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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이라는 표현하에 경쟁과 입시몰입교육을 지양하고, 자치와 상생을 위한 교육을 하며, 학생들이 현재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안전한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곳에서 여러 존재들과 좌충우돌하며 교육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전하고자 합니다.
어느 날 학생 한 명이 나에게 다가와 강당에 마이크 설치를 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학생자치안전부장(이하 학생부장)에게서 안내를 받은 터라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었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그에게 질문했다.

"왜?"
"오늘 밤에 기숙사 총회가 있어서요. 저희가 방송장비를 잘 몰라서요. 도와주실 수 있죠?"
"오늘 총회가 원래 계획되어 있었나?"
"아니요. 오늘 총회는 저희가 준비한 거예요. 정기적으로 있는 건 어차피 아니기도 했지만요."

그렇다. 그날의 총회는 전적으로 학생들의 의지로 발현된 일종의 성토회였다. 아이들이 대화의 장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적당한 일시를 잡아 학생회를 지원하는 교사에게 계획서를 제출하여 스스로 마련한 자리였다. 이렇게 능동적으로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원동력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인다고? 무슨 이유로 이런 수준 높은 예쁜 짓을 하실까?"
"답답해서요."
"뭐가?"
"애들이요. 지들끼리 뒷담화나 하고, 규칙은 규칙대로 어기고... "

낮과 밤의 아이는 다른 존재가 된다

기숙사 총회 준비 원탁토의, 월드카페 등 수업이나 자치회의 때 경험한 방식을 고스란히 기억하여 써먹는 학생회 구성원의 모습
기숙사 총회 준비원탁토의, 월드카페 등 수업이나 자치회의 때 경험한 방식을 고스란히 기억하여 써먹는 학생회 구성원의 모습 ⓒ 안사을

작년 말 2025학년도의 학생회가 선출되고, 3월 1일 자로 개학한 뒤 학생회와 비학생회, 신입생과 재학생이 한데 모여 세 달여를 함께 살아온 아이들이었다. 우리 학교는 공립 대안고등학교이자 기숙형 학교로,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한다. 전교생은 140명 가까이 되는데 기숙사생은 보통 130명 정도. 학교는 작지만 기숙사 인구는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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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기 왕성한 청소년들이 밤낮 뿜어내는 에너지를 생각하면 이들 사이에 별의별 일이 며칠이 멀다 하고 벌어지는 것이 정상이다. 담임, 비담임 할 것 없이, 거짓말 조금 보태면 학생의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도 알 정도로 세세한 상담을 끊임없이 하고 있지만 기숙사는 또 다른 세계다. 낮의 아이와 밤의 아이는 다른 존재가 된다.

학교는 군대나 감옥이 아니므로,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훈련이나 통제가 아닌 '교육'을 해야 한다. 즉각적인 처벌보다는 대화와 설득, 중재와 경청으로 학생을 만난다. 자연스럽게 시간이 지체되는 동안 불편함을 고스란히 인내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학생의 몫이다. 그러다 보면 쌓여가는 것은 친구에 대한 불만과 학교에 대한 불신이다.

가장 열띤 토론이 벌어진 곳 흡연자와 비흡연자의 권리에 대해 공방이 오갔다.
가장 열띤 토론이 벌어진 곳흡연자와 비흡연자의 권리에 대해 공방이 오갔다. ⓒ 안사을

찬란한 유월의 햇살이 아이들의 눈동자에 드리우면 이제 조금씩 인고의 순간들이 버무려져 발효되고 숙성되기 시작한다. 올해도 역시 의문스러웠지만 여전히 이렇게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옳다며 교사들은 서로를 위로한다. 하지만 문제는 학생들이다. 눈에 띄게 성장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채 여전히 으르렁거리기 일쑤다.

이 시기에 교사는 학생들에게 진실의 거울을 비춰주곤 한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긍정적 과장이 섞인 거울이다. 네가 겪었던 것은 불의와 손해가 아니라 더불어 살기 위한 적응의 수업이었다고, 두 달 전에 비해 너의 눈빛이 얼마나 어른스러워졌는지 아느냐고 말이다.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은 3년 차를 살아내고 있는 최고참 선배들이다. 물론 그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문제는 있지만,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다르다. 후배가 토로하는 불편한 상황에 대해서는 현자가 따로 없다. 나도 겪어보았노라, 세상은 원래 그렇더라며 늘어놓는 경험담이 후배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그러던 차에 올해는 본격적으로 130명의 학생들을 한데 모아 월드카페 방식(분임을 나누어 진행자를 고정하고 토론자를 순환시켜 결국에는 모두가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하는 방식)으로 기숙사 총회를 스스로 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체육관에서 이루어진 원탁토의 학생회는 비싼 원탁 대신 탁구대를 이용하여 훌륭한 회의장을 만들었다.
체육관에서 이루어진 원탁토의학생회는 비싼 원탁 대신 탁구대를 이용하여 훌륭한 회의장을 만들었다. ⓒ 안사을

가장 빛났던 아이디어는 탁구대를 탁자로 사용한 것이었다. 원탁을 사자니 보관과 관리가 어렵고, 매번 빌리자니 낭비가 심한 상황이었다. 특히 이번에는 학생 스스로 여는 회의였기에 얼마 되지 않는 학생회 예산을 쓰기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쥐어짜던 어느 날, 평소 엉뚱한 행동을 자주 하는 3학년 학생이 탁구대 제안을 했다고 한다. 수백만 원의 예산을 아낀 셈이니 교장선생님께 특별상을 하사해달라고 요청해 두었다.

