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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화성시 향남읍에는 '도심 속 초원'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산책길이 있다. 아스팔트로 가득한 도심 속 모퉁이에서 펼쳐진 이 길은 어느 날 문득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숨을 고르게 한다. 생활하천을 따라 약 2km 남짓 이어지는 산책로. 한쪽에는 논과 밭 그리고 갈대와 부들이 숨 쉬는 습지가 있고, 반대쪽에는 아파트와 빌라, 상가가 줄지어 있다.

햇살이 하천 위로 스며들 때면 이 길은 잠시 다른 세상으로 열린다. 흰 두루미가 이쪽 논에서 저쪽 논으로 날아오르는 순간, 마음속 작은 소음은 사라지고 오로지 자연의 고요만이 귀에 들어온다. 습지 쪽에서 나온 오리 두어 마리가 한가롭게 논으로 들어가고, 논 한가운데 하얀 연꽃이 군락을 이루며 산책하는 이들의 마음을 환하게 밝힌다.

두루미와 연꽃 논에 반은 연 잎이다. 막 꽃이 피기 시작했다. 두루미가 아침부터 분주하다
두루미와 연꽃논에 반은 연 잎이다. 막 꽃이 피기 시작했다. 두루미가 아침부터 분주하다 ⓒ 신혜솔

아이와 함께 걷기에도 좋다. 개구리울음소리도 들리고, 달팽이도 보인다. 가끔은 뱀이 길을 건너는 장면도 볼 수 있다. 손자 로리는 이 길을 '개구리 길'이라고 부른다. 로리에게 이 산책길은 단순히 걷는 곳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자연학습장'이자 쉼표 같은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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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두루미가 날아가면 '잘 가!' 하고 손을 흔들며 자연과 인사하는 법을 익힌다. 길가 작은 텃밭에는 이웃들이 심은 오이, 가지, 토마토가 자라고 있다. "이 토마토는 우리 텃밭보다 더 잘 크네." 그러면 로리는 "할머니, 우리 텃밭 토마토가 더 맛있을 거예요"라며 웃음을 짓는다.

이 길의 매력은 단순히 풍경에만 있지 않다. 길 중간중간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놓여 있어 한쪽 길 끝에 다다르면 다리를 건너 반대편으로 돌아 걸을 수 있다. 덕분에 이곳은 조깅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도 '작은 순환 코스'가 된다. 아침에는 출근 전 짧은 산책이나 러닝을 즐기는 주민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오후에는 햇살 아래 천천히 걸으며 담소를 나누는 노인들의 발걸음이 잔잔히 이어진다.

그러나 이 평화로움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다. 아파트와 상가가 늘어선 주택가 한가운데서 이렇게 넓은 논과 습지가 보존된 경우는 드물다. 나 역시 이 길을 걸을 때마다 '이곳만큼은 더 이상 개발로 사라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된다. 실제로 '이 길은 향남의 숨은 생태공원'이라고 못 박아두고 싶다.

도심 속 자연의 심장, 습지

이곳, 들과 습지는 단순한 풍경을 넘어 생태계의 중요한 중심축이다. 습지는 다양한 생물종의 서식처로 기능하며, 수많은 물새와 조류가 이곳을 번식지로 삼는다. 오리와 두루미가 논과 습지를 오가는 모습은 그 생명력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또한 갈대와 부들같은 수생식물들이 물속에서 자생하며 자연의 균형을 유지한다.

습지는 물을 저장하고 정화하는 천연의 필터 역할을 한다. 빗물이 고이고 천천히 스며드는 동안 불순물이 자연적으로 걸러지며, 이는 지역 수질을 맑게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더 나아가 습지는 탄소 저장고이기도 하다. 식물들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방출함으로써 대기 중 탄소를 줄이고, 지구 온난화를 완화하는 데 기여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습지를 지키는 일은 곧 환경 보호이자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첫걸음이다.

갈대와 부들 논과 논 사이, 습지에는 갈대와 부들이 빼곡하다. 새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고 드나든다.
갈대와 부들논과 논 사이, 습지에는 갈대와 부들이 빼곡하다. 새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고 드나든다. ⓒ 신혜솔

화성시에는 매향리 평화생태공원, 비봉습지공원 등 큰 규모의 생태공원이 자리하고 있지만, 이 생활하천 산책길만큼 '생활 속 자연'을 가까이서 보여주는 곳은 드물다. 산책길의 끝에는 숲이 울창한 나래공원이 있어,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숲과 논, 하천이 이어지는 작은 자연의 순환을 온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비가 오는 날이면 풍경은 또 다르다. 개구리 합창이 길 위를 가득 메우고, 빗방울이 논과 하천에 떨어지는 소리는 '자연의 연주'처럼 들린다. 우산을 쓰고 천천히 걷다 보면 도심의 소란스러움은 잠시 잊히고, 이곳이 우리 동네의 심장을 고요하게 뛰게 하는 존재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개구리길은 말 그대로 '마을의 맑은 숨결'이다. 이 길을 걷는 주민들의 발걸음은 단순한 산책이 아니라, 자연과 도시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작은 의식과도 같다. 오늘도 이 길을 걷는 이들의 마음에는 하나의 공통된 기도가 있다.

"부디 이 길이, 이 논과 습지가 오래도록 남아 우리 동네의 평화를 지켜주길."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 스토리에도 실립니다.


#생태공원#우리동네#도심속자연#습지#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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