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이 지난 6월 8일 기자 브리핑에서 카메라 4대를 추가 설치하는 등 대통령실 브리핑룸 개편과 관련한 설명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기레기들, 얼굴을 내보낸다니 이제 큰일 났네."
"얼굴도 공개한다니 질문 수준 좀 올라가려나."
"카메라 뒤에 숨어서 장난도 못 치고 아이고 고소해라."
지난 6월 8일 대통령실이 브리핑룸에 카메라 4대를 추가 설치하고 '기자들 얼굴이 보이는 브리핑'을 실시하겠다고 하는 기사에 달린 댓글들입니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일주일도 안 됐을 때였죠.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당시 "대변인과 관계자들만 비추던 기존의 일방적 소통 방식에서 벗어나, 기자들이 질의하는 모습과 현장 상황을 쌍방향으로 생생하게 전달하겠다"며 개편의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이 대통령이 댓글을 보고 직접 생각해낸 아이디어였습니다.
질문하는 기자들의 얼굴이 생중계되니 기자들이 엄청 싫어할 것이라는 얘기는 댓글을 다는 사람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방송에 자주 나오는 한 언론학자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우리나라 기자들의 특징이, 나는 은폐돼 있고 너는 공개되기를 바라는 그런 속성이 있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그걸 자기 자신에게도 들여보내면, 그러니까 너도 비평받아야 된다라든가 너도 비판받아야 된다고 그러면, 어떤 직업 집단보다도 굉장히 불같이 화를 냅니다."
출입기자들 "얼굴 공개 전과 후가 다를 게 없다"
그럼, 기자들은 질문하는 자신의 얼굴이 생중계 화면에 나오는 것을 과연 싫어할까요?
모든 대통령실 출입 기자들에게 다 물어본 건 아니지만, 적어도 제가 만나본 기자들 가운데 그게 싫다고 한 기자는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6월 24일 실제로 새로운 방식이 시행됐지만, 다들 얼굴이 공개되기 전과 후가 다를 게 없다고 말했습니다. 항의했다는 얘기도 못 들었습니다.
얼굴 나오는 브리핑을 꺼리기는커녕 매일 아침 출근해서 오늘의 질문거리를 찾게 됐다는 기자도 있었습니다. 오히려 한 기자는 기자들도 질문만 잘하면 스타가 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당일인 지난 6월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룸에서 새정부 첫 인사 발표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물론 기자들이 이토록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자업자득입니다. 미국 대통령이 질문 기회를 줘도 손도 못 들면서, 참사 현장에 가서는 유족들이 상처를 받거나 말거나 마이크를 들이대고, 권력에 접근해 일반인들이 누릴 수 없는 갖은 특권을 누리는 듯한 모습이 대중에게 좋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다 업보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오해'와는 달리 대통령실 브리핑 생중계에서 기자들의 얼굴을 지운 것은 기자들이 아니라 대통령실(청와대)입니다.
노무현 정권 말이던 지난 2007년 청와대는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을 생중계하는 시스템을 도입해 6개월 정도 시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벌써 근 20년 전에 이미 시도했었던 제도입니다. 그게 이듬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폐지된 것입니다.
개편되기 전까지, 통상적인 대통령실의 브리핑은 먼저 대변인이 방송 카메라가 비추는 가운데 그날의 현안을 브리핑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게 끝나면, 대변인은 "자리를 정리하겠다"며 방송 카메라를 끄게 합니다. 그러면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습니다. 이걸 '백브리핑(백블)'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최근까지 대변인과 기자들의 질문 답변에서 얼굴이 지워졌던 건 기자들뿐이 아니라 양쪽 모두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기자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처럼 대변인을 실명으로 쓰지 못하고 '관계자'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쓰게 됩니다.
대통령실(청와대)이 이같이 백브리핑이라는 것을 하는 이유는 질문과 대답이 그대로 공개될 경우 위험한 내용이 많기 때문입니다. 자칫 부정확한 내용이나 기밀 정보가 방송을 탈 경우 큰 문제가 될 소지가 많기 때문에 날 것 그대로 나가는 것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 지난 6월 1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룸에서 기자들앞에 G7회의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땅 꺼지는 수석들 한숨소리...백블 없어지고 백백블 늘어날라
이제 정작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기자들보다 사실 브리핑을 해야 하는 대변인과 수석급 이상 고위직들입니다.
무자비한 질문 공세를 퍼붓는 기자들뿐 아니라 똑부러지는 답변을 내놔야 할 그들도 얼굴과 직함을 그대로 노출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매일 오후 2시 30분 개방형 정례브리핑을 했던 노무현 정부 때 대변인실 직원이나 수석비서관들이 브리핑 준비하느라 제대로 점심식사를 못했다는 후일담이 돕니다.
이재명 정부 고위 관계자는 수석비서관들에게 앞으로는 답변이 다 오픈된다고 얘기했더니 모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더라고 전했습니다. 그만큼 부담스러운 겁니다.
'백블'이 없어지니 '백백블'이 활성화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습니다. 아무리 대통령실이 답변을 공개적으로 한다 해도 공개되면 곤란하거나 감추고 싶은 내용이 없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안이 필요한 외교안보 쪽이 특히 그렇습니다. 실제 지난 6월 26일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브리핑 시작 전 자신의 실명을 가리고 '관계자'로 써 달라고 했습니다. 나토에 다녀온 사람이 위 실장이라는 건 세상이 다 아는 데 실명을 가리는 게 무슨 의미냐는 기자들의 항의가 먹혔는지 곧바로 실명 보도가 허용됐습니다. 만약에 외교안보 쪽 담당자가 '백백블'을 자주 연다면 새로운 브리핑 시스템을 시작한 이유가 뭐냐는 항의를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대변인과 기자들의 문답 공개는 정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웬만하면 국민들에게도 알리는 게 좋다는 이 대통령의 철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전 정부에서는 국무회의도 대통령의 모두발언 이후 비공개로 전환됐었는데, "국무회의를 공개하지 못할 이유가 있느냐"는 이 대통령의 결정 덕분에 지금은 다 공개되고 있습니다.
국민 모두가 투명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입니다. 벌써 대변인의 건강이 걱정된다든가, 어떤 기자가 사소한 질문 하나 했다가 커뮤니티에서 조리돌림 당하고 있다더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하지만 대통령실도 기자들도 용기를 내서 시작하는 일인 만큼 새 시스템이 잘 자리잡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