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4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가 열리는 6월 15일 오후 서울시 종로구 열린송현녹지광장에 모인 참가자들이 영정사진을 들고 본행사가 열리는 서울시청앞까지 행진하고 있다. ⓒ 권우성
우리의 연약한 '민주주의 묘목'은 무명의 시민과 학생들에 의해 지켜지고 성장해왔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듯이, 이 땅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최근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과 그 추종자들로부터 민주주의와 헌정을 지켜낸 것도 이들의 공이 컸다. 헌법재판관 8인의 역사적인 판결이 결정타를 날렸지만, 따지고 보면 눈보라 속에서 시민들의 치열하고 처절한 저항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긴 세월 군주체제, 일제강점, 이승만의 백색독재와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군부독재로 이어지면서 우리 국민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권리를 박탈당하고 노예처럼 살아왔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국민주권주의 즉 천부인권이 헌법에 명시되었음에도 그것은 죽은 활자일 뿐이고, 실제는 군주정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반민주 세력의 압정은 4월혁명을 비롯 반유신투쟁·광주민주화운동·6월항쟁·촛불혁명을 통해서 민주헌정을 회복했는가 싶었는데, 앞선 독재자들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은 폭군 윤석열에 의해 또 다시 민주주의가 짓밟혔다.

▲3월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앞에서 열린 ‘100만 시민총집중의 날 - 윤석열 즉각퇴진! 사회대개혁! 15차 범시민대행진’에 참석한 야당과 윤석열퇴진비상행동 소속 단체 및 시민들이 깃발, 응원봉 등을 흔들며 헌법재판소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 권우성
이번에도 어김없이 시민들이 나섰다. 그리하여 횃불과 촛불에 이어 '빛의 혁명'을 일궈냈다. 내란세력이 여전히 준동하고 잔불이 꺼지지 않았지만, 새로운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더욱 다져진 국민의 의지와 각오로 지난 날과는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 이제 '민주주의 묘목'을 아름드리로 키우는 일이 남아 있다.
왕조시대와 일제강점기에 의열사와 민족지사들이 있었듯이, 해방 후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는 민족민주열사들이 있었다. 일반 학생·시민들에 앞서서 분신·투신·자결·음독·단식·농성·사법살인·암살·군의문사·실종·테러 등 방법과 방식은 다르지만 그때마다 열사들의 희생은 꺼져가는 민주와 정의의 심지에 불꽃이 되고, 산자들에 활력이 되어 혁명과 항쟁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목숨에 여벌이 있는 것이 아닌 데도 민족민주제단에 기꺼이 생명을 바쳤다.
해방 이후 항일독립 운동가들이 친일세력에 의해 '청산'되었듯이, 민주주의 전위들은 역대 독재정권과 이를 추종하는 사이비 민간정권에 의해 음해받고 소외되었다. 민족민주열사들은 하나같이 민주주의를 지키고 살린 불꽃임에도 취약한 추모사업·기념사업에 그치고, 그마져도 없는 열사들이 적지 않다.
우리 근현대사가 가파르고 격동적이어서 기리고 살펴야 할 인물·사건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틈새만 보이면 민주주의 나무에 도끼질을 하고 뿌리째 뽑고자 하는 윤석열 류의 변태, 혹은 반동세력이 만만치 않는 터에, 그리고 저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자들이 활보하는 마당에, 열사들의 높은 희생정신과 투혼이 제대로 평가받고 선양되어야 할 것이다.
해방공간에서 유력 지도자들이 테러에 쓰러졌다. 송진우·장덕수·여운형의 암살이 그렇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에서 독립운동의 상징과 같은 김구가 이승만의 측근들에게 암살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진보당을 해산하고 독립운동가 조봉암을 사법살인하였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4·19혁명으로 변곡점이 되었다. 이승만의 종신집권 욕망이 3·15부정선거를 저지르면서 마침내 청소년들과 대학생이 앞장서고 시민들이 가세하여 사상초유의 민주혁명을 이루었다. 4월19일 전국에서 경찰의 발포로 서울 104명, 부산 19명, 광주 8명 등 전국적으로 186명이 사망하고, 6260명이 부상당했다. 민족민주열사들이고 희생자다.
희생자는 하층 노동자 61명, 고등학생 36명, 무직자 33명, 대학생 22명, 초등학생과 중학생 19명, 회사원 10명, 기타 5명 등이었다. 희생자 규모나 분포로 보아 국민혁명의 성격을 보여주었다.
국립경찰의 발포로 이처럼 많은 사상자를 낸 것은 이승만의 폭정과 함께 경찰의 인적구성에 의한 성격이 짙다. 4월혁명기인 1960년 현재, 경찰의 인적구성은 일본 경찰 출신이 총경의 70%, 경감의 40%, 경위의 15%, 그리고 전국경찰관 약 3만3천 명 가운데 사복경찰의 약 20%와 정복경찰의 10%가 일경출신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이들의 뒷받침으로 지탱되었고, 4.19혁명이 자칫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길 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평화적 시위를 잔혹한 학살로 대응한 것이다. 마산 제2차 시위의 한 계기가 된 김주열 열사의 왼쪽 눈에 최루탄을 쏘아 죽이고 바다에 던진 자도 일경출신 경찰관 박종표였다.
서울 수유리 4·19묘역에는 현재 533명의 열사가 묻혀 있다. 헌법 전문에도 4월혁명 정신을 명시하고 있는데, 일각에서는 학살자들의 우두머리격인 이승만의 동상을 대구에 이어 광화문에 세우려는 망동을 하고 있다. 그의 동상은 4·19혁명 당시 시민들이 밧줄에 묶어 끌고 다니다 폐기처분되었다.

▲4.19혁명 기념일인 19일 오후 서울 강북구 4.19 민주묘지를 찾은 한 유족이 아버지 묘역에 절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4·19의 많은 희생자 중 이날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숨진 진영숙양이 남긴 유서의 일부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희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선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마는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셔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 (주석 1)
스페인 침략군을 온 몸으로 막다가 희생된 필리핀의 애국자 호세 리잘의 말을 새기면서 민족민주열사를 찾는 길에 나서고자 한다.
"나는 조국의 밝은 새벽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그러나 밝은 세상의 사람들은 밤사이 스러져간 사람들을 잊지 말라"
우리는 내란수괴 윤석열의 쿠데타를 겪으면서 거듭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하여 지난날 폭정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산화하신 민족민주 열사들을 기리고자 국가기념일로 '민족민주열사의 날'을 지정할 것을 제안한다. 아울러 지난해 5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이 윤석열에 의해 비토되었는데 민주정부에서 이를 회복하길 기대한다.
주석
1> 김정남 지음, 정호기 해설, <개정판 4·19혁명>, 130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5.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민주열사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