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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각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꽃을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합니다. 그 불꽃이 일으키는 연소 작용이 영혼을 살찌우지요. 다시 말해 불꽃은 영혼의 양식인 것입니다. 자신의 불씨를 지펴줄 무언가를 제때 찾아내지 못하면 성냥갑이 축축해져 한 개비의 불도 지필 수 없게 됩니다."

어느 날, 주인공 티타에게 질문이 주어진다. 당신 삶의 불꽃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요? 티타는 자신의 내면에 '성냥'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타인이 정한 운명을 따르며 괴로워했다. 그런 그녀에게 '부엌'은 유일하게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자, 삶의 중요한 일부였다.

세계문학 고전 중 하나인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라우라 에스키벨의 첫 장편 소설로, 한 멕시코 여성의 삶을 그려낸 작품이다. 1월부터 12월까지, 주인공 티타의 삶은 그녀가 만들어내는 열두 개의 요리와 절묘하게 얽힌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라우라 에스키벨 (지은이), 권미선(옮긴이)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라우라 에스키벨 (지은이), 권미선(옮긴이) ⓒ 민음사

1월 크리스마스 파이, 3월 장미 꽃잎을 곁들인 메추리 요리, 12월 호두 소스를 끼얹은 칠레고추 요리 등. 한 번도 본 적 없는 멕시코 전통 요리의 향이 풍겨오는 듯하다. 그녀가 요리하는 장면을 따라가다 보면, 눈앞에서 한 편의 예술이 펼쳐지는 것만 같다. 낯설지만 매혹적인 멕시코 문화를 엿보는 것 역시 이 소설이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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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중심에는 데 라 가르사 가문의 막내딸 티타와 그녀의 연인 페드로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둘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지만 '막내딸은 죽을 때까지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는 가문의 전통으로 인해 관계에 위기를 맞는다. 설상가상으로 페드로는 티타의 첫째 언니 로사우라와 결혼하게 되고, 티타는 큰 고통에 빠진다. 그럼에도 그녀와 페드로의 사랑은 결혼 이후 더 깊어진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행복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갈등을 겪는다.

티타는 자신의 '불꽃'을 꺼뜨리려는 '차가운 입김'의 소유자, 어머니 마마 엘레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싸운다. 싸움을 위해 그녀가 선택한 무기는? 바로 요리다. 요리는 단순한 생계 수단이나 일상의 반복이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며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예술 도구였다.

여성 영역으로 여겨지던 부엌과 요리를 문학으로

라우라 에스키벨은 오랫동안 여성만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부엌과 요리를 문학의 무대로 끌어왔다. 여성의 시선으로 삶을 생생하고 솔직하게 조명하며, 기존의 남성 중심 문학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감정과 경험을 섬세하게 드러냈다. 책을 읽는 내내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바로 이 지점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멕시코 여성의 삶에서 과거 한국 여성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1990년대 이전 한국 여성들 역시 티타처럼 부엌의 주인이었을 뿐, 자기 삶의 주인이라 말하긴 어려웠다. 호주제도도 살아있던 때, 더 남성중심이었던 가부장적 사회는 여성 삶의 무대를 '집 안'으로만 제한했다. 그중에서도 '부엌'은 가장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티타가 요리를 통해 마음을 표현했듯 한국의 어머니 세대도 감정을 반죽해 삶의 한 조각을 빚어냈다.

 부엌은 여성들에겐 억압의 공간으로 상징되지만 동시에 일시적인 자유가 허락된 공간이기도 하다.(자료사진)
부엌은 여성들에겐 억압의 공간으로 상징되지만 동시에 일시적인 자유가 허락된 공간이기도 하다.(자료사진) ⓒ jccards on Unsplash

부엌은 여성들에겐 억압의 공간으로 상징되지만 동시에 일시적인 자유가 허락된 공간이기도 하다. 여성들 간의 갈등과 연대 관계가 이곳에서 복잡하게 얽힌다. 즉, 부엌은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갈등이 벌어지는 곳이자, 여성들이 서로의 삶의 무게를 나누고 연대하는 곳으로 기능한다.

이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속 여성들은 모두 저마다의 억압을 경험한다. 어머니 마마 엘레나는 혼혈이라는 이유로 사랑을 이루지 못했고, 가문의 전통에 순응하며 살았다. 이런 삶이 그녀를 억압적인 어머니로 만들었다. 훗날 그녀의 첫째 딸 로사우라도, 자기 딸 에스페란사에게 결혼하지 말고 자신을 돌보라고 요구한다. 오직 티타만이 이 악습에 분노하고 저항한다.

한때 피해자였던 여성이 억압에 순응하며 가해자가 되어가는 모습은, 고부 갈등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단면과도 겹쳐진다. 시어머니 세대는 자신이 시집살이하며 겪었던 대우를 '당연한 것'이라 여기며 딸이나 며느리에게 되풀이한다. 그렇게 억압의 고리는 세대를 거쳐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렇기에 티타가 주체적인 인물로 변화해가는 과정은 더욱 의미 깊다. 그녀는 큰 상실을 계기로 '축축해진 성냥갑'을 말려 다시 불꽃을 피워내고, 자유로운 삶을 향해 나아간다. 또한 에스페란사가 자신처럼 전통의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보호한다.

부엌의 주인이기만 했었던 여성이, 부엌을 뛰쳐나와 드디어 삶의 주인이 된 것이다. 한국 여성들 역시 이와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오랜 억압에 맞서며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아가고 있다.

이 책의 원제 Como agua para chocolate은 스페인어로 '초콜릿을 위한 물처럼'이라는 뜻이다. 멕시코의 전통 요리 방식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초콜릿 음료를 만들 때 물이 펄펄 끓는 상태에서 초콜릿을 넣어야 잘 녹기 때문에 생겨났다. 단순한 조리법을 넘어, 감정이 한계에 다다라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심리 상태를 뜻하는 관용구로 쓰이기도 한다.

소설 속에서 이 표현은 주인공 티타의 감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핵심 이미지다. 자신을 억누르던 감정들이 끓어오르는 순간, 그녀는 요리를 통해 그것을 표현하고, 때로는 강하게 분출한다. 사랑, 분노, 슬픔, 욕망 등 속에 쌓인 감정들이 마치 끓는 물처럼 터져 나온다. 이 과정은 곧 그녀가 삶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여정이다.

타인의 기대에 묶여 있던 여성이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겪는 내면의 폭풍, 그리고 그것을 통과하며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이 소설은 감각적이고도 깊이 있게 그려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민음사(2004)


#여성#달콤쌉싸름한초콜릿#중남미문학#멕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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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소은 (doll516) 내방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곳을 비추는 ‘가로등 같은 기자’가 되겠습니다.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 세상의 시선이 머물지 않는 자리에도 빛을 비추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삶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세심하고 다정하게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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