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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 기반 에세이, 탈북 작가 설송아의 <여자는 죽지 않았다>(2025년 5월 출간)를 며칠 전 읽었다. 책을 읽으며 예전에 본 다큐멘터리 <마담 B>가 떠올랐다. 두 콘텐츠 모두 북한, 즉 북조선 여성이 서사의 주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이들이 살기 위해 취한 행적이 다르면서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북한은 줄곧 경제적 위기 속에 있었다. 1994년 마침내 배급제가 무너지면서 '고난의 행군'이라는 처참한 현실에 내던져진다. 배급제 붕괴는 상상 그 이상이다. 명목적으로 사유재산이 존재하지 않는 체제의 배급 중단은 나라가 사람을 버렸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무배급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제재 뚫고 장마당 '혁명'을 만들어낸 여성들

 여자는 죽지 않았다 책표지
여자는 죽지 않았다 책표지 ⓒ 봄알람

모두가 굶어죽을 기아의 위기를 타개한 것은 당시 여성들이었다. 북한 연구자인 김성경의 책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에서 나왔던, 한 여성 인터뷰이가 "머리 트인 여자들이 없었다면 북조선 사람들은 다 죽었을 거"라는 증언은 과장이 아니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여자들은 장마당을 만들어냈고, 이곳에서의 상거래를 통해 북한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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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여자는 죽지 않았다>의 저자이자 주인공인 설송아도 적극적으로 어릴 때부터 장마당에 뛰어들어 가족을 먹여 살렸다. 식량은 물론 어떤 물자도 없는 사회에서, 거의 모든 물품이 마술처럼 만들어져 장마당에서 거래되었다.

민간에서 항생제가 부족하던 때, 그녀는 페니실린을 수급해 파는 것을 시작으로 나중에는 페니실린을 직접 만들어 공급하며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결국 체제 위기는 그녀를 1세대 '돈주'(신흥 자본가)로 만들어 주었다. 일당 공산국가 북조선에서 돈주라니, 그녀가 장마당을 혁명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북한 여성 청소년들 모습(자료사진).
북한 여성 청소년들 모습(자료사진). ⓒ thoeva on Unsplash

장마당 상인에서 점차 사업가로 변신한 저자도 그러나 한때 '입당'이 인생 목표인 어린 시절이 있었다(북한에서 '조선로동당' 입당은, 매우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해 고되고 힘들지만 명예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신 성분이 가장 큰 핵심가치인 북에서, 그녀의 부모가 물려준 좋지 않은 성분 '복잡 계층'이라는 사실상 낮은 신분은 성공욕이 강한 그녀의 욕망을 채워줄 수 없었다. 반드시 입당해 사람답게 살 권리를 획득하겠다는 그녀의 다짐은 비날론(북한식 섬유) 공장의 고된 노동과 밤까지 이어지는 청년 활동도 마다 않게 만들었다.

고된 노력의 결과 특별 배급받은 평양 사탕 1킬로가 페니실린 10대 가치로 교환되는 시장성을 깨우친 장사의 맛은 그녀를 각성시켰다. 엄마가 돌아가시며 "식량 배급 날만 기다리다가 인생이 흘렀구나"라는 한탄 섞인 유언을 딸인 자기 세대까지 대물림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에 그녀는 입당을 버리고 장마당에 투신한다.

이후 그녀가 장마당을 통해 보인 장사 수단은 놀라웠다. 또한 그녀가 생생히 증언하고 있는 장마당의 풍경은 북조선 사람들이 이미 자본주의를 내재화하고 있었으며, 이 변화의 선두주자가 여성임을 보여준다. 무능한 당을 따돌리며 여자들은 빠르게 적응하고 변화했다.

어느새 저자는 더는 결혼을 미룰 수 없는 나이에 이른다. 북조선에서 결혼은 개인의 의지가 아니다. '비혼'은 있지도 않은 개념이고, 나이가 차 결혼하지 않는 것은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 전체의 불명예다. 한국 사회도 이런 시대를 답답하게 지나왔다.

다행인지 장마당 여성이 신붓감 1순위가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출신 성분이 좋지 않아도 괜찮은 남편감을 고를 수 있었다. 무능한 당이 부여하는 좋은 출신 성분은 이제 좋은 결혼 조건으로 기능하지 않았다. 장마당 사업자인 배우자가 남편 성공의 일등 보증인으로 등극했던 것이다.

신혼집 마련도 혼수 준비도 장마당 사업자인 저자의 몫이었다. 축적한 돈으로 몇 년 치 노동자 월급에 준하는 집을 사고 TV를 장만했다. 남편은 당원이고 교사였지만, 그 돈벌이로는 북조선에서 더는 행세하며 살 수 없는 처지였다. 저자는 장마당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남편을 번듯하게 내조했고 아들도 키워냈다.

여전히 가부장적인 북한 사회... 자전거 타는 여성 때문에 이혼 급증?

