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를 찾은 국민의힘 김용태 비상대책위원장이 모두발언을 하면서 4.3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드러냈다. ⓒ 제주의소리
국민의힘 김용태 비상대책위원장이 '남로당의 총파업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발언을 계속해 왜곡된 시선으로 제주4.3을 봤다.
경기 포천시 가평군을 지역구로 하는 김용태 위원장은 대선 패배 이후 처음으로 21일 제주를 방문, 오전 11시20분께 국민의힘 제주도당에서 진행된 기자간담회를 자리에서 제주4.3의 완전한 해결과 제주 미래 발전 산업 육성, 상급종합병원 지정 등 의료망 구축, 차질 없는 제주 제2공항 추진 등을 언급했다.
"야당이라 할지라도 국민에게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제주 관련 현안을 얘기하는 과정에서 김 위원장은 4.3에 대한 무지함을 드러냈다.
모두발언에서 김 위원장은 "4.3에 대한 보수적 시각과 진보적 시각이 대립된 부분이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념 대립 속에 제주 주민들의 삶이 처참하게 희생당한 것"이라며 운을 뗐다.
그러면서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남로당 총파업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만명의 무고한 제주 주민을 잔혹하게 희생시켰다"고 말했다.
실언 가능성을 생각해 '남로당의 총파업이라고 표현한 게 맞느냐'는 추가 질의에도 김 위원장은 "과거 4.3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단독 선거를 반대하는 남로당의 파업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생각한다"며 보수적 시각을 언급하면서 실언이 아니라고 했다.
4.3 때 남로당 총파업은 없었을뿐더러 3.10 민·관 총파업을 얘기한 것이라면 논란은 더욱 커진다.

▲왼쪽부터 국민의힘 제주도당 고기철 서귀포시당협위원장, 김승욱 제주도당위원장, 김용태 비대위원장, 고광철 제주시갑당협위원장. ⓒ 제주의소리
1947년 3월1일 제주 관덕정 앞 '3.1절 기념대회'에서 벌어진 경찰의 발포가 4.3의 시발점이다. 1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3.1절 기념대회 발포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도민사회의 목소리가 커졌고, 이는 1947년 3월10일 민·관 총파업으로 번졌다.
제주도청과 각 군·읍·면사무소, 학교, 우체국, 운수회사, 은행을 비롯해 심지어 경찰과 미군정 소속 국민까지 참여한 총파업은 당시 도내 관공서 직원의 약 95%가 참여하는 대규모로 진행됐다. 친일 경찰의 반발심 등을 이유로 파업 규모가 컸고, 참여자들은 좌·우익을 가리지 않았다는 당시 미군정의 자체 보고서도 존재한다.
1차산업 비중이 매우 높은 시대 상황 속에서도 농민마저 밭을 일구는 작업까지 멈추면서 당시 전체 제주도민의 80% 이상이 파업했다.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익색채를 갖고 있다"는 지레짐작에 불과한 경무부 보고에 동조한 이승만 정부는 제주를 '붉은 섬'으로 규정하면서 대규모 초토화 작전을 벌였고, 1954년 9월까지 7년 6개월이란 세월동안 당시 제주도민의 1/10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제주4.3이다.
이승만 정권과 응원경찰, 서북청년단 등은 '제주도민=빨갱이'라는 시각으로 잔혹한 일을 일삼았고, 민주화 이후 4.3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뤄지기 전까지 도민들을 가장 많이 괴롭힌 단어가 '빨갱이'다.
3.10총파업을 '남로당 총파업'이라고 표현한 김 위원장의 발언은 아픈 도민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격이다.
그러면서 김 위원장은 "4.3을 단순히 공산주의 폭동이라고 말한다면 제주도민과 아픔을 함께하는 국민들에게 다시한번 상처를 입히게 되는 것"이라며 "대한민국은 독립정신으로 나라를 세웠고, 호국정신으로 나라는 지켰으며 산업화와 민주화로 나라를 발전시켜 왔다. 이 과정에서 많은 분들의 희생과 상처가 있었고, 그러한 아픔을 서로 배려하고 치유함으로써 진정한 국민통합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비록 야당이지만, 국민에게 한 약속만큼은 지키겠다. 4.3의 완전한 해결은 미룰 수 없는 국가 과제다. 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와 전문요양병원 건립, 유족에 대한 의료 지원과 복지시스템 확충 등 실질적인 치유와 회복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과거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이날 제주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를 돌면서 지역 현안을 듣는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