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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민주시민교육 연구와 활동을 10년 가까이 해오고 있으며 그 결과로 박사학위 취득도 앞두고 있다. 나의 시민교육활동의 출발점은 2014년 세월호 참사였다. 시민단체라고는 참여연대와 경실련 밖에 알지 못했던 내가 거리와 광장이라는 공론장에 처음 발을 내디딘 계기였기 때문이다.

2014년 4월 16일 이른 아침에 일어난 세월호 침몰과 그 이후 '참사'가 된 세월호 사건은 한국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준 것은 물론이지만, 필자 개인의 삶에도 상당히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인생 2모작으로 학원 자영업을 생각하고 있던 터라, 가끔 시청 앞과 광화문 집회에 나가 촛불을 드는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세월호 침몰은 단순한 사회적 참사가 아니라 점점 국가적 참사로 증폭되어가고 있었다. 사건 초기에는 희생자 추모와 유가족 위로에 모두 한마음이었지만, 유가족, 시민단체들, 자원봉사자, 종교계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박근혜 정부의 책임을 묻기 시작하자 여론도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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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보수 언론들이 정부 편을 들며 쏟아낸 기사는 유가족과 선량한 시민들에게 씻기 힘든 상처를 주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은 세월호 참사가 시시각각 정쟁화 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명박 정부 당시 용산참사와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태를 떠올렸다. 그것은 '폭력' 그 자체였다.

학원 준비를 접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주경야독 하면서 나는 제주 4.3을 비롯한 국가폭력의 역사를 접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전까지는 '국가폭력'이란 용어도 낯설었다.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폭력 진상규명과 희생자 배보상을 위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라는 기구를 설립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았으니 정말 늦어도 한참 늦었다.

 실미도 부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해변가
실미도 부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해변가 ⓒ 좋은세상연구소

엄마의 한국전쟁 기억

엄마를 모시고 사는 나는 6월마다 한국전쟁 관련 방송을 함께 보곤 한다. 그때마다 팔순이 훌쩍 넘은 엄마가 열 살 남짓에 겪었던 '6.25 사변' 이야기를 하시는데, 대개는 늘어진 테이프에서 나오는 음악처럼 흘려 들었다. 친구들과 쑥 캐러 갔다가 풀섶에서 사람 다리가 있는 것을 보고 소리 지르며 도망쳤다는 얘기부터 앳된 북한 인민군이 엄마와 동네 친구들에게 인민군가를 가르쳐줬다는 얘기, 외할머니가 경찰인 큰 사위를 큰 항아리에 숨겨줬다는 얘기를 해마다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불쑥 갑자기 꺼낸 엄마의 '기억'은 너무도 놀라웠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어느 여름날, 11살 엄마와 외할머니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영암읍 경찰서 창고 앞으로 불려 나갔다고 한다. 어린이였던 엄마의 기억 속엔 누군가 총을 휘두르며 위협하니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창고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고 안에 거의 다 들어가던 순간, 밖으로 도로 나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엄마는 뭔가 급박하게 상황의 변경이 있었다고 생각했고 이후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엄마와 할머니는 그 길로 정신없이 뛰어서 집으로 돌아왔단다. 며칠 뒤에 산 너머 마을에선 수십 명이 창고에 갇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영암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으로 2008. 12. 30.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규명 되었다.

 영암읍
영암읍 ⓒ 네이버지도

더 놀라운 것은 나로서는 거의 엄마뻘인 외사촌 언니네 일이었다. 그해 8월에 영암은 해병대 위주의 인민군이 점령하였다. 외사촌 언니의 아버지, 그러니까 큰이모부가 당시 젊은 경찰 주임이었고 큰이모는 당시 셋째를 임신하고 있었다. 빨치산과 인민군이 번갈아가며 경찰인 큰이모부를 찾으러 다녔는데, 여기까지는 엄마가 반복해 말한 것과 같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최씨 성을 가진 큰이모부 가족과 친인척들 중 상당수가 몰살당했다는 것이다.

