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시즌 KBO리그 단독 1위(6월 26일 기준)에 오르는 등 매서운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프로야구팀 한화 이글스가 연일 화제입니다. 이 기사는 주변 한화 팬들의 경험과 사연을 종합해 가상의 인물인 '한보살'씨와 아들 '한이글'군의 이야기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5월 25일 한화 이글스가 21경기 연속 홈 경기 매진을 기록한 가운데, 대전 한화생명 볼파크에 경기를 보러 온 야구팬들이 가득하다. ⓒ 연합뉴스
열혈 야구팬 한보살씨(가명)에게 인생은 오렌지색이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처음 찾았던 대전 한밭야구장에서 빙그레 이글스의 탄생을 지켜보며 야구와의 운명적인 인연이 시작됐다. 어느덧 중년을 넘긴 지금은 아들과 함께 종종 이글스파크를 찾으며 한화의 비상을 응원한다.
아구광이던 아버지 때문에 뭣 모르고 따라간 첫 직관은 신세계였다. TV에서만 보던 경기장, 선수단, 관중들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선수들이 가까이 보이는 1루 내야석에서 경기를 관전하다가 친근한 마음에 좋아하는 선수의 이름을 부르면, 몇몇 선수는 돌아서서 귀엽다는 듯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기도 했다.
당시 야구장은 지금과 달리 오로지 강한 자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동물의 왕국'이었다.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만취한 사람들, 록커 뺨치는 목청을 자랑하며 소리를 질러대던 사람들, 흥분하면 그물을 타고 경기장을 오르내리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던져대는 아저씨들을 바라보면서, 어린 보살씨는 진정한 야구팬으로 살아남기 위한 야생의 멘탈을 키워나갔다.
잊을 수 없는 1999년
'노잼시티'라고 놀림 받던 대전의 토박이인 보살씨에게 이글스는 단순한 야구단을 넘어, 도시의 희로애락을 함께 짊어진 운명 공동체이자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한 동반자였다. 1992년 장종훈의 단일시즌 41홈런, 1996년 구대성의 사상 첫 구원투수 출신 MVP, 송진우의 통산 210승 달성, 2006년 '괴물' 류현진의 신인왕·MVP 동시 석권 등, 한국 야구사를 빛낸 레전드와 명장면을 대거 배출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보살씨도 소년에서 청년, 어른으로 성장해나갔다.
1986년 창단한 빙그레는 창단 3년 만에 처음 가을야구 무대를 밟는 등 빠르게 프로야구 강팀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영광의 길은 멀고 험했다.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의 빙그레는 막강한 '투수왕국'에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구축해 정규리그의 강자로 군림하면서도, 정작 가을야구에만 올라가면 작아지기 일쑤였다.
특히 한국시리즈에서만 무려 3번이나 이글스의 앞을 가로막던 해태 타이거즈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1위로 직행한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마침내 해태는 피했으나, 이번엔 3위였던 롯데 자이언츠에게 덜미를 잡히게 되자 보살씨는 아쉬운 마음에 펑펑 눈물까지 흘렸다.
'만년 준우승팀'이라는 쓰라린 꼬리표를 마침내 씻어낸 것은 1999년의 가을이었다. 20세기의 마지막 해, IMF 외환위기의 어두운 그림자가 대한민국을 뒤덮은 그 시절, 이글스는 마치 그 고통을 위로하려는 듯 기적 같은 우승을 일궈냈다. 창단 이후 14년, 한화로 팀명이 바뀐 지 6년 만이었다. 공교롭게도 상대는 7년 전 이글스의 우승을 가로막았던 롯데 자이언츠였다.

▲1986년 대전지역 빙그레이글스(한화 이글스 전신) 창단식 모습 ⓒ 한화이글스 홈페이지

▲1999년 10월 26일 대전 한밭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한화와 롯데의 경기에서 6회말 외야플라이로 역전타점을 올린 한화 장종훈 선수가 홈에서 팀 동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아직도 1999년 한국시리즈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당시 구대성은 한국시리즈 5경기에서 1승 1패, 3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이끌고 MVP까지 선정됐다. 정민철은 1, 4차전에 등판해 두 번 모두 선발승을 따냈고 장종훈은 이글스가 승리한 4승 중 3경기에서 결승타를 혼자 책임지며 타선을 이끌었다. 꿈에 그리던 이글스의 우승이 확정된 순간, 잠실야구장 현장을 찾은 보살씨는 이번엔 감동의 눈물을 펑펑 흘리며 다른 팬들과 함께 부둥켜안았다.
