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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위산사에서 출가해 현재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한국을 오가며 선 명상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몸이 곧 나라고 생각하면, 늙는 것이 슬프고, 아프면 괴롭고, 남보다 뒤처지면 위축됩니다. 이건 그냥 흔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건 지금 이 글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현실입니다. 특히 요즘처럼 스마트폰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고, 소셜미디어와 유튜브에 익숙한 시대에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적인 이미지들을 계속 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지고, 나도 모르게 내 몸에 대한 불만이 자랍니다. 아닌가요?
우리는 대부분 이 몸을 '나'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 몸이 조금만 아프거나 늙거나 기대에 못 미치면, 마음까지 무너집니다. 그래서 서양의 명상가들은 종종 "내 몸은 나의 성전이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요즘 시대에는 자기 몸을 소중히 돌보자는 의미로 이 말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죠. 겉으로 보기엔 긍정적인 말입니다.
하지만 선명상의 눈으로 보면, 이 개념은 수행의 방향과는 정반대입니다. 몸을 숭배하면 할수록, 그 몸이 늙고 병들고 무너질 때 더 큰 고통이 따라옵니다. '내 몸'이라는 생각이 굳어질수록, '나'라는 집착도 강해지고, 결국 그것이 번뇌의 뿌리가 됩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몸은 흙·물·불·바람, 즉 지수화풍 네 가지 요소가 잠시 모인 것일 뿐이고, 머지않아 흩어질 것이라고. 그러니 '내 몸'이라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집착임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몸을 가꾸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몸에 대한 착각에서 벗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수행자는 몸을 필요 이상으로 소홀히 하지도 않지만, 그것을 '나의 성전'처럼 숭상하지도 않습니다.
몸은 그저 잠시 모인 조합일 뿐이고, 우리는 그 덩어리에 '나'라는 이름을 붙이고 애착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 애착이 무너질 때, 우리는 진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불경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행자 아난다를 본 한 여인이 첫눈에 반했습니다. 그녀는 "그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며 부처님께 호소합니다. 부처님은 묻습니다. "무엇 때문에 아난다가 좋으냐?" 그녀는 그의 눈, 코, 입술 같은 외모를 꼽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그것들을 떼어 줄 테니 가져가거라." 그녀는 곧 말합니다. "그건 아난다가 아니에요."
이 일화는 단순한 로맨스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대상조차, 사실은 우리 마음이 그려낸 상(想)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눈앞의 몸을 진짜라고 여기지만, 그 몸도 결국은 부서지고 사라지며, 마음에 남는 건 그 사람이 아니라, 그에 대한 이미지일 뿐입니다.
이 가르침은 차가운 논리가 아닙니다. 고통의 원인을 정확히 꿰뚫는 부처님의 자비입니다. 몸에 대한 집착을 놓을수록, 우리는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에서도 더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 자유가 바로 선이 말하는 해탈입니다.
몸을 잘 돌보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 몸이 '진짜 나'라는 착각은 반드시 내려놓아야 합니다. 아름다움도, 젊음도, 체력도 결국은 무너집니다. 그러나 선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선을 지키는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진실한 수행은 몸을 넘어서서, 마음까지도 넘어서서, 그 너머를 향해 갑니다.

▲몸에 대한 집착몸이 곧 나라고 생각하면, 늙는 것이 슬프고, 아프면 괴롭고, 남보다 뒤처지면 위축됩니다. 이건 그냥 흔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건 지금 이 글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현실입니다. 특히 요즘처럼 스마트폰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고, 소셜미디어와 유튜브에 익숙한 시대에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적인 이미지들을 계속 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지고, 나도 모르게 내 몸에 대한 불만이 자랍니다. ⓒ 현안스님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