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판그림. 선생님들은 모두가 예술가 ⓒ 고양자유학교
오스트리아 출신 진보 철학자로서 '탈학교'를 제안한 이반 일리치는 저서 <학교 없는 사회>에서 가르침이란 공부의 환경을 잘 마련해서 배움을 용이하게 해주는 일이라 정의했다. 배움은 배우는 자에 의해 일어나는 능동적인 행위이고, 무언가에 대한 통찰과 깨달음이 일어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르치는 자는 그 깨달음이 곳곳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배움의 바탕 환경을 잘 만들어 이끌어주면 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배움의 환경을 잘 만들어 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입학하기 전부터 기초학습이 요구되고,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도 학습을 잘 따라가기 위해 선행 사교육이 필수가 되어버린 사회. 학교는 더이상 배움의 장이 아닌, 대학으로 가는 자격과 등급을 측정하는 평가소로 바뀐 지 오래인 듯하다.
아이를 학습으로만 평가하는 환경 속으로 밀어 넣고 싶지 않았다.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갖는 우월감, 못 한다는 이유로 갖는 열등감이 자연스럽게 내면화되는 곳이 아니라, 누구나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로 성장할 수 있는 곳, '왜 배우는가?', '무엇을 더 배워야 하는가?'를 아이가 스스로 생각해 가며 배움을 확장시킬 수 있는 환경을 만나고 싶었다.
[초등과정] 스스로 생각하며 배움을 확장시킬 수 있는 곳

▲즐거운 싹터 가족운동회. 모두가 행복한 학교 ⓒ 고양자유학교
고양자유학교는 초등과정에서 고등과정까지의 12년제 대안학교이다. 한 학년에 한 학급, 학급당 10명 남짓의 소규모로 이루어진 이곳에서 우리는 함께 성장해 간다. 아이를 중심으로 만나 한 가족이 된 우리는 수시로 마주하고, 부딪히고, 끌어안고, 보듬으면서 수년을 함께 보내며 진짜 가족이 된다.
입학식 날 윗학년 아빠들의 유쾌한 축하공연 선물을 받으며, 졸업식 날에는 감동적인 부모 졸업공연 선물을 남기고 떠난다. 입학부터 졸업까지. 12년의 이야기는 아이뿐 아니라 부모도 함께 경험하는, 어떤 말과 글로도 펼쳐내기 힘든 찐! 인생 드라마다.
아이와 더불어 가족이 함께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다. 아이의 배움의 환경은 가족에서 '우리 학교'로 확장된다. 싹터(초등과정) 기간 동안 아이들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유년기를 보낸다. 현재 10학년인 큰 아이와 4학년인 둘째 아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고양자유학교 싹터(초등과정)는 '아이들의 천국'이라고 말한다.
수시로 이어지는 친구네 마실, 방과 후에도 학교에 남아 놀 수 있는 '학놀자', 친구들과 밥을 해 먹고 자기도 하며 장기자랑과 마니또도 즐기는 학교살이. 부모들의 학년모임과 두레모임에 따라다니며 언니·오빠·친구들과 수시로 만나 신나게 노니 매일이 즐거운 이벤트의 연속이다. 이러니 놀이가 전부인 아이들이 안 행복할 수가 있을까.
물론 마냥 놀기만 하는 건 아니다. 싹터에서는 몸과 이야기로 배우는 말과 글, 생활에서 구체물로 배우는 수와 셈, 나-가족-친구-사회로 확장하며 사회를 배우는 사회, 자연과 농사, 요리를 통해 이어지는 과학, 싹터의 큰 과업인 밥살림(농사), 집살림(목공), 옷살림(수공예) 등 즐거운 배움을 이어간다.
부모들은 매달 교사와 함께하는 학년모임을 통해 아이의 생활을 공유하고, 발달 공부도 함께 한다. 3학년이 되면 책방(도서관)관리를 맡아 하고, 5학년이 되면 가족운동회를 진행한다. 아이가 자라는 만큼 어른들은 서로 가까워지고 학교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중등과정] 질풍노동의 시기, 아이들이 빛나는 순간들