 장마당을 위해 여성의 자전거 이용이 늘자, 북한 정권은 이게 당시 이혼 급증의 원인이라며 여성의 자전거 이용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린다.(자료사진)
장마당을 위해 여성의 자전거 이용이 늘자, 북한 정권은 이게 당시 이혼 급증의 원인이라며 여성의 자전거 이용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린다.(자료사진) ⓒ kbobike on Unsplash

하지만 북조선 사회의 결혼 생활 성불평등은 부부관계를 좀 먹게 만들었다. 1946년 제정된, 선진적인 남녀평등권은 허구에 가까웠다. 북조선의 남성들은 가부장제 권력을 사납게 휘둘렀다. 아내폭력이 태반이고 가사노동 분담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장사하랴 살림하랴 고단한 심신을 타고 저자는, 점차 가사일을 돕지 않는 남편에 대한 불만과 서러움이 쌓여갔다는 얘기를 쓴다.

책에서 저자가 보여주는 몇몇 일화는 북조선의 일그러진 남성 중심성을 적나라하게 전시한다. 일화에 따르면, '성형이 곧 성적 타락의 시작'이라는 이유로 성형한 아내를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팬 남편이 있었단다. 그런데 이런 폭력이 북한에선 전혀 문제시되지 않는다.

장마당을 위해 여성들의 자전거 이용이 늘자, 이것이 이혼 급증의 원인이라며 북한 정권은 여성의 자전거 이용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린다.

책에는 당시 북한에서, 여성이 타고 가던 자전거를 한 남성이 빼앗아 돌려주지 않자 실랑이를 벌이다 이에 낙담한 여성이 투신 자살했던 사건이 등장한다. 그 사달이 나고서야 금지 조치를 푼 당의 태도는, 2000년대 초반 북조선 사회의 성불평등이 얼마나 심각한지 방증한다.

단속에 걸린 자전거는 무조건 회수되었는데, 이를 찾으려는 여성들은 상당한 뇌물을 바쳐야 했다. 자전거 단속은 여성과 남성의 대결이라 할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여성을 단속하고 통제하는 이들은 전부 남성이었다. 단속하는 존재와 단속당하는 존재 간 불신은 터지기 직전의 시한탄처럼 자리하였다. (222쪽)

북 체제 벗어나는 건 왜 상당수가 여성일까

한편 '돈주'로 성장하는 등 탄탄대로일 것만 같던 저자의 삶에는 브레이크가 걸린다. 페니실린 불법 제조가 들통나면서, 당국으로부터 그간 모은 재산을 몽땅 몰수 당한 것이다. 살 길이 막막해지자 그녀는 중국행을 택한다. 당시 이미 북조선의 체제를 벗어나고자 탈북하는 사람들이 이어지고 있었고, 이들 상당수가 여성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당에 충성하는 외 달리 생존의 도구가 없던 남편들을 대신해 가족의 호구지책을 마련한 게 장마당 여성들이었고, 중국으로의 이주 역시 이런 맥락에서 여성들이 결행한 삶의 방편이었다.

어렵게 간 중국에서 그러나 저자는 방황한다. 두만강 기술학교에 입학해 장마당에 공급했던 제빵 사업을 어필해 사업기회를 얻으려던 노력은 생각 못한 일로 허사가 되고, 타국에서 의지할 곳 없이 고립된 처지는 두려움과 외로움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때 그녀를 일으켜 세운 건 한국으로의 이주였다. 한국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결심으로 저자 설송아씨는 중국에서 라오스와 태국을 거쳐 입국한다. 이 험난한 탈출 과정을 앞서 언급한 다큐멘터리 <마담 B>를 통해 생생히 보았던 터라, 그녀의 공포와 고통이 절로 이해되었다.

잡히면 끝장인 위험한 탈출 끝에 도착한 한국에서 그녀는 얼마나 신산했을까. 그녀의 입국 목적은 '혹시 간첩이 아닐까' 하는 지난한 심문 과정을 통과해야 했을 테다. 게다가 이후 정착을 위해 한국 정부가 해준 것이 실상 작은 임대 아파트와 얼마 되지 않는 정착 지원금일 뿐이었을 테니 말이다. 모든 게 낯선 자본주의의 나라에서 뭐든 "알아서 해"라는 방임은 또 얼마나 막막한 자유로 느껴졌을까.

그러나 수많은 어려움을 넘어서 그녀는 이제 어엿한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사이버대학을 거쳐 북한학 석박사를 마치고 지금은 학교에서 강의하고 책을 쓰는 지성인 여성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이 책 뿐 아니라 북조선 여성이 주인공인 소설을 여러 편 써낸 작가이기도 하다.

책을 마치고 나면, <여자는 죽지 않았다>라는 책 제목의 '여자'가 북조선에서 연대했던 장마당 여성들임을 알게 된다. 그녀가 탈북 초기 다른 한국 여성으로부터 받은, '페미니스트냐'는 생경한 질문. 그녀는 책 말미, 이 질문을 받고 어리둥절했던 일화를 소개하며 "이미 지나온 모든 시간에 나는 페미니스트였다"라고 답한다.

탈북 뒤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답하게 된 당사자성은, 그녀가 북조선 즉 북한에 사는 내내 의심하고 질문했던 가부장제의 피해와 결점과 모순을 여기 한국에서 치열한 연구와 글쓰기를 통해 획득한 정체성이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 게시 예정


여자는 죽지 않았다

설송아 (지은이), 봄알람(2025)


#여자는죽지않았다#설송아#탈북여성#북조선장마당#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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