그 무렵 아들 이글(가명)이 태어났다. 보살씨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들 역시 이글스 팬이 될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였다. 그는 언젠가 아들과 함께 손을 잡고 이글스의 두 번째 우승 순간을 다시 한번 함께 하겠다는 소망을 가지게 됐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특별했던 1999년의 환희가 그로부터 20여 년이 훌쩍 넘도록 찾아오지 않을 줄은.
왜 맨날 지는데 '행복하다'고 해요?
"대전 엑스포와 한화 이글스의 공통점은? 20세기 유산"
"대전과 한화 야구의 공통점은? 볼 것이 없다"
그가 애정하는 팀이 자조섞인 유머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어느덧 야구를 이해할 정도로 성장한 아들이 이글스의 경기를 TV로 지켜보다가 문득 뼈아픈 질문을 던진 순간을 잊지 못한다.
"아빠, 한화는 왜 저렇게 야구를 못해요? 그리고 팬들은 왜 맨날 지는데도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친구들이 그러는데 한화 팬들은 다 '보살'이래요."
잠시 말문이 막힌 보살씨는 "괜찮여, 야구란 게 원래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겨. 쬐끔만 더 기다려 봐" 하고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느덧 중년이 된 보살씨는 선수단의 연령대가 자신의 나이와 비슷해졌다는 것을 느끼면서 뭔가 잘못돼 가고 있다는 불안감이 강하게 솟구쳤다. 과거의 영광을 이끌던 선수들은 하나둘 나이를 먹어가는데, 이글스는 새로운 유망주들을 키울 만한 변변한 2군 구장도 없던 시절이었다.
2008년 이글스가 4년 만에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했다. 이듬해에는 창단 최초로 단일시즌 체제에서 꼴찌를 기록했다. 그리고 2012년에는 에이스 류현진마저 태평양을 건너 메이저리그로 떠났다. 한 시대의 종언과 함께 본격적인 암흑기의 서막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미국 메이저리그 진출 전 류현진(자료사진) ⓒ 연합뉴스
잔혹한 세월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이글스는 2008년부터 2017년까지 무려 10년 연속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했다. 한국야구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는 '삼김'(김응용, 김성근, 김인식)이 모두 이글스를 거쳐갔지만 누구도 독수리 군단을 구원해내지 못했다.
2018년 한용덕 감독 체제에서 3위로 오랜만에 가을야구 무대를 밟으며 반등하는 듯했지만 잠깐이었다. 2019년부터 2024년까지 이글스는 또다시 6년 연속 가을야구 진출이 좌절됐다. 15년간 꼴찌만 무려 8번이나 기록하며 '꼴칰(꼴찌+독수리)'라는 오명까지 생겨났다. 연고지 출신(한대화), 구단 레전드(한용덕), 외국인 감독(수베로)까지 온갖 카드를 다 꺼내봤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2010년대 보살씨의 가장 간절한 소원은 매년 구입한 새 이글스 점퍼를 가을에도 입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봄철인 시즌 개막 초반을 제외하면 점퍼를 입을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당시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삼성이나 두산 팬들이 이글스 점퍼를 입은 그를 어딘지 안쓰러운 듯 바라보던 연민과 동정의 눈빛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2020년에는 프로 원년 삼미 슈퍼스타즈가 기록한 KBO 리그 최다 연패 기록인 '18연패'와 타이기록을 수립하면서 공중파 뉴스에까지 언급될 만큼 전 국민의 조롱과 동정을 동시에 받기도 했다. 코로나19 펜데믹 시절이라 무관중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 우리는 '보살'이다
2020년 6월 14일은 보살씨에게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만큼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당시 이글스는 두산 베어스를 꺾고 마침내 18연패를 탈출했다. 무관중 경기여서 야구장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몇몇 팬들과 함께 대전 구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보문산 전망대를 찾아 깃발을 흔들며 마치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 장군의 심정으로 절실한 응원을 보냈다. 9회말 투아웃에 노태형의 끝내기 안타로 악몽같은 18연패를 탈출하는 순간, 보살씨도 선수들처럼 기쁨의 눈물을 쏟아냈다.
