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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17 12:03최종 업데이트 25.06.18 10:43

1983년 6월 말, 김근태가 받은 은밀한 요청

[민청련두꺼비열전] 독재의 암흑을 밝힌 횃불 김근태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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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동지회에는 민청련 활동 중 정권으로부터 당한 폭압의 결과로 활동 중 혹은 그 이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많은 이들이 있다. 그 분들의 치열했던 삶의 흔적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민주항쟁 정신의 계승에 작으나마 보탬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민청련 두꺼비 열전]을 편찬한다.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 아닌, 무명의 헌신을 실천한 이들을 위주로 한다. 이름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헌신과 열정을 보여주는 삶의 스토리를 통해 민주항쟁의 정신을 기억하는 것이 목적이다.
김근태는 마침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맨 앞장에 서기로 결심했다. 1983년 7월 말, 민청련의 첫 의장직에 취임하는 것을 수락했다. 이로써 민청련 창립 여부를 판가름하는 최대 난제가 해결됐다. 그 결심은 민청련 동료들에게는 가뭄 끝의 단비와 같았다.

하지만 노동운동 현장의 동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매우 섭섭했다. 경신공업에서 노동조합 준비 모임을 함께 했던 현장 노동자들의 증언을 들어보자.

"저희들은 상당히 좀 당황했었죠. 그때 결정은 저희들이 이해하기는 좀 어려웠던 것 같아요. ... 그때 당시 노동조합 단일 사업장만이 아니라 노동자들끼리의 연대, 함께 모이는 전체적으로 하는 것들의 사업을 하셨던 걸로 제 기억은 그렇게 남아 있어요. 그런데 갑자기 간다고 하니까 그렇죠. 해고되고 난 이후에 '우리 함께 이렇게 노동운동을 하면서 같이 잘 끝까지 가보자'라고 하던 분이, 서울로 후배들이 필요로 하다고 그래서 간다는 걸로 구체적 설명 없이 하니까, 좀 당혹스러웠던 것 같고."

노동자들의 친구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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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공업은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제조업체였다. 한국의 첫 고유 모델 자동차인 포니 자동차에 전기배선 장치를 납품함으로써 사세 확장의 길에 들어선 유망한 중소기업이었다. 직공들은 20세 전후의 남성이 많았는데 근무 조건이나 급여 수준이 열악했다.

김근태는 몇 년 전부터 이 작업장에 주목했다. 그 결과 현장 노동자들을 규합하여 노동조합 설립을 준비하는 비공식 모임을 조직할 수 있었다. 이 모임은 매주 수요일에 정기적인 만남을 가졌기 때문에 수요모임이라고 불렸다. 멤버들은 회의를 진행하는 방법도 배웠고, 규칙을 정해서 회의록도 작성했다. 이 모임에서는 노동조합 결성과 운영에 관한 지식을 쌓았고, 그와 동시에 세상을 보는 안목을 기르는 공부도 했다. <노동의 역사>(광민사, 1979), <노동의 철학>(광민사, 1980), <경제사 입문>(백산서당, 1982) 등과 같은 소책자를 함께 읽고 토론했다. 김근태는 친절한 안내자였다. 중학교를 중퇴하거나 졸업하는 데에서 학업을 멈춘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이 프로그램은 노동자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한 공장에만 관심을 한정했던 것은 아니다. 김근태는 여러 공장 노동자들의 연대 모임도 만들었다. 인천을 비롯한 수도권 일대 노동운동의 단결을 도모하는 활동이었다. 노동운동 미래를 개척할 주춧돌이 될 터였다. 의의가 막중한 활동이었다.

이에 따라 김근태는 노동자 교육 활동에 열심이었다. '노동조합론'은 그의 단골 강의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예를 들면 1982년 7월 5일 과천 영보수녀원 피정의 집에서 열린, 원풍모방 노동조합 대의원 수련회 석상에서 행한 강의 기록이 남아 있다.

49명의 대의원을 앞에 두고서 김근태는 노동조합론을 강의했다. 수강생이 기록한 노트에 따르면, 그날 김근태는 노동자층의 역사적 형성, 노동조합의 법률적 정의, 1970년대 노동운동, 1981년 이후 민주노동조합에 대한 탄압, 민주노동조합의 대응 방법 등에 대해서 강의했다.

