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분 뇌가 부어서 두개골을 잘라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의사의 말에 저는 온 세상이 멍한 나머지 눈물조차 나지 않더군요. 수술을 받은 제 신랑은 한동안 깨어나지 못했고, 그동안 저는 병원의 긴 복도를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어요.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거든요.
신랑이 깨어날 수 있을까? 날 알아볼 수는 있을까? 불안함에 지쳐 병실로 향할 때면, 어느새 깨어난 신랑이 조용히 책을 읽고 있을 것만 같았죠."
지난 21일 서울 중구 삼일로창고극장에서 연극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이 열렸다. 해당 연극은 지난 6월 14일부터 22일까지 진행된 '2025 대한민국치유예술제'의 일환으로, 일반인들이 자신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연기한 자전 공연이었다.

▲연극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의 한 장면. ⓒ 김민솔
사연의 주인공도 연극을 봤다. 아내의 연기를 현장에서 본 장명철(71)씨는 "사실 저희 부부 사이에 대화가 적은 편이라, 수술하고 열흘 뒤에 깨어난 후에도 당시 아내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전혀 듣지 못했다. 연극이 아내를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치유예술제를 주최한 '한국임상연극심리치료협회'의 대표 김영미 교수(연극치료전공)는 "자전 공연을 통해 배우는 자신의 아픈 기억을 직시하고 이를 극으로 풀어냄으로써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고, 주변인은 배우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관객은 타인의 시련을 간접 경험해 스스로의 삶도 돌아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임상연극심리치료협회 대표 김영미 ⓒ 김민솔
올해로 5회 차를 맞이한 대한민국치유예술제는 힘겨운 감정을 해소하려면 이를 회피하지 말고 직시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됐다. 고통스러운 경험을 다뤄 행위자와 관객 모두의 감정을 자극해 치유하는 것을 목표로 연극과 무용, 음악 등 다양한 예술 장르를 다룬다.
2025 대한민국치유예술제 운영을 담당한 김영미 교수는 오늘날 가족 해체 양상을 우려해 이번 예술제의 슬로건을 <가족, 마음으로 잇다>로 정했다.
"오늘날 가족의 규모가 축소되고 심지어 해체되고 있어요. 1년에 9만 쌍이 헤어지고, 1인 가구는 800만에 육박해요. 이런 가운데 예술이 할 수 있는 건 가족의 사랑을 되짚는 거예요. 가족끼리는 너무 가까운 탓에 사랑하면서도 상처주기 마련이죠. 가족의 사랑을 되짚기 위해 우선 대화의 물꼬를 틔워야 해요."
올해 치유예술제는 가족 간의 대화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가족치유캠프'를 진행했다. 커다란 전지 위에 가족 중 한 명이 누우면, 다른 가족들이 몸의 윤곽을 따라 선을 긋는다. 이후 선 안쪽에 가족의 특징을 적고, 바쁜 일상 속 차마 공유하지 못한 생각과 감정을 솔직히 써 내려간다. 사뭇 진지한 분위기에 어색해하던 가족들은 차차 진솔한 대화를 이어나간다. 치유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연극이 지닌 치유의 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작품의 한 장면. ⓒ 김민솔
치유예술제의 꽃은 '치유연극'이다. 치유연극은 연극을 치료 수단으로 활용하는 예술 활동으로, 배우와 관객이 각자 묵은 감정을 해소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함과 동시에 자아성찰을 하도록 극이 구성된다.
배우의 실제 경험을 소재로 하는 자전 공연은 배우 쪽의 치유 효과가 크고, 관객참여형 연극은 관객 쪽의 치유 효과가 크다. 관객참여형 연극에선 관객의 사연을 들은 배우들이 즉흥 연기를 선보인다.
관객은 줄곧 자신의 마음을 무겁게 한 아픈 기억을 한 발짝 떨어져 관찰함으로써,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일어났던 일을 '있는 그대로' 마주한다.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순간이 바로 치유의 출발점이 된다. '나'와 감정 사이에 거리를 두는 불교의 마음챙김 훈련과도 비슷하다.
배우들은 관객의 사연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을 넘어 각색을 통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김 교수의 말이다.
"인간관계에 지쳐 다니던 대학원을 휴학하고 공황장애 약을 먹던 청년이, 관객참여형 치유연극을 본 후에 약을 끊고 복학한 사례가 있어요. 자신을 괴롭게 한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배우가 대신 해준 게 큰 힘이 됐다고 하더군요. 혼자 힘으로 스스로를 돌보기는 쉽지 않아요. 치유연극이 그 발판을 마련해주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작품의 한 장면. ⓒ 김민솔
치유예술제에는 예술인은 물론 일반인도 배우로 참가할 수 있다. 김 교수는 작년에 일반인부와 예술인부의 참가 비율이 비등했는데, 올해는 8팀 중 일반인부가 2팀밖에 없어 아쉽다며 말을 이었다.
"치유예술제는 예술인만의 축제가 아니에요. 일반인도 배우로 참가할 수 있고 그러길 바라요. 예술을 향유하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을 수 있지만, 예술의 주체로서 내 삶을 돌아보는 것은 보다 능동적인 치유 과정이에요.
2025 대한민국치유예술제의 작품상은 일반인부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이 받았다. 김 교수는 22일 폐회식에서 "예술인부의 훌륭한 작품이 많았지만, 치유예술제의 성격에 가장 잘 어울리는 '따뜻한세상 사회적협동조합'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이 작품상을 받았다"고 했다.

▲ 2025 대한민국치유예술제 포스터 & 삼일로창고극장 ⓒ 김민솔
바쁜 일상에 치이는 현대인들은 상처 입은 스스로를 돌볼 여유조차 없다. 상처를 방치하면 곪기 마련이다. 김 교수 역시 이 말에 힘을 싣는다.
"요즘엔 먹고살기 바빠 감정을 꾹 누르고 사는 사람이 많아요. 마음의 상처를 제때 다루지 못하면 상처가 곪아 결핍이 될 수 있고 결핍은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기 마련이죠. 반면 건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까지 건강하게 하는 힘이 있어요. 건강해진 개인이 다른 사람을 돕는 선순환을 통해 우리 사회 전반이 건강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치유예술제의 궁극적인 목표예요."
삼일로창고극장의 최수진 극장운영실장은 "다양한 축제에 대관 지원을 해왔지만, 치유예술제는 그 의미가 더 깊다"며 "단순한 문화예술활동을 넘어 우리 사회 전반에 치유의 필요성을 상기시키고, 일반인을 예술의 주체로 끌어올리는 활동에 기여하게 돼 영광"이라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