엄마가 불쑥 던진 말에 놀란 나는 외사촌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언니 가족 전부가 나주로, 영산포로 도망다녔다는 얘기를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 '영암 민간인학살'로 검색한 결과, 2009년 진실규명 결정 기사부터 최근엔 올해 초 진화위가 '영암 민간인 희생' 65건을 처리 보류했다는 기사까지 찾을 수 있었다. (2025년 2월 28일자 <한겨레> "[단독] 진화위, 이번엔 '영암 민간인 희생' 65건 처리 보류")

엄마가 민간인학살 피해자가 될 뻔했다니! 그리고 경찰이었던 큰이모부 집안 대다수가 전쟁통에 몰살 당했다니. 엄마와 TV 다큐를 보면서 몇 해 동안 반복하며 나눴던 대화가 잠재되어 있던 엄마의 기억을 일깨운 것이다. 전쟁과 국가폭력 역사는 이처럼 뜻하지 않게 나와 아주 가깝게 연결되어 있었다.

길위에서 역사와 정의를 생각하다

내가 석사과정을 위해 다녔던 대학원은 과거사, 국가폭력, 인권, 민주주의와 민주화운동 연구에 특화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과거 국가폭력 역사는 전공자나 특별한 관심이 있지 않으면 중고등 정규 교육과정을 통해서는 알기 힘든 주제다. 수업을 듣고 과제 준비를 하면서 그동안 완전히 속고 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논문을 완료한 후, 8월 졸업식을 앞두고는 제주에서 열린 동아시아·태평양 국가폭력 세미나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이곳에서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일본, 팔레스타인, 헝가리 등 나로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젊은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일본을 빼곤 식민지를 경험했거나 인접한 강대국의 영향권에 있는 나라이다. 예전에 제3세계라고 불렀던 곳에서 온 눈 맑은 학생들과 함께 세계 마지막 분단국가인 한국, 그것도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휴전에 이르도록 가장 오랜 시간에 걸쳐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제주에서 이렇게 길 위에 국가폭력 역사탐방으로서 다크 투어(Dark Tour)는 시작되었다.

다크 투어란 지진, 화산, 홍수 등 대형 자연재해가 난 곳, 전쟁과 분쟁 피해지역, 엄청난 인명사고가 발생한 곳, 연쇄 살인이 벌어진 곳까지 어둡고 비극적인 장소를 대상으로 삼는 투어를 말한다. 주어진 시간 동안 최대한 명소만 다니는 그룹관광 위주에서 다양한 관심사를 반영한 주제가 있는 여행으로 트렌드가 바뀌면서 다크 투어도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흔히 2차대전 유대인 홀로코스트로 상징되는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나 제주 4.3 사건 탐방을 떠올리면 된다.

국가폭력 역사로 한정하면 다크 투어보다는 '메모리얼 투어(memorial tour)'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메모리얼 투어는 전쟁, 자연재해, 인명사고, 살인 등 광범위한 내용을 포괄하는 다크 투어에서 구체적으로 국가폭력과 인권유린의 역사에 더 집중하여 탐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로 전쟁 중에 발생한 군경에 의한 민간인학살 사건 장소와 이후 독재정권에서 벌어진 다양한 유형의 국가폭력과 인권탄압 문제가 발생한 장소를 찾아간다. 몇 년에 걸쳐 경험해보니, 해설가의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선행학습이 필요하고 탐방 장소가 외지거나 험한 곳이 많기 때문에 체력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본격적인 나의 메모리얼 투어는 2023년부터다. 내가 속한 단체 회원들을 대상으로 투어를 기획하고 진행을 맡았다. 7월 경기도 동두천, 8월 경기도 양평, 9월 인천 월미도, 10월 대구시와 경산, 다음 해인 24년 3월엔 강화도를 다녀왔다.

