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활동가주간의 <활동가인터뷰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일과 삶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로 기록하는 활동을 지원합니다. 2025년에는 특별히 <광장을 만드는 활동가>를 기획인터뷰로 진행했습니다.
12.3 계엄 이후, 꾸준히 광장을 만들고 참여한 시민들, 그리고 그들 곁에는 광장을 함께 만들어간 활동가가 있었습니다. 광장을 열기 위해 집회신고부터 무대설치, 공연 섭외, 발언자 선정, 참여자 안전, 홍보까지. 분야를 넘어 매주 거리에서 광장을 만들고, 지키고, 지원한 활동가들의 이야기로 지금의 역사를 기록하고, 사회 변화에 있어 시민사회 활동가의 역할을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과 <지리산이음>이 함께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피켓을 든 홍성칠 활동가 ⓒ 홍성칠 제공
홍성칠 광주진보연대 집행위원장, 광주비상행동 상황실장, 오늘 인터뷰이의 공식(?) 직책이다. 이렇게 그를 소개하는 이유는 공식 직책에 해당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역할을 광주에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시민사회지원센터에서 처음으로 제정한 활동가상에 이름을 올렸을 때 광주에서는 아마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였으리라.
그가 가장 큰 성과라고 꼽는 옛 전남도청 복원 투쟁과 현재의 복원대책위 활동, 박근혜퇴진 촛불, 5.18 단체, 기관, 왜곡 관련한 대응 활동을 가장 앞장서서 해왔고 지역의 현안이 터지고 그에 관련하여 대책위를 꾸릴 때, 시민사회든, 단체 내에서든, 사적인 관계에서든 크고 작은 고민이나 갈등이 생겼을 때, 누구라도 가장 먼저 떠올리고 찾게 되는 이름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날카롭고 정무적인 판단이 필요하거나 여러 사안들이 얽힌 일도 원만하게 해결하는 능력을 갖췄는가 하면 다양한 분야에 대한 풍부하고 종합적인 지식과 의견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조언과 조력을 마다하지 않는다(그래서 함께 활동하는 지역에서는 ''홍박사'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를 대하든 진실되고 겸손하고 꾸밈없이 대하는 한결같은 성품 덕에 도움을 요청하는 손길이 많을 수밖에... 오죽하면 우리 지역의 어르신이 '안 그래도 쪼끄만디 닳아져불겄어. 그만들 불러"라는 안타까운 탄식을 했을까.
나는 가까이에서 활동하는 실무자로서 앞서 말한 활동가상 추천서류 양식을 맞추기 위해 활동 사진을 정리하면서 다시 한번 놀랐다. 정말 사진이 없어서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겨우겨우 소통방들을 뒤지고 가까운 몇몇 기자들의 도움을 받아 한쪽 귀퉁이에 담긴 사진까지 넣어 마무리했던 기억이 난다. 어느 곳에라도 손 보태고 머리를 맞댔지만 스스로를 빛내기보다 낮추는 사람, 내가 보는 그의 모습이다.
12월부터 3월까지 상황실장이라는 직책으로 광장을 꾸려오는 동안, 광장의 요구, 시민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기 위한 논의의 시작부터 할 말 많으신 광주의 어르신들을 모시는 일, 함께 해준 실무자들의 고된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고 집회 설비 등을 아낌없이 내어준 업체 관계자들을 챙기는 일까지, 집회가 끝난 후 거리와 광장을 정리하고 마지막 쓰레기 봉투를 묶는 일까지... 큰 일도 거침없이, 작은 일도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누구라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거라 생각한다.
"대학시절 '활동가로 살아야 되겠구나'고 결심"

▲5.18민주광장, 집회를 준비하는 인터뷰이와 인터뷰어가 한 앵글에 잡힌, 우연히 찾은 사진 ( 좌:홍성칠 / 우:하애남 ) ⓒ 하애남 제공
- 꽤 오랜 시간 활동가로 살아오셨는데 얼마나 되는지, 언제부터 어떤 활동을 했는지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오랜 활동 중에 가장 성취감을 느꼈거나 중요한 변화나 성과를 만들어 낸 경험이 있다면?
