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삼척시를 상징하는 꽃은 철쭉이다. 이유를 들자면, 일단 삼척에 철쭉이 많이 산다. 봄이 되면 삼척의 산과 들을 따뜻한 색감으로 출렁이게 할 정도다.
하지만 철쭉을 시의 상징으로 삼은 이유는 단순히 철쭉이 삼척에 자생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더 특별한 옛 설화와 더불어 고(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관련된 사연이 있다.

▲삼척시를 상징하는 꽃, 철쭉. ⓒ 최다혜
철쭉이 삼척시의 꽃이 된 사연
1300년 전, 8세기 신라 성덕왕 시절. 김순정은 명주(현 강릉) 태수로 부임 받았다. 왕의 명을 받들어 순정공은 아내와 식솔들을 데리고 경주에서 강릉까지 긴 여정에 오르게 된다. 순정공의 아내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수로부인이다.
수로부인의 가문은 신라 시대를 이끌어가는 중심에 서 있었다. 일단 남편 순정공. 그는 김춘추의 후손으로 진골 귀족이었으며 강릉 태수로 일했다. 딸은 경덕왕의 왕비, 아들은 외교 수완이 좋은 관리였다.
당시 당나라는 나당전쟁 후에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라는 국제적으로 자국 영토를 인정 받지 못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 때 수로부인의 아들 김의충이 당나라 황제를 만나 평양 이남 땅을 신라 땅으로 공식 인정하는 문서를 받아왔다. 수로부인의 손녀도 경덕왕의 왕비, 손자는 종교, 군사, 궁의 인력과 재산까지 아우르며 통솔하는 고위 관리였다.
이 정도로 대단한 가문의 귀부인이니, 그녀의 교양과 품위, 자태는 얼마나 우아했을까. 뿐만 아니라 그녀가 입고 두른 옷과 장신구는 매우 진귀하고 값졌을 것이다. 그러니 뭇 사람들의 눈에 그녀가 어떻게 보였겠는가. 사람들은 그녀를 보며 절세미인이라 칭송하였다고 한다.

▲수로부인 헌화공원.수로부인과 동해바다 용을 조각한 거대한 조각상. 높이 10.6m, 가로 15m, 세로 13m, 중량 500t에 달하는 거대한 대리석 조각상으로 웅장함과 신비로움에 감탄하게 된다. ⓒ 최다혜

▲수로부인 헌화공원.순정공. 수로부인의 남편으로, 강릉태수로 부임하러 가던 길에 부인과 온갖 기이한 일들을 겪는다. ⓒ 최다혜
강릉으로 가던 길, 순정공 일행은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경치가 기막히게 좋았다. 동쪽으로는 맑고 푸른 동해바다가, 서쪽으로는 천 길 벼랑이 병풍처럼 해변을 두르고 있었다. 거칠고 가파른 벼랑 위에는 붉은 철쭉이 흐드러지게 펴있었다. 수로부인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누가 저 꽃을 꺾어 올 수 있나요?"
하지만 감히 아무도 엄두를 못 냈다. 벼랑 끝의 꽃을 누가 꺾어 올 수 있을까.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말이다.
"저 절벽은 사람이 오를만한 곳이 못 됩니다."
모두 난감해하며 거절하던 차, 소 한 마리를 끌고 가던 한 노인이 멈춰섰다. 그리고 아무도 엄두를 못 냈던 벼랑을 올라 철쭉을 꺾는데 성공했다! 그는 그 꽃을 수로부인에게 바치며 노래했다.
자줏빛 바위가에
암소 잡은 손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겠나이다.
<헌화가(獻花歌)>
<헌화가>는 향가(鄕歌)다. 신라 시대에는 우리 글자가 없어, 단어 일부를 한자의 음을 빌려 불렀다고 한다. 그런 노래 형식을 향가라고 한다.
<헌화가>는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13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문학사적으로 의미가 깊어 한국 고전 문학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 가치를 고(古) 이어령 선생님께서 눈여겨보았던 모양이다.

▲수로부인 헌화공원.헌화가의 수로부인과 철쭉꽃으로 멋진 포토존을 조성했다. 삼척시청 누리집에서 갈무리. ⓒ 삼척시청
1991년,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고(古) 이어령 선생님이 삼척에 방문했을 때, 이렇게 조언했다고 한다.
"삼척을 <헌화가>와 <해가사>의 고장으로 잘 가꾸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삼척시에서는 이 조언을 흘려듣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무려 삼척시의 상징을 <헌화가>의 꽃인 철쭉으로 정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헌화가>의 배경으로 추정되는 삼척 임원에 '수로부인 헌화공원'을 조성했다.