같은 해에 노무현 시민센터와 협력사업에 선정되어 총 8회차 "길위에역사학교 – 메모리얼 투어로 한국현대사와 국가폭력 이해하기"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다. '현대사 국가폭력 관련 지식 획득과 현장 탐방을 통해 참여자들의 역사의식과 시민의식 확장에 기여함'이라는 다소 거창한 목적으로 기획한 프로그램이다. 4월부터 9월 초에 이르기까지 강의와 현장 탐방과 사례 공유를 묶어 대전·영동 – 인천 월미도 - 동두천 – 인천 실미도를 탐방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수강생들은 기본적으로 역사에 무척 관심이 많은 데다 일부는 자체적으로 동아리를 만들어 이미 활동하고 있었다.

 노무현시민센터와 좋은세상연구소 협력사업 프로그램 웹포스터
노무현시민센터와 좋은세상연구소 협력사업 프로그램 웹포스터 ⓒ 좋은세상연구소

첫 번째, 두 번째 강의는 국가폭력 이해, 시민교육으로서 한국 현대사 이해 필요성이었고 세 번째부터 탐방이 시작되었다. 첫 탐방지는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진 직후 1948년 제주4.3 수형자들과 국민보도연맹원들이 대거 학살된 대전 골령골과 미군 폭격이 있었던 영동 노근리였다.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인 골령골은 대전 사람들에게도 낯선 곳이라고 한다. 대전이 고향이고 몇 년 전 다시 정착한 선배도 골령골은 처음 들어봤다고 했다. 곧 평화기념관으로 조성될 예정이라 했지만, 그래도 너무 처량한 느낌이었다.

두 번째 탐방지는 인천 월미도였다. 한국전쟁을 소위 자유진영의 승리로 이끈 교두보가 된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 동상이 있는 그곳, 조선시대부터 주민들이 살았고 일제강점기부터 들어선 휴양지가 지금의 놀이공원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매년 9월에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지만, 사실 월미도는 상륙 며칠 전 폭격으로 초토화된 곳으로, 상륙을 위한 리트머스 시험지나 다름없었다. 월미도 공원 입구엔 미군 폭격으로 인명 피해는 물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강제 이주한 월미도 주민들의 현수막이 외롭게 자리잡고 있었다.

다음 탐방지는 미군 캠프 도시 동두천이다. 집창촌은 1990년대 중반에 이미 폐쇄되었지만, 지금도 미군 캠프 주변에 남아있는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으며 '윤금이 사건' 이 벌어진 집 앞에서는 그의 처참한 죽음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정부에 의해 제도화되어 관리되었으며 동두천 경제를 좌우할 만큼 달러를 벌어들였던 산업역군으로서 '양공주'들은 폭력에 희생되었거나 성병관리소에 수용되어 쇼크사했거나 병을 얻었다. 그들의 마지막 길은 무연고 묘지에 묻히거나 빈민으로 늙어갔다.

마지막 탐방지는 실미도였다. 대전과 노근리, 월미도가 전쟁 중에 일어난 국가폭력이지만, 동두천과 실미도는 전쟁 후에도 군사주의와 국가폭력이 어떻게 지속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실미도는 영화로도 그 인권유린의 실태와 참상이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막상 가보니 어떻게 이런 곳에서 수십 명이 살며 고된 훈련을 견뎌냈을지 비통한 마음이 들었다.

 대전 산내골령골 현장 탐방
대전 산내골령골 현장 탐방 ⓒ 좋은세상연구소
 동두천 ‘윤금이씨’ 가 살던 집앞
동두천 ‘윤금이씨’ 가 살던 집앞 ⓒ 좋은세상연구소
 월미도 미군 주둔 표지석
월미도 미군 주둔 표지석 ⓒ 좋은세상연구소