▲고양자유학교의 익숙한 밤풍경. 밤에도 사랑스러운 학교 ⓒ 고양자유학교
보통 초등과정에서 중등과정으로의 진급은 부모의 의지와 아이의 동의로 이어진다. 중등 청소년기 아이들의 대부분이 그렇듯, 고양자유학교 꿈터(중등과정) 청소년들도 이 시기에는 무채색의 옷을 입고 다니고, 표정이 어둡고, 많은 것을 귀찮아 한다. 그럼에도 이 아이들이 빛나는 순간들이 많이 있는데, 2주 동안의 제주도 긴 들살이, 아이들이 주도하는 자유위크 프로젝트 기간, 꿈터 연극제, 9학년 프로젝트 발표회다.
긴 여행으로 단단해지는 아이들, 몰입과 고민의 즐거움을 깨달아가는 아이들, 온전히 자신을 믿고 9년간의 생활을 정리해 보여주는 절정의 프로젝트발표 순간. 이 시기를 함께 거쳐오며 가족들은 수많은 한숨과 진땀, 가슴 쓸어내림을 경험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면 날개를 펴기 전 자신을 꽁꽁묶어 가두었던 고치의 시간들, 진한 성장통의 시간들을 잘 보내왔구나 깨닫게 된다.
꿈터 시기의 아이들은 질풍노도를 겪으며 또래가 전부가 되기도, 혹은 또래가 웬수가 되기도 한다. 또래관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잡음들을 정리하기 위해 교사와 부모들이 분주해질 때도 있는데, 이때 우리는 '한 팀'의 경지를 경험하기도 한다. 교사는 무엇이 잘못됐을까 상황을 돌아보며, 부모는 그런 교사를 위로한다. 그리고 또 다른 부모를 위로한다. 아이들의 관계를 통해 어른들은 성숙해지고, 아이들은 그런 어른들을 보고 뉘우친다. 물론 모든 경우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고, 흉터로 남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는 지혜를 모으는 과정에 에너지를 사용한다.
[고등과정] 더 깊어지는 아이들

▲벨기에 IDEC 개막식에서. 풍물과 리코더 합주하는 숲터 아이들. ⓒ 고양자유학교
중등과정에서 고등과정으로의 진급은 오직 아이의 선택에 따라 결정된다. 아이에게 선택을 맡길 수 있는 것 또한 9년간 이곳에서 자유의지를 키워가며 잘 자라준 아이들을 믿는 부모의 믿음이기도 하다. 우리 집 첫째 아이는 숲터(고등과정)와 일반학교 사이에서 진학 고민을 1년 동안 진지하게 이어갔다. 대학진학과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기대도 컸지만 고양자유학교만의 깊은 배움의 힘을 믿고 숲터를 선택해 지금은 대만족하며 잘 다니고 있다.
숲터 아이들은 올해 여름, 벨기에에서 열리는 IDEC(국제민주교육회의)에 참여한다. 비용마련을 위해 직접 농사지은 감자를 팔고, 플리마켓에 나가고, 영어공부도 열심히 했다. <파우스트>를 함께 읽고서 독일의 괴테 생가에 방문하고 돌아오는 추가 여행 계획도 세웠다.
숲터에서는 진로찾기의 시작인 길찾기 수업, 학교 밖으로 나가 진로를 탐색해보는 아웃턴십과 발표회를 진행한다. 또, 온전히 스스로 계획하고 떠나는 여행인 들살이를 경험한다. 매달 부모와 '비정상회담'을 통해 그동안 대화 속에 담지 못했던 깊이 있는 이야기가 오가는 시간도 갖는다.
숲터의 아이들은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결정하며 결과를 만들어간다. 해마다 자라지만 특히 더 깊어진 아이들을 보며 '지난 수년의 시간이 지금을 위해 존재했구나' 생각한다. 그리고 부모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를 점점 실감하며 아이들의 인생을 축복한다.
아이들은 12년의 학창시절을 마무리하며 자신들이 꾸미는 졸업식을 성대하게 치르고서는 입학할 때 걸어 들어온 그 꽃길을 신나게 뛰어 나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고양자유학교 가족들은 박수와 함성과 눈물과 기쁨이 뒤범벅 된 시간을 경험하며 12년의 진짜 한 편의 드라마를 함께 마무리 한다.
아이들을 키운 12년간의 미소와 시간들

▲12학년 부모들의 졸업공연. 이쯤 돼야 졸업 ⓒ 고양자유학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자주 인용된다. 이 말은 결코 쉬운 말이 아니다. 내 아이를 마을에 내어 맡길 수 있는 믿음, 또한 얼마나 나의 품을 내어 모두의 아이를 끌어안을 수 있는가 하는 용기와 책임을 생각하게 한다.
어느 날 아이는 '지지해주고 지켜봐주는 어른들이 있는 학교가 좋다'고 말했다. 얼마 전 12학년 아웃턴십 발표회가 있었는데, 야무지게 잘 자라준 이웃집 아이 또한 '할 수 있어. 잘 할거야. 그렇게 말해주는 어른들의 응원과 신뢰가 큰 힘이 됐다'라고 말해 감동을 줬다. 이 말들은 우리가 이 학교에서 무엇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가르침이 '공부의 환경을 잘 마련해서 배움을 용이하게 해주는 일'이라면, 고양자유학교의 교사들과 부모들은 우리의 아이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자로 성실히 살아가고 있으며, 고양자유학교는 아이들의 배움을 위한 멋진 공간임이 확실하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한 온 마을은 학원, 편의점, 식당을 말하는 게 아니다. 기꺼이 함께 하기를 마음 먹은 어른들이 보여주는 미소와 내어주는 시간들을 말하는 것이다. 12년 동안의 이 미소와 시간들을 먹고 자란 아이들은 또 다른 누군가의 12년을 단단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잘 성장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