"활동가란 개념을 인지하고 '나는 활동가다'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대학 2학년 정도부터, 그러니까 35년 정도 활동가로 살아왔네요. 우리가 아무래도 광주니까 1년 중 상반기는 온통 5·18진상규명을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날마다 시내에 나가 거리투쟁하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학생이라기보다는 활동가로 살았고 활동가가 되어 갔죠.
당시에는 아직 군부독재의 끄트머리에 있었고 5.18민중항쟁의 직간접적 경험으로 인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운동은 군부 독재 타도와 민주화 쟁취를 뚜렷한 핵심 목표로 함께할 수 있었어요. 80년대의 학생운동은 이전 시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가두시위 중에 초코파이가 대열에 뿌려지거나 최루탄 연기와 백골단의 추격 속에서 학생들에게만 열렸다 순식간에 닫히는 상가의 셔터 등 전설같은 미담들이 꽤 많았죠. 학생들은 대학을 넘어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 등 사회 취약 계층과의 연대를 모색하며 사회 변혁의 주된 동력으로 인정받고 있었고 그렇기에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이 따로 구분되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학생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당연하게 자신을 활동가라고 여겼던 것 같아요.
성취감, 성과? 많았죠. 가장 처음으로 겪은 것은 대학 3학년 때 어용교수, 무능 교수 퇴진 투쟁을 해서 2명을 몰아낸 것이었어요. 학우들의 반응도 뜨거웠죠. 아, 이런 게 투쟁이고 운동이구나 느꼈습니다.
제가 다닌 조선대학교는 그냥 사립대학교가 아니었어요.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민립대학이고 수많은 소액 기부가 모여 세워진 진정한 의미의 민립대학으로, 그 설립 정신은 현재까지도 조선대학교의 중요한 정체성으로 남아있습니다. 제가 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에 있었던 1987년 1·8 항쟁은 바로 이러한 민립대학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최근에는 5·18 최후 항쟁의 역사적 공간인 옛 전남도청을 9년의 장기 투쟁의 결과로 올 12월에 1980년 5월의 모습으로 원형이 복원되게 하는 투쟁입니다. 옛 전남도청이 무안으로 이전하면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옛 전남도청이 훼손되었는데 어쨌든 이게 국책 사업이고 이미 완공된 사업이었기 때문에 도청 복원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이걸 뒤집고 도청을 복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된다고 확신했어요. 그냥 도청을 공개하면 될 거다라는 믿음이 있었고 이 최후 항쟁의 현장을 그대로 공개해 버리는 순간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였던 거죠.
5.18 민중 항쟁 이후로 이 옛 전남도청 복원 투쟁이 광주 전남 시도민, 민·관·정이 하나가 되어 뭔가를 시도하고 목적을 이룬 최초의 사례에요. 오월 단체 등 경험자뿐만 아니라 광주광역시청, 전남도, 시도의회, 교육청, 시민사회 할 것 없이 함께 했으니 말 그대로 명실상부 범시도민 공동체를 만들어냈기에 가능했고 이번 탄핵 건으로 복원의 정당성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이어진 박근혜 퇴진 촛불과 함께 우리 광주진보연대가 지역에서의 몫을 인정받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12.3계엄과 윤석열 파면 투쟁을 겪으면서 끈질기게 잘 싸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2.3내란의 밤 당시 비상호출에 모여든 광주시민들 ⓒ 홍성칠 제공
- 어떤 계기로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활동가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는지, 딱 한 마디로 얘기한다면 어떤 걸까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같은 마음인지도 궁금합니다.
"딱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려운데요. 먼저 질문에서 말했듯이 대학시절 '활동가로 살아야 되겠구나'고 결심했고 사회운동 참여는 그 연장이니까 특별한 계기나 사연이 따로 없습니다. 굳이 있다면 수배중이어서 바로 노동, 농민 현장으로 가지 못한 조건이다 보니 사회단체로 방향을 바꿨다는 것이죠.