코로나 팬데믹이 해제되고 다시 야구장의 문이 개방되자, 보살씨는 변함없이 경기장을 찾았다. "맨날 지기만 하는 팀을 무슨 보람이 있다고 그렇게 응원하고 다니냐"는 아내와 일부 지인들의 핀잔도 그의 야구 사랑을 막지는 못했다. 그렇게 많은 이글스 팬들은 '보살'이라는 정체성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성적이 바닥을 기어도, 비아냥이 계속돼도, 이글스 팬들의 충성심은 오히려 단단해졌다. 그런데 성적이 잘나오던 1980-1990년대에도 인기 구단과는 거리가 멀던 이글스가, 정작 만년 꼴찌로 이슈가 되면서 화제성이 더 높아지고 팬덤이 결집하는 반전 효과가 일어났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평생을 살면서 성공보다 실패를 더 많이 경험한다. 보살씨 역시 약팀이 된 이글스와 자신의 경험을 동일시하면서 실패를 딛고 다시 성공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더욱 간절히 응원하게 됐다.

▲5월 6일 대전 한화생명볼파크에서 열린 프로야구 2025 신한 SOL뱅크 KBO리그 삼성 라이온즈와 한화 이글스의 경기. 한화가 삼성을 상대로 3:1로 8연승을 확정지은 뒤 한화 팬들이 기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아이러니하게도 이길 거라는 기대가 낮은 만큼 '1점'과 '1승'의 가치가 더 간절하다는 것이 오히려 한화 야구의 매력이 됐다. 이글스가 불리한 상황에 몰린 경기 종반이 될수록, '최강 한화' 구호와 '나는 행복합니다' 노래를 열창하는 팬들의 응원은 더욱 뜨거워진다.
패색이 짙어진 9회 말에도 "그래도 오늘은 (문)동주와 (노)시환이가 잘했지? 내일은 이길겨", "진다고 화내는 자는 삼류다. 져도 참는자는 이류다. 져도 웃을 수 있는 우리가 일류"라며 희망을 기약하는 대화는 그들만의 의식이 됐다. 지고 있어도 좌절하지 않는 의연함, 현실이 아무리 암울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자부심은, 오히려 고난을 겪을수록 이글스 팬들을 더욱 끈끈하게 뭉치게 했다.
천만 관중 시대를 맞이해 야구를 즐기는 팬들의 응원문화도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음주, 욕설, 폭력이 난무하던 동물의 왕국은 이제 사라지고, 여성과 가족 팬들이 늘어나며 남녀노소 승패를 떠나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의 장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프로야구 흥행 돌풍의 중심에 이글스 팬들의 역할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리고 2025년의 여름, 50대가 된 보살씨는 오늘도 이글스의 경기를 TV 중계로 지켜보고 있다. 몇 년간의 암흑기를 견뎌낸 이글스는 김경문 감독 체제에서 최근 심상치 않은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다.
전반기가 반환점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이글스가 순위표 꼭대기인 '1위'라는 자리에 올라있는 모습은 너무 오랜만에 겪어보는 낯선 경험이다. 특히 5월 17일 대전 SSG전에서 코디 폰세가 8이닝 동안 18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1991년 선동열의 기록과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은 큰 전율을 안겼다. 오랜 시행착오를 거친 기나긴 육성과 투자가 마침내 이제야 조금씩 결실을 나타내고 있는 모습이다.
한화 팬에게 야구란
어느덧 보살씨가 응원하던 이글스 선수들은, 아저씨-형님-동생을 넘어 대부분 아들뻘이 됐다. 문동주과 김서현의 강속구가 미트를 찢을 듯 파고들고, 노시환과 문현빈의 호쾌한 스윙이 그라운드를 가르고, 어느덧 베테랑이 돼 메이저리그에서 돌아온 류현진의 역투 등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는다. 그의 입가에 '아버지 미소'가 번진다.
아들은 어느덧 20대 중반의 성인이 돼 틈만 나면 올해 새로 개장한 대전한화생명볼파크는 찾으며 대를 이은 이글스 팬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1999년 우승의 감동을 아들뿐만 아니라 현 세대 선수들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언젠가 찾아오기를 응원하고 있다.
그게 올해가 꼭 아닐 수도 있다. 보살씨와 같은 팬들이 이글스를 응원하는 건 꼭 성적 때문이 아니다. 이글스가 올해 잘하는 것은 기쁘지만, 이글스 팬들은 벌써 우승을 운운하는 '설레발'에 크게 들뜨지 않는다. 어차피 팬들에게 이글스와 야구란 승패를 초월한 '인생의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이글스의 내일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야구는 계속되고, 함께하는 팬들의 오렌지빛 인생 또한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오늘 지면 어떡하냐고요? 괜찮아유, 내일 이기면 되쥬~"

▲한화 이글스 노시환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