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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발생하는 중대재해 소식에 마음이 움직인 다섯 명의 청년이 모였다. '김용균재단 청년기자단'의 이름으로 중대재해 사건을 정리하고, 소규모 건설 현장에서 발생한 추락 사망사고, 1주기가 돌아오는 아리셀 참사, 중대재해처벌법 재판에서 진짜 책임자 대신 호명되는 중간 관리자, 안전관리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섯 차례에 걸쳐 청년기자단의 글을 싣는다.
2024년 6월 24일, 경기도 화성에 있는 리튬전지 제조공장 아리셀에 불이 났다. 23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참사는, 이주노동자 차별과 불법파견의 문제 등이 얽힌 중대재해였다. 참사 이후 구속됐던 박순관 아리셀 대표는 지난 2월 보석으로 풀려났고, 1주기를 앞둔 현재 재판은 아직 진행 중이다. 1년이란 시간을 거리와 법정에서 타는 마음으로 지낸 유가족들은 세상의 관심이 덜해지는 지금도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싸우고 있다.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를 통해 본 이주노동자의 안전할 권리 연구보고회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를 통해 본 이주노동자의 안전할 권리 연구보고회에서 발언하는 이순희 님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를 통해 본 이주노동자의 안전할 권리 연구보고회아리셀 중대재해 참사를 통해 본 이주노동자의 안전할 권리 연구보고회에서 발언하는 이순희 님 ⓒ 아리셀 중대재해참사 대책위원회

기자단은 지난 5월 25일 김용균재단 사무실에서 아리셀 참사 유가족 2명을 만났다. 고 엄정정씨의 어머니 이순희씨, 고 이해옥씨의 사촌 언니 여국화씨. 중국 동포인 두 사람은 날벼락 같던 참사 이후 투사가 되어버렸다. 지난 1년간 집회 발언, 언론 인터뷰 등 말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경험이 쌓이고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아픔이 무뎌지는 건 아니었다.

인터뷰를 시작하며 말문을 트고자 가볍게 부탁드린 자기소개에도 가족들은 쉽게 말문이 막혔다. 자리에 함께한 권미정 김용균재단 활동가는 익숙한 듯 휴지를 건네며 가족들을 위로했다. 어렵게 입을 연 가족들은 1년 전 그날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 가본 가족의 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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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온 엄정정씨는 아리셀에 들어간 지 두 달 정도 됐었다. 참사 당일 이순희씨는 아리셀 화재 소식을 기사로 접했을 때도, 그게 딸의 이야기인지는 알지 못했다. 화성에서 일한다는 말만 들었지, 그곳이 아리셀인 줄은 모르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퇴근 시간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는 딸이 이상했던 이순희씨 부부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아리셀 공장으로 향했다. 상황판에 적힌 사망자 명단에 스물다섯 살 딸의 이름이 보였다. 억장이 무너지던 그날의 기억이 이순희씨에게는 아직 너무나 생생하다.

여국화씨 역시 참사 당일 뉴스를 보고도 그게 가족의 이야기인 줄 몰랐다. 전날 밤까지 메시지도 주고받았던 동생이었다. 안부를 물을 때면, 자기 걱정은 조금도 말라며 안심시키던 동생. 참사 다음 날, 사망자 명단에 동생 이해옥씨가 있다는 전화를 받고서야 세상이 무너졌다. 아리셀 참사 유가족 중에는 가족이 그 공장을 다닌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 공장이 얼마나 위험하고 엉망인 곳이었는지 아는 이는 더더욱 없었다. 제대로 된 안전교육은 실시된 적이 없었고, 비상구로 나가기 위한 출입문은 정규직만 열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재판에서 공개된 CCTV 영상 속에서 가족들은 희생자의 마지막 모습을 한눈에 찾아냈다.

"제 동생은 키가 작아요. 지금 이렇게 마주앉아 인터뷰하는 것처럼, 그 조그만 애가 동료들이랑 마주 보고 앉아서 일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러다 '팡'하고 터지는 소리가 나니까 놀라서 벌떡 일어나더니 핸드폰부터 들더라고요." (여국화)

"애가 어떤 옷을 입고 출근했는지도 몰랐어요. 나중에 영상을 보니까, 청바지에 짧은 반소매를 입고 까만 마스크를 썼더라고요. 우리 딸은 키가 컸어요. 터지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니 딱 눈에 띄잖아요. 그런 걸 보면 진짜로..." (이순희)

2025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 20주년 2025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 20주년에 참석해 발언하는 여국화 님
2025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 20주년2025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 20주년에 참석해 발언하는 여국화 님 ⓒ 민주노총

재판에 가지 못하는 이유

납득할 수 없는 죽음에 가족들은 거리로 나섰다. 폭우 속에 대통령실도 찾아가고, 아리셀의 모기업 에스코넥 앞에서 농성을 하기도 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싸웠던 그 시간 속에 억울한 마음은 풀리질 않았다.