학생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개별로 흩어지지 말고 조직적으로 사회운동을 준비한다는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농촌과 노동 현장으로 투신을 했어요. 처음에는 농촌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4학년쯤 되니 노동현장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커졌죠. 그때까지도 대학생이 노동현장에 취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위장취업을 하기도 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방법으로 현장으로 들어갔지만 나는 수배중이라 그러지 못했어요. 수배중이라 쫓기는 중에서도 언제든 기회가 닿으면 노동현장에 투신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 갖가지 일을 했죠. 비닐하우스 시공도 하고 건설현장에도 들어갔다가 동충하초 농장에서 일을 하기도 하고 용접기술도 배우고 그러다가 잡혀서 감옥에 들어갔으니 노동현장 투신은 완전히 물건너간 거죠. 학력은 속일 수 있지만 시국 범죄 전력은 속일 수가 없으니...
그래도 그 때 현장에 투신했던 많은 사람들이 90년대 말 이후에는 현장을 넘어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니 나 혼자가 아닌, 20년이 넘게 같은 마음으로 함께하는 든든한 동지들이 되었죠. 당연히 지금도 같은 마음이고 잘 했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때로 돌아간다면 기어코 노동현장으로 바로 가보고 싶죠."
"극우세력의 광주 집회, 광주는 물론 전 국민과 함께 대응했다는 데 의미"

▲12.3내란사태 이후 첫 주말 집회 ⓒ 홍성칠 제공
- 비상계엄 선포가 된 12월 3일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보신다면? 12.3 내란 사태 이후 광주시민사회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저녁 11시경 소식을 접하고 바로 지역 소통방에 비상을 때렸어요. 11시30분에 5·18민주광장으로 달려가서 비상회의를 시작했죠. 다음 날 아침 비상시국대회로 이어졌고요. 그 모든 과정이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많은 광주시민들에게는 45년 전 비상계엄 확대에서 시작된 5·18의 비극적인 기억이 되살아나는 경험이었고 박근혜퇴진 촛불의 여운도 남아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민사회는 분개했죠. 하나 같이 연대해서 대응하자는 분위기였어요."
- 120일이 넘는 기간 광장을 꾸려오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은 경험 (또는 사람)을 꼽으라면 어떤 것인가요?
"기간도 길었고 워낙 다양해서 딱 하나로 꼽기가 어렵네요. 굳이 꼽으라면 광장에서 집회 준비하고 있는데 20대 초반의 청년(여성)이 어렵게 다가와 꼬깃하게 접은 3만 원을 건네며 '이거라도 받아 달라'며 '알바가 집회 시간하고 겹쳐서 나오질 못해서 이거 전달하려고 겨우 시간 내서 왔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바삐 갔어요. 집회도 참가 못 하고 급하게 돌아서 가는 뒷모습을 보며 전율이 일었습니다. 연락처도 받지 못했습니다. 꼭 다시 만나고 싶은데..."
- 광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상황실장으로 역할을 하셨는데 어떤 어려움이나 고충(?)에 부딪혔나요? 그것을 극복한 방법도 알려주세요.
"모든 것이 어려움이고 고충이었죠. 부딪힌 것도 많죠. 서로 다른 다양한 단체의 활동가들이 합을 맞춰야 하고 내 주장만 할 수 없잖아요. 극복하는 데 특별한 방법이 있겠어요? 서로 믿고 존중하면서 하는 수밖에요. 생각과 주장이 조금씩 달라도 결국 근원에는 다 같은 마음이 자리하고 있으니까 다 되더라구요.
그것보다 더 큰 어려움은 '이게 맞나?'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시민들의 눈높이와 구미에 맞출 수 있을까? 시민의 눈이 향하는 곳, 시민의 목소리 안에서 우리가 광장을 꾸려가고 있나? 시위 현장에 응원봉 세대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2030의 정서와 감성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이것이 광장의 근본 요구인가? 하는 고민이 많았습니다."

