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난민법에 따라 '인도적 체류' 지위를 부여받은 난민들이 있다. 이들은 더 나은 삶을 꿈꾸며 국경을 넘었지만, 아무리 오랜 시간 한국에 머물러도 가족을 초청할 수 없다. 현행법상 인도적 체류자에게는 가족 초청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삶의 행복은 이들에게는 여전히 멀게만 느껴진다. 2025년 세계 난민의 날을 맞아, 한국 사회에 정주하고 있는 인도적 체류 난민들의 가족분리로 인한 고통과 가족결합에 대한 희망을 담은 글 네 편을 연속으로 기고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진 채 흘러가는 아프고 안타까운 시간들을 독자들이 함께 공감해주기를 바란다.
저는 2014년에 예멘에서 한국으로 온 무한네드(가명)입니다. 그해 이후로 아내와 네 명의 아이들과 떨어져 살고 있습니다. 저의 유일한 목표이자 꿈은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하는 평범한 가족생활입니다. 가족과 함께 살면서 행복을 느끼지 못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하는 것이 유일한 꿈인 저와 같은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까요.
가족들과의 헤어짐... 예멘에 남은 가족들의 피난
아랍의 봄이 중동 전역으로 확산되고 예멘의 정권이 약화되면서 사회적 불안이 폭발했습니다. 인권 침해와 광범위한 혼란이 뒤따랐습니다. 여러 파벌들이 등장하고 반대 세력으로 여겨지는 주요인사들이 폭력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부족의 셰이크(부족의 장)였고, 저희는 지역 사회에서 영향력 있고 존경받는 가문이었습니다. 아버지와 남동생은 명확한 정파적 입장이 없었음에도 특정 세력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불법 체포되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저는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안전한 곳으로 즉시 피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2014년 6월, 저는 터키를 거쳐 한국으로 향했습니다.
가족들을 두고 떠나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우리 가족이 함께 사는 것이 이렇게까지 어려워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매우 급박하게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고, 아내와 자녀들은 여권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제가 떠난 후, 아내는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고 체포 위협에 시달리며 저에 대한 정보를 말할 것을 강요 받았습니다. 예멘 지역은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서 혹시라도 자녀들이 휩쓸리게 되는 건 아닐지 걱정도 되었습니다.
저는 아내와 아이들을 피신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19년, 가족들을 예멘에서 말레이시아로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말레이시아를 가족들의 피난처로 선택한 이유는 예멘 사람들이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고, 제가 있는 한국에서 비교적 가깝기 때문이었습니다. 말레이시아로 오는 과정도 쉽지 않았습니다. 가족의 거주지가 아덴 공항에서 세 시간 거리지만 혹시 모를 억류조치를 피하기 위해 이틀이 걸리는 세이원 공항을 이용해야 했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 5년 만에 다시 만난 가족들
2019년 가족들이 말레이시아에 온 이후, 코로나 기간 2년을 제외하고는 그나마 매년 한 차례씩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5년 만에 만난 가족들의 모습은 많이 변해있었습니다. 첫째 딸은 제가 예멘을 떠날 때 9살이었고, 말레이시아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14살이었으며, 지금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제가 예멘을 떠날 때 4살이던 막내는 말레이시아에서 다시 만났을 때 9살이었으며, 지금은 15살입니다. 저는 제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함께 하지 못 한 것에 대해 매우 슬프고 미안합니다.
가족이 말레이시아로 피난한 이후로 매년 그들을 만나러 갈 때마다 아이들의 모습은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외모도, 나를 대하는 태도도 점점 거리감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저의 아이들에 대해 잘 모른다고 느낄 때마다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내가 대체 무엇을 잘못한 것인가 하는 후회도 밀려옵니다. 큰딸은 2년 전인 2023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당시 큰딸이 전화로, 왜 고등학교 졸업식에 아빠가 오지 못 하냐고 울었습니다. 지금도 그때가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우리 가족들이 서로 떨어져 사는 이 상황이 도대체 무엇인가, 뭔가 많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째 딸의 성적표최근 학교 기말시험에서 전체 4등을 한 둘째 딸의 성적 ⓒ 무한네드, 난민가족결합연구팀
말레이시아에서 임시체류자로 사는 가족들의 불안한 미래
우리 가족은 말레이시아에서 임시 거주증으로 있는 것이고, 신분증명은 유엔난민기구(UNHCR)의 난민카드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엔난민기구 난민카드만으로는 말레이시아에서 고등교육 및 취업이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분야에서 유엔난민기구 난민카드를 인정해주지 않으며 대학도 마찬가지입니다.
