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말 한줄이 한 사람의 삶을 바꾼다'
'말 한줄이 한 사람의 삶을 바꾼다' ⓒ aaronburden on Unsplash

'말 한 줄이 한 사람의 삶을 바꾼다.'

그 말을 나는 믿는다. 오랜 세월 편집자로 살아오며 그 믿음을 품어왔다. 당신은 어떠한가? 다수의 편집자는 창작자와 독자 사이,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문장을 다듬고 의미를 새기는 고독한 존재다. 작가의 심장에서 막 튀어나온 문장을 가장 먼저 읽고, 동시에 독자의 눈으로 가장 먼저 의심해야 하는 이 역할은 때때로 스스로를 '병'이라 여기게 만든다. 이 경계는 늘 위태롭고, 이 고독은 좀처럼 타인과 나눌 수 없다.

어느 날 새벽 3시, 문득 잠에서 깼다. 며칠째 머릿속을 맴돌던 문장이 꿈속까지 따라왔다. 이불을 걷어차고 컴퓨터 앞에 앉으며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AD
"병이다, 진짜 고질병."

편집자는 어쩌면 '편집자병'을 앓는 사람이다. 편집(編輯)과 편집(偏執)은 한자도 뜻도 다르지만, 묘하게 닮았다. 유능한 편집자는 조사 하나, 문장부호 하나에도 집착한다. 문장 속 미세한 어색함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이 세심함은 때로 비정상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성향이 편집자를 특별하게 만든다. 작은 실수가 작품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다는 불안이 우리를 밤늦게까지 붙잡는다. 과장일까? 병이라 말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우리만의 책임감이며, 세상에 남을 문장을 향한 애정이다.

문장이 사람을 살리는 순간

一言可生人 무심한 말 한 줄에 주저앉고, 정성 어린 말 한 줄에 다시 일어선다. 말의 무게를 아는 이만이 살리는 말을 할 수 있다.
一言可生人무심한 말 한 줄에 주저앉고, 정성 어린 말 한 줄에 다시 일어선다. 말의 무게를 아는 이만이 살리는 말을 할 수 있다. ⓒ 이명수

의욕만 넘치던 젊은 시절, 나는 밥 먹고 잠자는 시간만 빼고는 오로지 글쓰기와 편집만 생각하며 살았다. 원고 속에 파묻혀 책을 만들다 보니 어느새 40년이 흘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며 평생을 보내는 사람도 많다. 그에 비하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에 빠져 지내다 백발이 되었으니, 참 행복한 사람이다. 나는 책을 편집하고 글을 쓰는 삶을 천직으로 여겼고, 그 삶에 끝내 보람을 느낀다.

나는 문장의 구조만 보지 않는다. 그 안에 담긴 진심, 아직 말로 다 표현되지 않은 감정의 흐름을 읽는다. 이것이 내 편집의 직감이자, 오랜 신념이다. 기억에 남는 신인 작가가 있다. 그의 첫 원고는 투박했고 미완성이었지만, 생생한 감정의 결이 살아 있었다. 원고의 절반 이상을 손 봤지만, 단 하나의 문장만큼은 그대로 두었다.

"비 오는 날, 당신을 기다리는 내 마음은 우산보다 먼저 젖는다.

그 문장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었다. 기다림의 간절함과 서툰 진심이 리듬 속에 녹아 있었다. 나는 그 문장 옆에 메모를 남겼다.

"이 문장은 작가님 자신입니다. 이 문장에 목소리가 있습니다."

단순한 격려가 아니었다. 말 한 줄이 사람을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의 실천이었다. 그날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총명기(聰明記)'라는 이름의 수첩에 '일언가생인(一言可生人)'이라고 힘껏 썼다. 말 한 줄이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뜻이다.

몇 년 뒤, 그가 술을 사면서 말했다. 그 메모가 자신을 다시 일으켰고, 다음 책을 쓸 용기를 주었다고. 그 순간 깨달았다. 글을 완성하는 건 문법만이 아니라, 누군가를 믿게 하는 말의 힘이다.

말은 약처럼 써야 한다

편집자의 말은 약이자 방향이다. 단 한 줄로 작가의 중심을 세울 수 있지만, 그 말은 정밀해야 한다. 칭찬은 강한 약이다. 진심 없는 칭찬은 작가를 혼란스럽게 한다. 한 작가에게 "다 좋아요"라고 무심코 말했다가, 그는 다음 원고에서 길을 잃었다. 그 뒤로 배웠다. 칭찬은 구체적일수록 진실하다.

"이 문장에서 작가님의 슬픔이 느껴집니다."

이 한 줄이 문장을 살리고, 사람을 일으킨다. 서머싯 몸은 <인간의 굴레>에서 말했다.

"사람들은 따끔한 비평을 바란다고 하지만, 정작 기대하는 건 칭찬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괜찮은 사람임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확인이 진실이 되려면, 편집자는 말의 무게를 신중히 재야 한다. "이 문장은 약해요" 대신, "여기에 당신의 목소리를 더 담아보면 어떨까요?"라고 말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이 내 오랜 경험칙이다. 결국 사람을 바꾸는 건, 바로 그 한마디다.

나는 지금도 작가들과 그 고민을 나눈다. 어떤 말이 글을 더 빛나게 할까. 어떤 문장이 사람을 일으킬까. 신언여약(愼言如藥). 말은 약처럼 써야 한다는 믿음으로, 나는 오늘도 한 문장씩 정성껏 건넨다. 이 글을 말을 다루는 모든 이에게 바친다. 편집자든, 작가든, 교사든, 부모든, 혹은 독자든. 우리는 모두 말의 무게를 짊어진 존재들이다. 당신은 지금, 어떤 말로 누군가를 일으키고 있는가?

愼言如藥 말은 약처럼 써야 한다 말은 사람을 살릴 수도, 해칠 수도 있다. 말의 약효는 그 무게를 아는 데서 나온다.
愼言如藥 말은 약처럼 써야 한다말은 사람을 살릴 수도, 해칠 수도 있다. 말의 약효는 그 무게를 아는 데서 나온다. ⓒ 이명수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말의힘#편집자의시선#신언여약
댓글3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월간 『문학 21』 3,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어둠 속으로 흐르는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작가로도 데뷔하였다. 40년이 넘도록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철학하는 바보』『깨달음을 얻은 바보』『동방우화』『불교우화』『한국인과 에로스』『중국인과 에로스』 등의 저서가 있음.




독자의견3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