▲12.3내란사태 이후 5.18민주광장에서 농성장 운영하는 중 가장 일찍 광장에 나와 농성장 청소를 시작하고 참여하는 사람이 있든 없든 선전전을 빠트리지 않고 진행, 가장 늦게까지, 가장 부지런히 농성장을 관리한 덕분에 농성장은 늘 깨끗하고 질서있게 운영될 수 있었다. ⓒ 홍성칠 제공
- 광장을 꾸려온 기간이 무려 123일이나 되는데 꽤 긴 시간이었죠?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광주 금남로에서 극우단체들이 몰려와 집회를 열었던 2월 15일이 하나의 분수령이 아닐까 싶어요. 광주만의 집회가 아니라 전 국민의 관심을 받기도 했으니까요. 그날의 광장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비상계엄이 해제된 4일 저녁 5·18민주광장에서 첫 '광주시민총궐기대회'가 열렸고 그날 이후 총 20차례의 주말 총궐기대회가 있었어요. 국회의 탄핵소추안 통과가 있기 전과 윤 전 대통령이 석방됐을 때는 평일에도 집회가 이어졌습니다. 총 21회의 광주시민대회가 저녁마다 진행됐고 이밖에 상경 투쟁과 각계의 집회 및 시위, 기자회견 등 광주비상행동이 주관한 집회는 50여 회, 연인원 10만 5000여 명이 참가한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123일이라는 기간 광장에서의 집회, 농성, 선전전 뿐만 아니라 도심 행진도 하고 젊은 세대와 함께 하기 위해 EDM(Electronic Dance Music) 파티도 해 보고 노래자랑대회, 검찰·법원 항의 퍼포먼스, 삼보일배, 천막농성 등 정말 안 해본 것이 없었네요.
123일을 돌아보면 국회에서 탄핵을 의결하는 과정, 첫 의결에 실패하고 그 다음 의결이 이뤄지기까지 일주일 동안이 첫 번째 고비였던 것 같아요. 두 번째 표결에서 윤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통과됐을 때 금남로에는 4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모여 함께 표결 결과를 지켜봤고 승리의 기쁨을 함께 누렸습니다. 그리고 세이브코리아를 비롯한 극우 보수세력이 광주에서 탄핵 반대 집회를 열었을 때와 윤 전 대통령이 석방돼서 웃으며 걸어나왔을 때 등이 분수령이 된 순간이었죠.
그 중에서도 2월 15일, 14차 대회는 그 의미와 무게가 남다를 수밖에 없죠. 그들이 오월 시민군들이 피를 뿌렸던 광주의 금남로에서 집회를 연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의 문제가 아니고 오월을 침탈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니까요. 비상계엄에 맞서 국회로 달려가 계엄군의 장갑차와 총칼을 온몸으로 막아낸 시민들이 하나같이 1980년 광주가 우리를 행동하게 했다고 말했잖아요. 민주주의 역사에서 오월 광주가 갖고 있는 묵직한 상징성을 의도적으로 훼손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짙게 깔려있었던 거죠.
광주시민들 뿐만 아니라 전국의 민주시민들이 연대와 응원의 발길로 금남로를 가득 메웠고 응원의 댓글로 온라인 공간을 메아리치게 했고 선 결제와 자원봉사, 나눔과 후원으로 광장을 따뜻하게 채웠습니다. 그날 금남로는 1980년의 해방 광주, 절대 공동체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다만 45년 전 광주가 고립된 채로 싸웠다면 이번에는 전 국민이 함께 멀리에서, 가까이에서 함께 힘을 모았다는 데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또한 광주시, 광주시의회, 5개 자치구, 시민사회단체, 종교계, 학계, 오월 단체 등 민관이 하나로 똘똘 뭉쳐서 함께 대응하였기에 더더욱 힘을 발휘했고 빛이 났던 거죠. 견해와 형편의 차이를 뛰어넘어 민관을 막론하고 시민들의 참여를 호소하고 힘 보탤 수 있는 곳을 찾아 누구나 힘을 보탰고 '너'와 '나'의 구분없이 80년의 광주처럼 모두가 한마음으로 함께 했어요. 보수집회의 구체적 내용이 드러난 후 단 이틀만에 광주 시민들이 보여준 압도적인 결집, 성숙한 대응은 광주의 힘과 저력 그 자체였던 거죠.
