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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 쿠데타 당시 박정희.
5.16 쿠데타 당시 박정희. ⓒ 위키미디어 공용

강도 중에서 가장 강하고 독한 강도가 국권탈취 강도이다.

1961년 5월 16일 일본군 장교출신 박정희 육군소장이 주도한 쿠데타가 일어났다. 국권탈취의 강도행위였다. 장면 정부 9개월 만의 일이다. 이와 같은 강도짓의 DNA는 20년 후 전두환에 의해, 다시 64년 후 윤석열에 의해 되풀이되었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킬 즈음에는 학생시위나 이익집단들의 시위도 어느정도 수그러들어, 사회안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도 순조롭게 추진되고, 장준하가 주도하는 국토건설사업이 본궤도에 올라서고 있었다. 이들에게 5.16 쿠데타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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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장면 정부가 시작한 것을 '표절'한 것이고, '새마을운동'은 장준하의 국토건설사업을 변용한 것이었다. 장준하는 민주당 정권 참여에 대해 언론인으로서는 '외도'였고 '잘못'이었지만, 나라를 위해서는 바람직한 일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국토건설사업 참여는) 나라를 위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내가 원래 표방하고 잡지를 시작한 그 언론의 본도에서는 일탈된 외도임이 틀림없다.… 언론이란 항상 민중편에 서서 치자의 그릇된 정치로부터 그 민중을 보호하고 치자의 비정을 가차없이 고발하고 또한 민중을 대변하는 것이 본질이지만 사실 그 때는 대다수의 국민이 그 정권 (민주당 정권)을 환영하였고 소망을 걸었던 시절이라, 나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같다.

장준하의 국토건설사업과 관련하여 한 가지 '비화'가 있었다.

어느 날 김종필이 이력서 한통을 들고 찾아왔다. 그때 군하극상 문제로 예편되어 실업자 상태에 있었던 김종필이 국토건설사업에 참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장준하가 바빠서 미처 챙기지 못했던 것이 그의 5.16 주동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국현대사의 운명이 바뀌게 되는 순간이었다.

군사구데타는 <사상계>에 실린 '콜론보고서'에서도 지적되었다. 하지만 1년 전에 민권혁명을 이룩한 마당에 '설마'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겠는가, 하다가 당한 변란이었다. 쿠데타 정보는 장면 총리에게 보고되었지만 '우유부단한 성격'과 윤보선 대통령의 '이해하기 어려운 언행'으로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다. 1950, 60년대 아시아, 아프리카 후진국에서 열병처럼 일게 된 쿠데타가 한국에서도 일어나게 된 것이다. 군사정권이 수립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국토건설본부가 해체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장준하는 <사상계>로 '복귀'했다. <사상계> 6월호는 이미 제작이 거의 진행된 와중에 5·16을 겪은 때문인지 '권두언'과 '화보' 그리고 '편집후기'에만 쿠데타의 내용이 실렸다. '현대군사혁명의 유형'이란 특집은 버마, 파키스탄, 이집트, 라틴아메리카의 군사혁명을 번역물로 꾸며졌다. 미리 준비했던 것인지, 5·16을 맞아 황급히 마련한 것인지는 확인이 안 된다.

<사상계> 15년의 역사에서 1961년 6월호의 지면, '권두언', '화보', '편집후기'는 '사상계정신'을 훼손한 내용이었다. 화보 '혁명 새벽에 오다'에서는 쿠데타의 전개과정을 장도영과 박정희의 인물사진과 함께 24컷으로 장식했다. 1년여 전 '민중의 승리 기념호'의 화보와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다. 무기명으로 실린 권두언 '5.16혁명과 민족의 진로'는 아무리 계엄하의 상황이라 해도 이것이 과연 <사상계>의 권두언일까 싶을 정도의 글이다.

'백지 권두언'을 실었던 <사상계>였다. 몇 대목을 발췌한다.

국민경제는 황폐화하고 대중의 물질생활은 더 한층 악화되고 사회적 부는 소수자의 수중으로만 집중하였다. 그 결과로 절망, 사치, 퇴폐, 패배주의의 풍조가 이 강산을 풍미하고 있었으며 이를 틈타서 북한의 공산도당들은 내부적 혼란의 조성과 붕괴를 백방으로 획책하여 왔다. 절정에 달한 국정의 문란, 고질화한 부패, 마비상태에 빠진 사회적 기강 등 - 누란의 위기에서 민족적 활로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다름 아닌 5.16군사혁명이다.

4.19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따라서 5.16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시켜야 할 민주주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의 군사혁명은, 단지 정치권력이 국민의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넘어갔다는 데서 그친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혁명공약이 암암리에 천명하고 있듯이, 무능하고 고식적인 집권당과 정부가 수행하지 못한 4.19혁명의 과업을 새로운 혁명세력이 수행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5.16혁명의 적극적 의의를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 5.16혁명은 4.19혁명의 부정이 아니라 그의 계승, 연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6월호는 '권두언'에 이어 '편집후기'도 '사상계 정신'을 잃고 혼란에 빠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민족의 새로운 진로를 출발하는 종(鍾)은 울리고야 말았다. 4.19를 기해서 독재 이정권이 물러났고, 5.16의 거사로 무능 부패한 장정권이 물러났다. 이제 무엇을 주춤거리겠는가. 새로운 삶의 고동소리 드높은 오늘, 우리는 진정 참다운 민주국가의 건설을 기다린다. 아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온 겨레가 다 함께 여기에 매진해 나아가야 한다. 문자 그대로 총역량을 발휘해서 이 사업을 돕는 것만이 새로운 진로이리라. 이 엄청나고 거대한 사업에 누구하나 주춤거릴 것 없다. 다같이 공동사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만인은 맡은 바 자기 직분에 충실함이 바로 그 길로 통하는 대로(大路)이리라. 우리는 계속 어김없는 편집에 노력한다. 이것도 반드시 혁명완수의 일익이 된다는 것도 잘 안다.

'권두언'과 '편집후기'는 무기명으로 처리되어 있다. 장준하가 직접 쓴 글은 아니라는 뜻이겠다. 하지만 '발행 편집인' 장준하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합법정권을 총칼로 엎어버리고 정부각료를 비롯하여 각가지 이유로 수천 명이 체포 구금되고 국회가 해산된 공포정치의 상황에서 <사상계> 편집위원이나 직원들이라고 하여 어찌하기 어려웠을 터이다. 그리하여 <사상계> 15년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이고 굴욕적인 '쿠데타 수용'의 글이 활자화 되었을 터다.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실록소설장준하#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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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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