민주시민교육의 콘텐츠로서 국가폭력 역사 이해와 기억활동

탐방을 하면서 매번 느꼈던 것은 진상규명이 된 곳이라고 해도 보존 상태가 너무나 허술하다는 점이었다. 일부러 알고 찾아가지 않으면 학살지 표식이나 추념비를 찾기 어렵게 가려져 있다거나 안내판조차 잘 드러나지 않아 접근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국가를 위한 희생은 보존하고 기억하는 반면, 국가에 의한 희생은 은폐하거나 부정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시민교육과 역사교육의 연관성에 대해 김민철(2020)은 이렇게 말한다. "(민주)시민교육은 현재의 과제를 중심으로 미래를 열어가는 교육이고 역사교육은 돌이킬 수 없는 지나간 과거를 복원하여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교육이다." 나는 이와 같은 해석에 일부 공감하지만, 역사는 민주시민교육의 콘텐츠로서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민주시민교육 연구자와 활동가의 역할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의식과 시민의식이 따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국가안보와 반공은 전가의 보도로 군사독재정권을 정당화하는 이념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그간의 민주시민교육은 국가반공주의교육이었거나 그 연장선에 불과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정권의 성격에 따라 국가폭력 피해 진상규명에도 영향을 미쳐왔는데, 최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의 퇴행은 대표적 사례이다.

부끄러운 과거사도 미래를 위해선 민주시민교육 차원에서 적극 활용될 필요가 있다. "시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한다. 개인에서 '시민'으로 되는 것은 일정량의 교육과 경험이 축적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좋은 개인이 반드시 좋은 시민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살면서 특히 매번 선거국면에서도 뼈저리게 느꼈다. 한국 사회의 사상통제와 자기검열은 사적 인간관계에서도 작용한다.

2014년 세월호참사가 부당한 국가권력의 민낯을 목격한 내게 시민교육의 중요성을 각인시켰다면, 지난 2년간의 메모리얼투어 활동은 시민교육의 중요한 차원으로 역사, 그 중에서도 한국 현대사의 국가폭력 이해와 성찰을 위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독일 뮌헨의 나치문서센터 전시관엔 '역사는 그저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그리고 '기억이란...'이 쓰여 있다. 독일은 1, 2차대전의 주요 전범국가로서 그 대가를 오랫동안 혹독하게 치러왔다. 이 과정에서 독일은 정치교육(Politsche Bildung) 체계화를 통해 나치즘과 철저하게 결별하고 과거사 청산을 할 수 있었다. 아래 사진은 민주시민교육과 역사교육의 연관성과 기억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알려준다.

 독일 뮌헨의 나치문서센터 전시관
독일 뮌헨의 나치문서센터 전시관 ⓒ 임재근 페이스북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과제는 무엇일까? 희생자 유가족들과 연구자, 조사관, 기록자들이 국가폭력과 국가범죄 사실을 사회적 기억으로 남기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제도권 역사교육과 시민교육은 이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역사와 이념교육을 연결시켜 역사를 왜곡하고 정쟁화해왔다.

필자의 중고등학교 시절 역사교과서처럼 현재의 역사교과서에도 제주4.3과 여순사건만이 기술되어 있을 뿐, 한국전쟁 전후의 광범위한 국가폭력 역사는 찾기 힘들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총서>의 서문에는 '우리 대한민국은 백만 학살의 토대 위에 세워진 나라'라는 구절이 나온다. 결국 국가폭력과 국가범죄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를 두고 기억투쟁은 여전히 진행 중인 것이다.

2년 간의 길지 않은 국가폭력 역사탐방을 통해 한국의 과거사 청산 문제는 우선적으로는 철저한 진상규명과 그에 따른 가해자 처벌 그리고 미래를 위한 교육과 기억 차원에서 성찰적이고 체계적으로 설계되어야 한다는 점을 나와 함께 한 모든 이들도 공감했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참고 자료]
김민철(2020), "역사에서 민주주의와 시민을 배우는 비판적 체험", <우리는 시민입니다>, 서울: 피어나.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박민서는 좋은세상연구소 집행위원이자 정치학자. 15년간 영어교재 편집자로 일하다가 작은 시민단체 몇 곳에서 교육프로그램을 기획·운영했다. 국가폭력과 시민교육에 관심이 많다.


#시민교육#국가폭력#좋은세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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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와 과거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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