보수 세력의 광주 침탈을 광주시민들이 압도적 결집으로 막아냈던 게 지역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었지만 지루하게 길어지고 있던 내란 정국에서 전국적으로 우리가 이긴다는 믿음과 희망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활동 여건 만들지 못해 후배 활동가들에게 늘 미안"

▲옛전남도청 복원투쟁 중 1000일 맞이 행사 ⓒ 홍성칠 제공
- 파면 광장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요. 박근혜 탄핵 촛불 때도 광장을 만드는 역할을 하셨는데 단순비교는 어렵겠지만 그때와 지금의 광장이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는지 말씀해주세요~ ( 비슷한 질문입니다만 ) 오늘날 (광주의) '광장'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다고 보시나요?
"먼저 가장 큰 차이는 광장의 열기와 온도가 달랐습니다. 촛불이 훨씬 뜨겁고 역동적이었어요. 참여 수도 많았고, 자유발언, 공연자도 넘쳐 났어요. 집회 프로그램이나 사전 사후, 보조프로그램도 더 다양했죠. 촛불에 비하면 오히려 이번 광장이 단조로왔어요. 긴장감도 떨어졌던 것 같구요.
광주 '광장'의 변화는 좀더 사색하고 연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퇴진광장에서는 남태령의 2030여성들, 케이팝을 부르는 응원봉세대, 달라진 시위문화 등이 두드러졌고 언론 등을 통해 회자도 많이 되었지만 광주는 사실 생동감이 높지 않아서 늘 고민이었거든요."
- 선배 세대로서 사회 운동에 진입하는 후배 활동가에게 어떤 지지와 격려를 하시겠나요?
"뭐든지 닥치는대로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지지와 격려를 하고 싶네요. 새로운 후배 활동가들이 워낙 귀해서요. 사회운동의 환경이 바뀐 만큼 후배 활동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선배들이 만들어주지 못했습니다. 또 지금도 못하고 있습니다. 늘 미안하죠."
- 광주에서 누구보다 오랫동안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계신데요. 만약 한 가지 분야로 활동을 좁혀야 한다면 이것만은 남기고 집중하고 싶은 분야나 활동이 있나요?
"제가 20년 진보당 평당원인데 정당운동을 제대로 해보고 싶습니다. 정책분야에서요. 사회운동의 결실은 진보적 의제와 정책을 법과 제도로 안착하는 데에 있다고 봅니다. 좋은 정치는 좋은 정당에 의해 담보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바른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정치를 잘하는 것이고, 좋은 정치의 여건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2025 공익활동가주간'은 공익활동가들에 대한 존중과 지지를 바탕으로 사회적 인정 문화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6월 30일부터 7월 4일까지 열린다. ⓒ 공익활동가주간추진위원회
뉴스레터 <지리산에서 온 편지> 구독하기 http://jirisanletter.stibee.com/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변화를만드는사람들 홈페이지에도 실립니다.글쓴이는 광주진보연대활동가입니다. 아이들의 엄마이기에,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만들어가는 일에 더욱 진심일 수 밖에 없기에, 극 내향형 집순이에서 활동가로 설 수 있었습니다. 광주의 오월을 안내하는 해설사로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은 오월시민이 되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6월 30일부터 7월 4일까지 진행되는 '2025 공익활동가주간'은 “공익활동가의 지역, 영역, 세대를 잇는 사회적 지지와 연대의 플랫폼“으로서 공익활동가들에 대한 존중과 지지를 바탕으로 사회적 인정 문화를 만들기 위한 전국 단위의 행사입니다. 일주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공익활동가를 응원하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연대의 장이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