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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안다는 것
사람을 안다는 것 ⓒ 웅진지식하우스

정치는 사람을 다루는 일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의 고통과 삶, 기대와 분노를 제도와 말, 결정과 법으로 연결하는 기술이다. 그렇다면 정치의 출발점은 결국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정치, 특히 2023년 헌정사상 초유의 탄핵 사태 이후에도 반성과 변화 없이 돌아가는 국민의힘의 모습을 보면, '사람을 안다'는 감각이 정치권에서는 사라진 문장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생각이 깊어질 즈음, 만난 책이 바로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의 <사람을 안다는 것(The Road to Character)>이다.

사람을 안다는 것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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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과 발달이론, 관계론, 신학과 윤리, 실존적 고통에 대한 통찰을 담은 이 책은 단순한 '사람 보는 기술'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 듣고, 기다리고,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윤리적 성찰을 담고 있다.

브룩스는 말한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지나온 길, 그가 품은 질문, 그가 회피하는 고통의 그림자를 함께 보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권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말할 뿐이다. 말을 걸기 위한 말이 아니라, 말을 던지고 이기기 위한 말이 난무한다. 정치가 싸움이 된 이유는, 너무 많은 이들이 '말하려 하고', 너무 적은 이들이 '들으려 하기' 때문이다.

국민은 지금 '말 잘하는 정치'가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정치'를 원한다. 여야 모두 이 말 앞에 겸손해야겠지만, 특히 탄핵 이후에도 반성과 변화 없이 극우적 기류에 기대고 있는 국민의힘은 더욱 그렇다.

고통 이후 정치가 배워야 할 것

브룩스는 책의 12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통 이후에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은 2023년 12월 3일, 난데없는 비상계엄 선포와 이어진 대통령 탄핵이라는 격변의 정치사를 경험했다. 그것은 정치권, 특히 국민의힘에게 정치윤리적 반성과 전환의 계기가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기존의 정치 서사에만 갇힌 채, 반성도 없이 '기득권 프레임'만 반복하고 있다.

고통은 사람을 바꾼다. 적어도 고통을 회피하지 않은 사람은 달라진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대선 패배 이후에도 별다른 변화 없이, 국민의 뜻에서 멀어진 친윤세력들이 당을 장악한 채 버티기에 들어간 듯 보인다.

나는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국민의힘은 지금 국민을 보고 있는가, 국민의 고통, 분열, 상처를 듣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권력을 향한 자기 서사의 재구성에만 골몰하고 있는가?"

정치가 국민을 잃었을 때, 그 빈자리는 증오와 대결의 언어가 메운다. 그래서 정치가 진정으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국민을 아는 감각'이 반드시 필요하다. 누구나 '국민'을 입에 올리지만, 정작 그들의 삶과 고통,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정치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이 점은 여야를 막론하고 모든 정당이 깊이 숙고해야 할 문제다.

'일루미네이터'가 필요한 시대

브룩스는 책에서 '일루미네이터(Illuminator)'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타인을 이해하고, 그의 이야기가 말이 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사람. 그는 말보다 존재로 말하고, 정답보다 질문으로 관계를 이어간다. 반대 개념은 '디미니셔(Diminisher)'다. 모든 문제의 답을 혼자 알고 있다고 믿고, 타인의 의견을 묵살하는 유형이다.

대한민국 정치에는 '디미니셔'가 너무 많다. 정당마다 자신들만이 정답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며, 타인을 향한 경청과 존중을 외면한다. 국민의 고통보다 자신의 정치 생존이 우선이다.

나는 '일루미네이터'가 21세기 정치인의 새로운 이상형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정치는 더 이상 설득의 기술이 아니라, 국민의 고통이 말이 될 수 있도록 귀 기울이는 기술이어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 중 하나는 다음 문장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사람은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우리는 종종 정치에 환멸을 느끼며 "정치는 변하지 않아"라고 말하지만, 그 말 속엔 언제나 반대의 바람이 숨어 있다. 정치가 변할 수 있다는 믿음, 사람이 새로워질 수 있다는 희망, 공동체가 회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 믿음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정치가 국민을 다시 안다면, 정치는 회복될 것이다. 그 회복의 중심에는 국민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정치인, 일루미네이터 같은 유권자, 그리고 서로를 향한 조용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전환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정치는 흔들리고, 시민들은 지치고, 혐오의 언어는 일상의 배경이 되어버렸다.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 단순한 질문을 다시 꺼내야 한다.

'우리는 정말 서로를 알고 있는가?'

정치인이 국민을 알고, 정당이 고통의 실체를 알고, 시민이 서로를 환대하는 눈을 가질 때, 우리는 다시 '공동체'라는 이름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 회복의 첫 문장이다. 그리고 그 출발은 거창한 정책이 아니라, 조용히 들어주는 한 사람의 태도에서 시작된다.

사람을 안다는 것

데이비드 브룩스 (지은이), 이경식 (옮긴이), 웅진지식하우스(2024)


#일루미네이터#디미니셔#브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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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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