느 가해학생 측 보호자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점을 가르치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며 스스로 많이 반성하고 있으며 아이와 더 대화하면서 잘 교육하겠다며 정말이지 이렇게 모범적인 부모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훌륭한 발언을 했는데, 뒤이어 이렇게 물었다.

"학교에서는 저희 애한테 상대 아이에게 말 걸거나 다가가지 말라고 이야기하는데, 상대 아이가 저희 애에게 와서 인사하고 말도 건다고 해요. 그래서 저희 애가 저한테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는데, 제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상대 아이가 다가오는 것을 보면 마음이 어느 정도 풀린 것 같은데, 학교에서는 접촉하지 말라고 해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심의위원들 누구도 제대로 답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제도가 이를 막고 있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서울동작관악교육지원청의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 위원입니다.


#학교폭력#학교폭력예방법#교육#청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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