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화위 앞에서 시위중인 유족 ⓒ 이형숙
[기사 수정 : 오후 4시 45분]
11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화위) 앞 광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국가폭력 피해자들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진실을 가리려는 자가 과거사 진상규명을 이끌 수 없다. 박선영 진화위 위원장은 즉각 사퇴하라!"
이번 집회는 '국가폭력피해범국민연대' 주최로 열렸으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유족을 비롯해 삼청교육대 피해자, 의문사 유족, 해외입양인 문제를 알리는 단체들까지 광범위하게 참여했다. 민주노총과 5.18서울기념사업위원회 등 연대단체들도 함께해 과거청산에 대한 국민적 요구를 재확인했다.
2116건의 '조사중지'... 368건은 '심의조차 못 받아'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의 공식 조사기간은 2025년 5월 26일로 종료됐다. 그러나 그 끝은 많은 이들에게 실망과 분노를 안겼다. 진화위는 전체 접수사건 중 무려 2116건에 대해 '조사중지'를 결정했다. 피해자나 유족이 생존해 있는 사건, 당시 수사기록과 증언이 확보된 사건조차도 '기한부족' '자료미비' 등을 이유로 조사가 중단됐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미 조사결과보고서가 작성되어 상정만을 앞두고 있던 사건들 중 368건이 단 한 차례의 위원회 심의도 받지 못한 채 '조사중지'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이 중 일부는 수년간의 유족증언수집, 현장조사를 통해 방대한 사실관계를 정리해 온 사건들이다. 그런데 박선영 위원장이 위원회 안건 상정권한을 쥐고 있다는 점을 악용해, 정치적 판단에 따라 심의를 막았다는 비판이 거세다.
진화위법상 위원회는 진상규명에 대한 최종결정을 '회의'를 통해 내려야 하며, 적법한 절차에 따라 상임위원과 비상임위원이 동등한 권한으로 사건을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운영은 상임위원장의 독단적 결정으로 흐르며 수백 건의 사건이 졸속으로 무산됐다는 지적이다.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위원회가 진실을 말할 수 있나"

▲진화위 앞에서 시위 중인 유족 ⓒ 이형숙
진화위 앞에 선 피해자 유족들의 분노는 절절했다. 최상구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 상임의장은 "박선영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철저히 외면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역사만을 사실로 만들고 있다"며 "국가폭력 피해자를 다시 한 번 폭력적으로 침묵시키는 이 현실이 너무 참담하다"고 말했다.
삼청교육대 피해자, 납북어부 유족, 의문사 유가족 등 각 피해 유형별 발언이 이어졌다. 한 유족은 "조사중지가 통보된 날, 마치 아버지를 다시 한 번 국가가 죽인 것 같았다"며 울먹였다. 또 다른 발언자는 "우리는 50년, 60년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 모든 세월이 단 한 사람의 의지로 무시당했다"고 토로했다.
최종순 유가협 의문사지회 회장은 "우리는 그동안 침묵하지 않았다. 침묵하게 만든 것이 국가였을 뿐이다"라며,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국가가, 오히려 생명을 앗아간 국가폭력을 저지르고, 그마저도 숨기려 드는 지금, 진실규명의 최후 보루인 진화위마저 정치에 휘둘려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런 인물이 진실화해위원장이라니"
박선영 위원장은 전 윤석열 정권 말기인 2024년 12월 10일에 임명됐다. 당시 탄핵정국의 혼란 속에서 임명된 박 위원장은 국회 인사청문회 없이 강행된 인사로, 여야는 물론 피해자 단체들로부터도 '알박기 정치'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과거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사건에 대해 '군과 경찰이 실수로 죽인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한 전력이 있으며, 납북어부 사건을 '월북어부'로 폄하하고, 5.18민주화운동에 대해선 "북한군 개입 여부는 모른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는 국가의 공식 입장 및 이미 확정된 역사적 사실과도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피해자 단체들은 박 위원장의 역사인식과 정치적 중립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으며, 그는 진실 규명의 파수꾼이 아니라 은폐의 방조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 진화위는 향후 3개월 내 '종합보고서'를 작성하고 채택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시민사회는 이를 '졸속 보고서'로 규정하고 즉각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이미 수많은 사건이 보류되거나 조사 중지된 상황에서 작성되는 종합보고서는, 진실규명이 아닌 '허위 역사 만들기'에 가까울 수 있다는 우려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과거사팀은 "보고서의 핵심은 진실성과 대표성이다. 보고서에 누락된 사건이 많고, 그 원인조차 설명하지 않는다면 이는 오히려 3기 진화위 출범을 막는 명분으로 악용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박선영 없는 진화위, 제3기 진화위법이 필요하다"
이날 참가자들은 단지 박선영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진화위법 개정을 통한 구조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모았다. 현재 국회에는 피해자 권리를 명문화하고, 위원 구성의 독립성과 다양성을 확보하며, 충분한 조사 기간과 인력을 보장하는 '제3기 진화위법'이 발의되어 있다. 결의문에서 참가자들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12.3 내란세력을 청산하자!진화위 박선영 위원장은 당장 사퇴하라! 진화위는 남은 기간 과거청산의 책임을 다하라! 피해자 권리가 포함된 '3기 진화위법'을 즉각 제정하라!"
진실 없는 화해는 없다. 가해자의 입장에서 과거를 정리할 수 없다. 지금 진화위 앞에 선 이들은 '기억의 책임'을 국가에 다시 묻고 있다. 피해자들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