 1982년 7월 5일 원풍모방 노동조합 대의원 수련회, 김근태의 ‘노동조합론’ 강의 내용을 옮겨 적은 수강생의 필기
1982년 7월 5일 원풍모방 노동조합 대의원 수련회, 김근태의 ‘노동조합론’ 강의 내용을 옮겨 적은 수강생의 필기 ⓒ 민청련동지회

노동자들은 김근태에 대해 경계심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김근태가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계통의 노동조합 지원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 당시는 기독교계의 도시산업선교회와 천주교계의 가톨릭노동청년회 두 종교기관 외에는 노동운동에 관여하는 단체가 달리 눈에 띄지 않을 때였다.

김근태는 1980년부터 1983년까지 도시산업선교회 실무 간사로 일했다. 주로 노동조합 교육을 맡아 노동자들의 의식화를 담당했다. 노동자들은 김근태와 그의 산업선교회 동료인 김동완 목사, 조화순 목사, 김지선 등을 신뢰하고 있었다. '당대 가장 훌륭하신 분들'이고, 그런 분들과 함께 배우고 울고 웃는 자신들은 매우 운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김근태는 해고된 노동자들에게는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 함께 이렇게 노동운동을 하면서 끝까지 가보자고 힘을 북돋아 주었다. 노동운동의 가치와 보편적 의의에 대해서 설파하던 김근태였다. 그런 사람이 노동 현장을 떠난다니 매우 당혹스러웠다. 학생운동 후배들과 뭔가를 도모하는 것 같은데,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웠다.

민청련 의장 후보로 떠오른 김근태

김근태가 노동운동 현장을 떠나서, 민청련 설립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노동운동 동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까지 말이다.

민청련은 위험한 일이었다. 특히 그 의장에 취임하는 것은 더욱 그랬다. 민청련 창립을 준비하던 이들은 단체를 앞장서서 이끌 지도자를 누구로 세울 것인가로 고민했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였다. 결코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선 반독재 운동에 참여하는 청년층의 폭넓은 신망을 얻는 인물이어야 했다. 1960년대 중반 학번에서부터 1970년대 말 학번에 이르기까지 10여년간 배출된 각 대학의 학생운동 출신자 층이 두텁게 쌓여 있었다. 그들을 이끌어 갈 만한 실천적, 도덕적 자산을 갖추어야 했다. 또 하나는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민청련 의장은 전두환 정권의 폭압 통치에 반대하는 정치투쟁을 공개적으로 이끌어가는 직책이었다. 언제라도 체포, 수감될 각오를 해야만 감당할 수 있는 자리였다.

구속 1순위였다. 그뿐인가. 취조와 구금 중에 경찰과 정보기관원들로부터 야만적인 폭력과 고문을 당할 우려가 있었다. 용공 조작으로 빨갱이나 간첩으로 몰릴 위험도 있었다.

손학규, 장명국, 안양로, 조성우, 장영달 등 1960년대 중후반 학번 중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어떤 이에 대해서는 적임자가 아니라는 반대 의견이 제기됐다. 의견이 모였지만 본인이 고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김근태로 의견이 모였다. 그는 학생운동 출신 청년들을 폭넓게 통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당시 학생운동 출신자들은 진로를 놓고서 선도적 정치투쟁이냐 노동 현장 운동이냐로 갈리는 경향이 있었는데, 김근태는 양자를 다 아우를 수 있었다. 1974년 이후 노동 현장으로 이전하여 줄곧 자기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이다. 현장 지향성이 강한 1970년대 중후반 학번 세대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강점이 있었다.

최민화의 삼고초려

김근태는 민청련 의장을 맡아달라는 은밀한 요청을 받았다. 준비 그룹을 대표하여 연세대 출신 최민화가 내방했다. 그때 김근태는 37세였다. 몇년 전 결혼한 젊은 아내와 어린 두 아이를 둔 가장이었다. 큰 애 병준이는 다섯 살, 작은 애 병민이는 두 살짜리 아이였다. 김근태는 주저했다. 속마음이 복잡했다. "탄압은 엄혹하고, 또 그걸 뚫고 만든다고 해도 역할은 어느 정도 할 수 있는지 예측이 안 되고, 또 일부는 책임자를 누구로 할 거냐를 둘러싸고 좀 갈등도 있고, 다른 한편에 무섭기도 하고, 이런 게 다 겹쳐 있었습니다"라고 토로했다.