"우리가 어떨 때는 속으로 그런 생각도 했어요. 우리가 가족을 잃었는데, 솔직히 이렇게까지 해야 해? 책임자라는 사람이 와서 우리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백번 천번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니야?" (여국화)

박순관 대표는 참사 직후 언론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지만, 정작 유가족들 앞에서는 지금껏 한 번도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다. 가족들의 면담 요청을 피해 다녔던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은 버젓이 대통령 선거에 나와 "중대재해처벌법은 악법"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누구 하나 제대로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은 법정에서도 계속됐다. 현재 수원지방법원에서는 아리셀 1심 형사재판이 진행 중이다. 박순관 대표가 아리셀의 실제 경영자는 아들 박중언 본부장이라며 책임을 떠넘기는 가운데, 지루한 공방이 오가고 있다. 가족들은 재판 방청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법정에 가보면, 박순관 쪽 사람들이 자기들은 죄가 없다고 뻔뻔하게 앉아 있어요. 그 꼴을 10분만 보고 있으면, 벌써 뚜껑이 열려서 못 앉아 있겠어요." (이순희)

"가서 앉아 있으면 못 알아듣는 말도 많고, 판사님은 사측의 편의를 봐주는 게 눈에 보이고... 우리가 있는데도 그러니 없으면 더하겠다 싶어서 가긴 해야 하는데. 가면 또 화가 나고 짜증이 나니..." (여국화)

검사와 피고인의 자리인 형사소송에서 피해자인 유가족은 주체가 아니었다. 피해자 중심주의가 결여된 사법부의 태도는 가족들이 재판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아리셀이 남긴 숙제

권미정 활동가는 참사 대응 과정에서 이전의 참사들과는 달랐던 점을 설명했다. 우선 아리셀 참사 희생자 대부분은 이주노동자였기에 비자 문제 등이 걸려 있었다. 이는 단순히 회사와의 교섭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정부나 지자체를 통해 풀어야 하는 문제였다. 또한 권 활동가는 사람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정주노동자 산재 때와 달랐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자 혐오세력이 유가족 앞에서 피케팅을 벌이는 등 보다 직접적인 혐오가 자행됐다. 한국 사회의 끔찍한 단면은 일터에만 머물지 않았다.

문제 해결은 요원한 한편, 세상의 관심은 빠르게 식어갔다. 참사 초기만큼 기자들이 많이 찾지 않는 현장을 여국화씨는 직접 핸드폰으로 담기 시작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이 이대로 파묻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참사 이후 여씨는 또 다른 사고 소식을 들을 때면, 유가족들을 찾아가 만나보고 싶은 마음부터 든다. 1년이란 시간이 그를 그렇게 바꿔놓았다.

1주기를 앞둔 현재 가장 바라는 바를 묻자, 가족들은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첫째는 제대로 된 사과"라고 대답했다. 지난 1년 동안 가족들이 그토록 원했으나 받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어진 답변에서 가족들은 '다시는'이란 말을 되풀이했다.

"우리가 맨날 쓰는 핸드폰을 만들지 말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대신 거기에 들어가는 배터리가 터져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때는, 어떤 조처를 해야 할 거 아니에요? 대한민국에 이런 일이 다시는 없게 해야 하는 게 상식이잖아요." (이순희)

"우리가 공장에 일하러 가지 죽으러 가는 사람은 없잖아요. 일터에서 이주민이라고 차별하는 일은 더는 없어야 해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안전한 일터를 만들어달라는 게 제일 큰 바람인 것 같아요." (여국화)

덧붙이는 글 | 김용균재단 청년기자단 1기입니다.


#아리셀#중대재해#유가족#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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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26일 출범한 사단법인 김용균재단입니다. 비정규직없는 세상,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하는 세상을 일구기 위하여 고 김용균노동자의 투쟁을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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