▲수로부인 헌화공원으로 올라가는 엘레베이터. 엘레베이터의 투명한 유리 너머로 동해바다가 크고 시원하게 보인다. ⓒ 최다혜
<해가사>의 고장, 삼척
그럼 삼척이 <헌화가>의 고장이란 건 알겠는데, <해가사>는 뭘까? 다시 <삼국유사>의 수로부인 설화로 돌아가보자.
이름 모를 노인으로부터 철쭉꽃을 선물 받은 후, 이틀 뒤의 일이다. 일행이 바닷가 옆 정자인 임해정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그 때 동해바다에서 용이 솟구쳐 오르더니, 수로부인의 아름다움에 홀딱 반해 그만 동해바다 속으로 납치하고 만다.
남편 순정공은 당황했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땅을 친다. 하지만 운다고 해결될 리 없는 법. 마을의 지혜로운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옛날 말에 여러 입은 쇠도 녹인다 합니다. 하물며 바다의 미물은 어떻겠습니까? 마을의 백성들을 불러 모아 노래를 지어부르고, 막대기로 언덕을 칩시다. 그러면 수로부인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수로부인 헌화공원.용에게 납치된 수로부인을 구하기 위해 온갖 마을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급히 모여 해가사를 부른다. 장군 동상. ⓒ 최다혜

▲수로부인 헌화공원.수로부인을 구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을 조각하여 언덕을 따라 배치했다. ⓒ 최다혜
그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수로부인을 구하기 위해, 열일을 제쳐놓고 달려온다. 귀족, 장군, 병사, 낭자, 해녀, 농부, 마을의 소녀까지 신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했다. 그리고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막대기로 땅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 놓아라
남의 아내 앗은 죄 그 얼마나 큰가
네 만약 거역하고 바치지 않으면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라
<해가사(海歌詞)>
마을 사람들의 노래를 들은 바다용은 그제야 수로부인을 모시고 나타난다. 마침내 <해가사>의 힘으로 마을 사람들이 수로부인을 구한 것이다.

▲수로부인 헌화공원.수로부인을 구하기 위해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마을 사람들이 뛰쳐나와 <해가사>를 부른다. 그러자 바다용이 수로부인을 데리고 다시 나타난다. 바로 그 장면이 공원에 이야기처럼 펼쳐진다. ⓒ 최다혜
그런데 <해가사>의 가사가 왠지 낯익다. 아마도 <구지가> 때문일 것이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만약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구지가(龜旨歌)>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1세기 가락국에서는 하늘의 계시를 듣고 수로왕을 부르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바로 <구지가>다. 가락국은 가야의 전신이고, 훗날 가야는 신라에게 복속된다. 그러니 1세기 가락국에서 불렀던 <구지가>와 <해가사>의 노랫말이 비슷할 법하다.
원하는 바를 확실하게 쟁취해내는 노랫말과 설화가 매력적이었는지, 공원을 내려오며 아이들이 합창하기 시작했다. 공원 입구에 있던 찹쌀도넛 가게에서 맡았던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를 잊지 못했던 모양이다.
"엄마야 엄마야 찹쌀도넛을 내놓아라~ 만약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가락국에서는 수로왕을 탄생시키고, 신라에서는 바다용으로부터 수로부인을 구해낸 노래다. 평범한 엄마인 내가 이길 재간이 있을리가! 못 이기는 척 찹쌀도넛 가게 문을 열었다.
1세기 가락국의 <구지가>는 8세기 신라의 <해가사>로 이어졌다. 그리고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 덕분에 21세기 대한민국에까지 닿았고, 이어령 선생님의 조언으로 삼척은 <헌화가>와 <해가사>의 고장이 되었다. 이렇게 우리의 역사는 맥을 잇는다.
2000년을 이어 온 고대의 노래는, 오늘을 살아가는 아이들이 찹쌀도넛을 쟁취해내기 위해 말놀이로 이어간다. 이 아이들이 훗날 이 노래를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이어주길, 찹쌀도넛을 사주며 소망했다.
덧붙이는 글 | 위 기사는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이임수 교수의 논문 「<구지가>, <해가>, <헌화가>의 비교 연구」(2015), 역사학자 황윤의 책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강원도 여행』과 삼척시청 누리집 중 '삼척의 역사'를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