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북 충주 옹달샘 미술관이 개관전으로 고 김두엽 작가의 ‘기쁜 우리 푸른 날’ 회고전(6월 5일~8월 2일, 관람 무료)을 열고 있다. <6월 11일 촬영> ⓒ 이재우
마치 시골 본가의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기분이었다. 서울에서 충북 충주의 한적한 시골 마을까지. 대중교통은 불편했지만, 그럼에도 발걸음은 가볍고 경쾌했다. 내가 찾아가는 이는, 삶의 끝자락에서 그림을 시작해 인생을 다시 피워낸 '한국의 모지스 할머니(Grandma Moses)' 김두엽(1928~2024) 작가다. 그는 작년 봄, 아흔일곱 해의 생을 조용히 마감했다.
햇살 좋은 6월 둘째 주 평일. 내 발걸음의 목적지는 충주 노은면에 있는 명상치유센터 '깊은산속옹달샘'. '고도원의 아침편지'로 잘 알려진 고도원 이사장의 땀과 노력이 스며든 공간이다. 최근 이곳에 옹달샘미술관을 개관하면서 김두엽 작가의 '기쁜 우리 푸른 날' 회고전(6월 5일~8월 2일, 관람 무료)이 열리고 있다.
김두엽 작가는 택배일을 하던 가난한 화가인 막내아들의 권유로 83세에 처음 붓을 들었다. 세상을 떠난 97세까지 700여 점의 그림을 그렸고, 이번 전시에는 70점이 선보인다.

▲옹달샘 미술관을 운영 중인 ‘깊은산속옹달샘’의 고창영 대표가 관람객들에게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그림 아래엔 김두엽 작가가 생전에 쓰던 나무책상이 놓여 있다. <6월 11일 촬영> ⓒ 이재우
'깊은산속옹달샘' 고창영 대표는 "지방과 서울에서 김두엽 작가의 개인전과 모자(母子) 전이 여러 차례 열렸지만, 옹달샘 미술관의 작품전은 특별하다"며 "전시 규모가 가장 클 뿐 아니라 판매 수익은 작가료를 제외하곤 전부 치유 프로그램에 기부한다"고 했다.
나는 김두엽 작가를 그냥 '김두엽 할머니'라고 부르고 싶다. 할머니를 처음 만난 건 2019년 7월 KBS <인간극장>에서였다. 가슴이 저릿했다. 구순이 가까워지는 내 어머니가 반야심경 필사를 하는 모습이 겹쳐졌다. 작년엔 서울 북촌 '갤러리 단정'이라는 곳에서 김두엽 할머니 작품과 조우했다.
잠시 잊고 있던 사이, 할머니는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그림 그리는 할머니 김두엽입니다>라는 에세이를 내는가 하면, 할머니의 그림에 영감을 받았다는 나태주 시인과 함께 공동 시화집(<지금처럼 그렇게>)까지 펴냈다. 먼저 김두엽 할머니가 '한국의 모지스 할머니'라 불리는 이유부터 소개한다.
사과 하나를 그린 것을 시작으로

▲김두엽 작가는 2019년 KBS ‘인간극장’에 나오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처음엔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작가는 막내아들인 화가 정현영(맨 아래)씨와 여러 차례 모자(母子)전을 열기도 했다. ⓒ KBS 영상 캡처
"모든 벽은 문이다.(Every wall is a door)"
모지스 할머니, 그러니까 '그랜드마 모지스(Grandma Moses)'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미국 민속 화가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1860~1961)가 했던 말이다.
그는 미국 뉴욕 북부 시골 농장에서 태어나 평생 농사일을 하며 살았다. 손에서 바늘을 놓지 않았지만 관절염으로 자수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삶은 마치 벽 앞에서 멈춘 듯했다. 하지만 그 순간,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하면서 새로운 인생의 문을 열었다.
정규 미술 교육을 받은 적 없는 그는 78세 나이에 작은 농가 작업실에서 시골 풍경을 그리고 또 그렸다. 한 미술 수집가가 약국에 걸린 그의 그림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아마 평범한 할머니로 생을 마감했을 터였다.
그 수집가 덕에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작품이 전시되는 영광을 누렸고, 미술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한 평론가는 그를 '그랜드마 모지스'라는 애칭을 지어 주었다.

