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책은 PR로 시작해서 PR로 완성된다. ⓒ 구글 Gemini
정부는 끊임없이 재난과 갈등에 직면한다. 각종 재난과 갈등을 잘만 해결해도 성공한 정부로 가는 지름길을 가고 있다고 하겠다. 재난과 갈등 해소는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지만, 핵심 중 하나가 소통을 잘하는 것이다. 역대 많은 정부가 소통의 중요성 강조해왔다. 다들 나름 노력한다고 했지만 국민의 기대치와는 거리가 먼 것이 현실이다.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의대 증원을 둘러싼 의·정 갈등이 심화된 요인 중 하나로 소통 부족이 꼽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그렇다면 새 정부의 소통 역량을 높이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과거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바탕으로 개선이 필요한 과제와 대안을 제시해 본다.
의대 정원 조정 정책 등 긍정적 취지로 시작한 개혁 정책이 이해 관계자와의 갈등과 대립 속에 좌초됐다. 결과적으로 정부에 대한 국민 신뢰를 실추시킨 이 사안은 정책 위기관리 실패의 전형적 사례라고 하겠다.
정부에서 유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의·정 갈등의 신속한 마무리와 함께 그간 국가 전체를 뒤흔든 위기의 근본 원인과 문제점을 냉철히 진단하고 개선책을 강구하는 자기 성찰이 필수적이다. 의대정원 조정 정책 실패 진단은 공정성과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가 아닌 국무조정실 등 다른기관 주도로 실시하고, 그 결과를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삼도록 전 중앙부처가 공유하고 학습하기 바란다.
정부와 많은 공공기관들을 보면 정책 이슈에 대한 위기 대응 시스템을 구축하고 매뉴얼을 준비하는 등 위기관리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위기가 발생하면 정부의 위기 소통 능력은 제자리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의 핵심은 위기관리 시스템과 매뉴얼은 갖추고 있지만 실제 상황에서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위기 상황과 이해관계자들의 움직임 또한 변화무쌍하다는 점에서 이를 고려한 살아있는 위기관리 대책과 준비가 절실하다. 이를 구현하는 실효성 있는 방안은 결국 실제 상황에 준하는 부단한 반복 훈련으로 새로운 소통문화를 공직 사회 내에 확고히 뿌리내리는 것이다. 새로운 소통 문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위기 대응 기술적 장치 못지않게 '사람'에 대한 투자가 무엇보다 긴요함을 명심할 일이다.
정부·공공기관의 특성에 부합하는 ESG 측정 지표 만들자
조직에서 위기가 발생하면 CEO(최고경영책임자)의 태도와 결정이 위기 관리의 성패를 가른다. 공공 분야도 다르지 않다. 정부에서 최고 정책 결정권자인 장·차관의 역할이 이처럼 막중함에도 대다수는 소관 분야의 전문성은 있을지 몰라도 위기에 대한 이해와 소통 마인드까지 갖추고 취임하는 경우는 드물다.
앞으로 장·차관으로 취임하는 분들은 보름 이내로 전문가로부터 위기 커뮤니케이션 특별 실전 교육훈련을 받을 것을 제안한다. 지금까지 주로 실시해온 분장, 의상, 대화술 등 1차원적 이미지 관리가 아니라 다양한 실제 위기 사례를 놓고 대응 전략과 전술, 메시지 개발, 효과적인 소통 방법 등을 학습해 미래의 위기에 대비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정부의 위기소통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각 단위 부처의 실전 소통 능력 함양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자주 실시해온 집합식 홍보 교육이나 민간컨설팅 지원 사업은 효과가 제한적이다. 각 부처의 소통 능력을 스스로 단기간에 향상시킨다는 것은 쉽지 않은 만큼, 정부 정책 홍보를 총괄 조정하는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소통실 주관으로 '찾아가는' 위기 커뮤니케이션 지원 서비스를 실시할 것을 제안한다.
문체부 소통실부터 정책 홍보 관리가 아닌 실질적인 서비스 기관으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문체부가 민간 홍보전문 대행사와 협조해 2~3개 '위기커뮤니케이션 지원 TF'를 구성하고, 각 부처에서 요청을 받으면 해당 팀을 선제 파견해 기획부터 문제 해결 때까지 현장 지원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정부 각 부처의 위기 대응 소통역량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당근과 함께 채찍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 그간 실시해온 정부 부처 홍보 평가 제도를 개선하기 바란다. 그동안 문체부가 정부 각 부·처·청을 상대로 매년 실시하고 있는 정부 홍보 평가는 실적 중심의 정태적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 국민 체감도와 괴리가 있다. 홍보 평가 대상, 기준, 방식에 있어 국민 체감도 관련 비중을 늘려 정부 전체의 실질적 홍보 수준을 제고하기 바란다.
중앙행정기관뿐만 아니라 공공기관의 실적 평가를 실시함에 있어서도 정책 홍보 및 위기 대응 관련 항목을 반영하는 방안을 기획재정부와 협조해 추진하면 효과가 클 것이다. 이들 평가 결과가 공공기관 기관장 인사 및 구성원 상여금 지급률과 직결돼 있어 제도 개선을 잘 하면 정책 홍보 소통에 관한 공공기관의 관심과 활동이 크게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위기 관리를 진짜로 잘하는 기관은 위기 이슈가 터졌을 때가 아니라 평소에 잘한다. 평상시에 국민 신뢰 자산을 축적해 놓으면 위기에 직면했을 때 진가를 발휘한다. 소위 '판단유예의 혜택(the benefit of doubt)'이다. 평소 신뢰 자산을 축적해 온 조직은 위기 상황에서 바로 매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그 이유를 들어보려고 시간 말미를 주는 특별한 혜택을 누리는 것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ESG(환경·사회·지배구조를 뜻하는 말로, 기업 또는 기업에 대한 투자의 지속 가능성과 사회적 영향을 측정하는 요소)에 대한 관심과 노력은 국민 신뢰 자산을 평소에 축적하는 방안이 될 것이다. ESG는 민간분야에만 적용되는 과제가 아니다. 중앙행정기관과 공공기관도 관심을 갖고 시행해야 할 시대적 과제다. 정부·공공기관의 특성에 부합하는 ESG 측정 지표를 개발하고 기관 평가에 적용하는 방안도 검토해 시행하면 좋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유재웅은 한국위기커뮤니케이션연구소 대표다. 40년 이상 국내외 정책홍보 업무를 담당했고, 연구하고, 가르쳤다. 대통령홍보기획비서관, 해외홍보원장을 거쳐 을지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현 (사)한국PR협회 정책소통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