큰딸은 고등학교를 2등으로 졸업해서 이런 제한에도 불구하고 장학금을 제공하겠다는 대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딸은 대학교에 입학하지 못 했습니다. 여권을 제출하지 못 해 신분증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시스템과 달리, 말레이시아에서는 예멘 대사관을 통해 말레이시아 정부의 임시거주 허가를 받게 되는데, 그때마다 여권을 예멘 대사관에 제출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권을 언제 돌려받을지, 돌려받을 수 있을지 알지 못 합니다. 한번은 여권을 돌려받는데 3개월이 걸렸고, 이후에는 5개월, 지난해에는 무려 7개월이 소요되었습니다. 여권을 돌려받았을 때는 이미 대학 등록기간이 끝난 후였습니다. 큰딸은 올해도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을지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저의 부인 역시 아이들을 키우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특히나 아들들의 성장은 부인 혼자 감당하기에 버겁습니다. 아들들이 사춘기를 겪을 때는 버팀목이 되어 줄 아버지의 역할이 절실합니다. 그런 때에 남편이자 아버지인 제가 곁에 없다는 사실에 아내는 큰 부담과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잠깐 머물지만, 함께할 수 없는 가족들
저는 현재 그나마 매년 가족을 볼 수 있는 점에 안도합니다. 이전 직장은 여름 휴가 2주 외에는 별도의 휴가가 없어 가족들을 짧게 만나고 와야 했지만, 지금 직장은 나의 상황을 이해해주고 일 년에 한 달 정도의 휴가를 줍니다. 일은 힘들지만 한 달 동안 가족을 만나고 와도 직장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올해 4월에는 회사의 배려로 한 달간 가족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말레이시아에 가족들을 만나러 갈 때는 매우 흥분되고 행복합니다. 하지만 모든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그들을 남겨두고 홀로 한국에 돌아와야 할 때는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이 기분은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한국에 오면 거의 2주 동안 큰 상실감과 우울감에 시달리지만, 한국의 삶이 너무 빠르게 돌아가서 정신 없이 적응하는 기분입니다.

▲영상통화를 통한 가족들과의 만남핸드폰 화면으로 연결되는 가족들 ⓒ 무한네드, 난민가족결합연구팀
가족들과 함께하는 삶을 꿈꾼다
저는 매일 일을 끝내고 기숙사로 돌아올 때마다 문을 열면 가족들이 있는 것을 상상하곤 합니다. 그래서 기숙사에 도착하면 모든 가족들에게 전화를 합니다. 그렇게 부인과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통화하다 보면 세 시간이 훌쩍 지나갑니다. 그렇게나마 가족들과 함께 있음을 느끼면서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저는 가족들과 함께 온전히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곳이 어디인지는 알지 못 합니다. 고향인 예멘은 아직도 전쟁 중이고 말레이시아에서 가족들은 임시 체류자일 뿐입니다. 저에게 체류자격과 직장이 있는 한국으로 가족들을 데려오고 싶지만 한국의 난민법은 이를 허용해 주지 않습니다. 말레이시아의 한국대사관은 말레이시아에 임시 체류중인 예멘 사람들의 비자 업무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집트의 한국대사관을 통해 가족들의 비자를 신청해봤지만 거절당했고, 그에 대한 이유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가족들을 초청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지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 광활한 지구 어딘가에 가족과 함께 안전하게 살아가고 싶다는 평범한 꿈을 이해해줄 인류애는 존재하지 않는 걸까요.
덧붙이는 글 | 본 글은 인도적 체류 난민 무한네드(가명) 씨가 작성한 원고를 바탕으로, 난민가족결합연구팀에서 추가 인터뷰를 통해 보완·편집하였습니다. 편집 박정형 (한국이주인권센터, 난민가족결합연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