 노동운동에 헌신하던 1981년 4월, 부천 송내에서 돌 지난 아들 병준이와 함께 포즈를 취한 김근태
노동운동에 헌신하던 1981년 4월, 부천 송내에서 돌 지난 아들 병준이와 함께 포즈를 취한 김근태 ⓒ 민청련동지회

김근태는 두 번 망설였다. 첫 제안을 들은 시기는 1983년 6월 말이었고, 의장 직을 맡겠노라 수락한 것은 7월 말이었다. 그 사이 최민화가 세 번 방문했다. 한 달 동안의 숙고 끝에 마침내 김근태는 결단을 내렸다. 민청련 의장 취임을 받아들였다.

이 결단은 윤리적인 무게를 갖고 있었다. 자신의 구속과 고난을 예상하면서도 기꺼이 그 길로 나아가기로 작정한 것은 공동체의 대의를 위한 헌신을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사회의 공공선을 위해서 일신의 안전과 이익을 희생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의 행위는 다른 이들의 도덕적 결단을 이끌어내는 감화력을 갖고 있었다. 민청련 집행부에 참여하는 청년들도 똑같은 고뇌에 번민해야 했다. 근태 형도 저와 같이 희생을 무릅쓰고 대의를 실행에 옮기는데, 나도 역시 그러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마음 속 결심이 민청련 참가자들 속에 은근히 퍼져나갔다.

결단의 배경에는 전략, 전술적 고려도 포함되어 있었다. 공개 정치투쟁과 노동현장 운동이 상호 보완적으로 병행돼야 한다는 것이 김근태의 지론이었다.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정권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어느 하나만으로는 부족했다. 최민화와 김근태의 판단은 일치했다. 1983년 여름, "지금은 공개 정치투쟁이 필요한 시점이다"는 점에 공감했다.

김근태가 노동운동에 몸을 담그기 시작한 때가 1974년 하반기였다. 개신교 교육단체인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노동조합 지도자 교육 과정에 참여했을 때, 그의 속마음은 이랬다. "학생운동만 가지고 독재정권을 밀어낼 수는 없다." 반독재 운동 대열에 광범한 대중이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수도권에 집중해 있는 사람들은 누구냐". 바로 노동자들이었다. 수도권 공장 지대의 노동자들을 조직화, 의식화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 집결되어 있는 노동자들을, 공장 노동자들을 도심의 거리로 끌어내자"는 것이 노동현장 운동에 들어가는 김근태 내면의 의도였다.

김근태는 근 10년간 노동운동의 경험을 돌아보았다. 특히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이후 약 3년 동안 인천지역에서 노동자 의식화 활동에 종사하면서 느낀 점이 있었다. 반독재 민주주의 전선의 중심에는 역시 정치투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의회주의 정치 활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의회 전술을 통해 선거로 군사독재를 패퇴시키는 정책은 현 단계에서는 부적절했다. 광범한 대중을 반독재 운동으로 집결시키는, 선도적인 공개 정치투쟁의 깃발을 올려야 했다. 그래야만 노동자, 농민 대중운동이 지향하는 바를 제시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했다.

마침내 김근태는 민청련 결성을 준비하는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1983년 8월 중순이었다. 기존에 여러 갈래로 진행되던 청년단체 결성의 논의 구조는 이제 김근태를 중심으로 새로이 재편됐다. 민청련 창립 준비 활동은 쾌속으로 항진했다.

 민청련 사무실 현판식. 1983년 10월 29일 서울 인사동 파고다빌딩 사무실 입주식에서 김근태 의장과 장영달 부의장이 현판을 달고 있다.
민청련 사무실 현판식. 1983년 10월 29일 서울 인사동 파고다빌딩 사무실 입주식에서 김근태 의장과 장영달 부의장이 현판을 달고 있다. ⓒ 민청련동지회

에필로그

김근태가 민청련 창립에 나서기까지 어떻게 살았는가를 다섯 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살펴보았다. 군사독재 통치하에서 민주화 정치투쟁의 막을 열어젖힌 지혜와 용기가 어떻게 마련됐는지 살피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민청련 창립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헌신과 고난이 본격화된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민청련의 다양한 면모는 앞으로 소개될 김근태 동료들의 삶을 통해서 풍부하게 재현될 것이다. 김근태는 민청련 활동 중 치안본부 남영동대공분실로 끌려가 10여 차례의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발병한 파킨슨병과 투병하다 2011년 12월 30일, 65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민청련#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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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두꺼비열전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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