▲관람객들이 김두엽 작가의 그림들을 둘러 보고 있다. <6월 11일 촬영> ⓒ 이재우
모지스처럼, 더 이상 꽃이 피지 않을 것 같은 나무에 새로운 가지를 접붙여 새싹을 틔운 김두엽 할머니.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열여덟에 한국으로 건너와 가정을 꾸리고, 오랫동안 세탁소 옷수선 일을 했던 힘겨운 삶이었다.
전남 보성과 영광의 시골에 살았던 할머니에게 더 이상 삶의 변화는 없을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벽에 걸린 달력을 뜯어 그 위에 사과 하나를 그린 것이 새 인생의 시작이었다.
"엄마, 이 사과 누가 그렸어?"
"내가 그렸지."
"우리 엄마 그림 잘 그리시네."
화가 아들의 세심한 관심이 없었다면, 할머니는 마당의, 들판의, 야산의 들꽃들을 바라만 보며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이 바뀌곤 "꽃과 함께 살고, 꽃 그림을 그리며, 꽃을 품고 살아가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할머니"라고 말하곤 했다.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좋은 기운

▲김두엽 작가의 그림 ‘화병’, ‘매화와 새’. 작가는 “꽃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할머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6월 11일 촬영> ⓒ 이재우
그런 의미에서 할머니의 삶은 '더하기(+)' 인생이다. 83세라는 늦은 나이에 시작한 그림은 굳어가던 삶에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더했다. 누구도 박수쳐 주지 않았던 인생의 뒤안길에서 마침내 자신만의 빛을 찾은 할머니.
'빼기(-)'의 연속이기도 했다. 수십 년 쌓여온 외로움과 상처를 그림을 그리며 조금씩 덜어냈다. 지우듯 걷어내고, 비로소 캔버스를 통해 자신을 다시 껴안았다.
'곱하기(×)' 삶이기도 했다. 돌담 사이의 토란대가 쑥쑥 자라듯 그림 실력도 하루가 다르게 늘었다. 열정과 꾸준함이 재능을 곱셈하듯 키워낼 수 있다는 걸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나누기(÷)'의 길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나누고, 그 그림을 통해 우리에게 위로와 위안을 다시 나누어 주었으니 말이다. 할머니의 그림을 소장한 방송인 최화정씨도 그중 하나다.
할머니의 그림 세 점을 샀답니다. 어떠한 편견이나 고정관념 없이 할머니만의 방식으로 완성된 그림, 그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좋은 기운을 우리 집으로 옮겨오고 싶다는 생각에서였지요. (<그림 그리는 할머니 김두엽입니다> 중에서 인용)
할머니가 남긴 푸른 꽃물의 기운이 누군가의 삶으로 옮겨 심어진다면, 할머니도 천국에서 행복해하지 않을까? 실제로도 그렇다. 할머니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에 꽃물이 스며든다. 작년 전시회(서울 북촌 갤러리 단정)도 그랬고. 이번 옹달샘 미술관도 그러했다.
전시회 장에는 막내아들이 만들어준 작은 책상이 그림 앞에 놓여 있다. 할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의 화실"이라고 자랑했던, 할머니만의 보물. 개인적으론 할머니의 그림 중 '고추밭'이 특히 마음에 와닿았다. 내 어머니가 텃밭에서 정성스레 기른 빨간 고추를 수확해 마당에 말리던 고운 풍경이 떠올라서다.

▲김두엽 작가의 그림 ‘고추밭’.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들의 모습에서 한적한 시골 정서가 느껴진다. <6월 11일 촬영> ⓒ 이재우
김두엽 할머니는 그림 한 점 한 점을 통해 마치 우리에게 정겹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인생은 언제나 새로운 색을 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캔버스 같아요."
그리고 또 이렇게 용기를 북돋운다.
"나이 들었다고 열지 못하는 문은 없어요."
우리는 종종 넘어야 할 인생의 '또 다른 벽' 앞에서 망설인다. 너무 늦었다고, 재능이 없다고, 시작할 용기가 없다고. 하지만 김두엽 할머니는 스스로 벽을 밀치고 넘어뜨려 문으로 바꾸었다. 모지스 할머니 역시 그랬다.
미술관을 나와 마을 길을 따라 내려오며, 배낭에서 시화집 <지금처럼 그렇게>(김두엽·나태주 공저)를 꺼냈다. 접어둔 페이지를 펼치자, 나태주 시인이 이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오늘 하루도 함부로
살아서는 아니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