자성의 목소리를 기대했지만

토론의 주제는 총 10개였다. 학급회의를 통해 평소 학생들이 불편해하는 부분을 미리 조사하고 범주화한 결과였다. 점호시간, 시설사용, 생활교사(사감선생님), 흡연, 소음공해 등에 대한 탁자가 만들어졌다. 각 모둠에 한 명의 진행자가 남고 토론자는 20분마다 자유롭게 모둠을 옮겨 다니며 대화를 나눈다.

이날 교사는 학생자치 업무를 맡고 있는 학생부장, 교장선생님,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뿐이었다. 학생들이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교사들의 지도를 최소화한 것이었다. 학생부장은 간식을 사러 나갔고, 교장선생님은 뒷짐을 지고 아이들의 발언에 미소를 띨 뿐이었다. 나 또한 아무 말 없이 사진을 찍는 데에 전념했다.

덕분에 아이들은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속에 있는 말을 마음껏 쏟아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던 것이다. 매번 지각을 일삼는 아이들의 입에선 아침에 시끄럽게 깨우지 말아 달란 말이 나왔고, 어느 흡연자는 자기 몸을 자기가 망치겠다는데 상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까지 했다.

적반하장 화를 부르는 내용들
적반하장화를 부르는 내용들 ⓒ 안사을

성선설을 믿지는 않아도 고등학생 정도 됐으면 최소한의 집단지성은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학생회 아이들의 얼굴에 점점 지친 기색이 보였다. 생각 없이 거친 말을 뱉어낸 학생이 다른 친구들의 발언은 잘 듣지 않는 모습을 가리키며 나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학생회 아이들이 그런데 교사인 나는 어땠겠는가.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듣다 보니 화가 슬슬 올라왔다. 간섭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정말로 내 머리에 연통이 있었다면 시커먼 연기를 포함한 불꽃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틀 제공하기

다행스럽게도 학생회와 교사 중 아무도 그들의 입을 막지 않았다. 각 모둠의 진행자는 불만쟁이들의 발언을 경청하고 제공된 종이에 성실하게 받아 적었다. 이윽고 순환 토론의 시간이 끝나고 모둠별 발표 차례가 되었다. 진행자는 두 시간 반이 넘도록 쌓인 의견을 차분하게 발표했다.

발표 모둠별로 각 주제에 맞게 수집한 의견을 발표하는 모습
발표모둠별로 각 주제에 맞게 수집한 의견을 발표하는 모습 ⓒ 안사을

그들이 발표한 내용은 예상보다 정제되어 있었다. 날카롭고 이기적인 발언들이 발표자의 선한 마음을 통해 걸러지고 부드러워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내용을 왜곡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실에 가까워졌다고 표현하고 싶다. 실제로 더 많은 수의 아이들이 규칙을 지키려 노력하고 서로를 아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미성숙한 마음으로 거친 말을 뱉어낸 아이도 있었지만 선생님과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한 아이들도 많았다. 학생회가 참 대견했던 것은, 이 두 무리 간에 다툼을 부추기지 않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모든 말이 수집될 수 있도록 안전한 자리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어차피 억지스러운 발언은 선한 공동체 앞에서 힘을 얻지 못한다. 생활교사나 정당한 규칙에 대해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비난한 문장이 발표되었을 때, 대중은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했던 나쁜 말이 발표되자 그 발언을 한 학생은 매우 겸연쩍고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아이들은 이미 안다. 체득되지 않았을 뿐이다.

정리 산만하던 아이도, 불만만 토해내던 아이도 다함께 뒷정리를 했다.
정리산만하던 아이도, 불만만 토해내던 아이도 다함께 뒷정리를 했다. ⓒ 안사을

잘 된 한 번의 총회가 모든 아이들을 감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교사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이 애써서 스스로 마련한 이 자리가 지속적인 변화의 물결이 될 수 있도록 적절한 물길을 내주는 것이다. 학교는 1년, 혹은 3년이라는 유통기한이 존재하는 사회이기에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일은 생각보다 시일이 촉박하다.

다음 총회에서는 이날 나온 갈등 거리를 간결한 문장으로 만들어 집중 토론을 진행하게 하면 어떨까 싶다. 가령 아이들이 그토록 싫어하고, 혹은 감사해하는 사감 선생님의 역할에 대해 말이다. <사감 선생님, 과연 필요한가!>라는 주제로 찬반토론을 하다 보면 그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알게 되지 않을까.

#민주시민교육#학생자치#공립대안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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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 대안교육 특성화 고등학교인 '고산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필름카메라를 주력기로 사용하며 학생들과의 소통 이야기 및 소소한 여행기를 주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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