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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11 15:15최종 업데이트 25.06.11 15:15

언론은 누구를 위한 도구인가

기자실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변화의 신호탄

대통령실은 지난 8일, 브리핑룸 시스템 개선안을 발표했다. 대변인만을 비추던 기존 카메라 구도에서 벗어나, 현장에 참석한 기자들의 질의 장면까지 공개하겠다는 것이다. 백악관과 유엔 회의를 예로 들며, 국민과의 소통과 경청을 최우선으로 삼는 이재명 정부의 국정 철학을 구현하겠다는 설명도 뒤따랐다. 언뜻 사소한 장면 배치의 문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은 앵글 조정이 아니라, 정보 공개의 방식과 권한 배분의 철학을 바꾸는 신호탄이다.

18년 전에도 유사한 시도가 있었다. 노무현 정부는 청와대 춘추관 기자실을 개편하고, 기자단 중심의 폐쇄적 정보 접근 관행을 바로잡고자 했다. 정보의 공공성과 투명성을 확대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당시 출입기자단은 강하게 반발했다. '언론 자유에 대한 침해'라는 명분 아래 보이콧과 기사 축소로 맞섰다. 사실상 그들은 기존의 정보 독점 체제를 지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저항에 나섰다. 그 결과, 노무현 정부의 개혁 시도는 흐지부지됐다.

당시 기자단의 모습은 '언론 자유의 수호자'라기보다, 오히려 기득권을 사수하는 집단처럼 보였다. 정보 접근 권한이 마치 자신들에게 원래부터 주어진 고유한 권리인 양 착각했다. 그들은 출입처라는 희소성에 기대어 정보를 선별하고, '단독'이라는 휘장을 휘둘렀다. 그 '단독'의 실상은 대통령실이나 검찰청 같은 권력기관과의 유착 속에서 만들어진 일방적 흘리기였고, 기자는 감시자가 아니라 나팔수로 기능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출입'이라는 제도를 이용해 권력과 정보를 교환하던 방식은, 본질적으로 공공성을 왜곡하고 공동체 질서를 파괴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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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 Alexa (pb.)

권한과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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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이란 본래 타인에 의해 '위임'된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본래 자신이 지닌 고유한 능력'으로 오해하는 순간, 인식의 균형은 흔들린다. 이것은 착각이며, 그 안에서 교만의 정서적 변형이 자라난다. 이는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현대 조직사회에 이르기까지, 착각과 교만은 질서의 붕괴와 몰락의 전조로 작동해왔다.

"모든 권력은 위임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한다." - 몽테스키외

착각은 자기의 위치를 과대평가할 때 발생한다. 그러나 그것은 의도적 허위와 다르며, 그 출발은 자각 없는 수동성에서 비롯된다. 주인이 하인에게 권한을 줄 때, 그것은 '역할'의 일부로서 부여된다. 마치 톱니바퀴 하나가 시스템 일부를 감당하듯, 그것은 제자리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반복된 위임은 구조의 경계를 흐리게 한다. 하인은 어느 순간 자신을 '기능'이 아니라 '주체'로 착각하게 된다.

인간의 심리는, 받은 것을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마땅히 받을 것'으로 종종 잘못 해석하는 '자격 부여의 오류(Entitlement Bias)'를 범한다. 일정한 혜택이 반복되면, 그것을 특별함이 아니라 권리로 오해한다. 심지어 그 권리가 부정당할 때, 억울함과 분노가 일어난다. 이것은 권한의 본질을 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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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era-operator ⓒ Engin Akyurt (pb.)

통제 없는 권한

자율은 자기 통제의 연습 위에서 가능하다. 통제되지 않은 권한은 왜곡된다. 간섭을 악으로 인식하는 것은 성찰의 빈곤이다. '간섭받지 않는 자유'를 꿈꾸며, 통제를 해방의 적으로 인식하는 순간, 인간은 스스로 책임을 지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자유를 감당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절제'이며, 그 절제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내적 자기 통제 혹은 외부의 질서다. 이 통제는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기제다.

통제 없는 권한은 하인이 쓰는 칼과 같다. 처음엔 주인을 위해 사용하지만, 점차 주인의 자리를 넘보게 만든다. 권위가 무너진 자리에는 규범이 사라지고, 역할이 뒤바뀐다. 이 과정에서 착각이 자라난다. 권한을 부여하는 자는 반드시 조건을 붙이고, 농도를 조절해서 줘야 한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인간 속성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오는 행위다.

"모든 인간은 타락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통제는 불신이 아니라, 신중한 이해다." - 한나 아렌트

교만은 이기적 시선이 만들어낸 감각의 오차다. 자기를 현실보다 더 크게 보는 것이다. 그것은 망상이며, 자기 자신을 기만한다. 내면의 간섭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착각을 방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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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 Alexa (pb.)

언론,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

정부의 브리핑룸 개편 방침을 보면, 뉴미디어 매체에게도 문을 여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그것은 폐쇄적 기자단 구조를 넘어, 정보의 평등한 분배를 통해 국민 중심의 언론 생태계를 만들고자 하는 실험이다. 뉴미디어, 독립 매체, 지역 기반 저널리즘은 오히려 시민과 밀착하며, 새로운 신뢰 질서를 구축하고 있다. 출입증이 아니라, 쌍방향의 열린 소통방식으로 승부하는 이들 매체는, 기존의 미디어가 놓치고 있는 시대정신을 품고 있다.

허위정보, 선정주의, 확증 편향이 혼재하는 구조에서, 중요한 것은 시민의 언론 감식 능력이다. 정보 소비자는 이제 수동적인 '독자'가 아니라, 언론을 평가하고 선별하는 능동적인 비평자가 되어가고 있다. 언론은 소비자에게 선택받을 수 있는 윤리와 신뢰의 기준을 다시 세워야 한다.

언론이 바로 서야, 이재명 정부도 성공할 수 있다. 언론은 비판의 도구이기 이전에, 공공성과 신뢰를 설계하는 동반자다. 기자단의 권위를 유지하는 것이, 더 이상 언론의 요구일 수는 없다.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언론이 아니라, 공적 기능을 스스로 갱신하려는 언론이 되어야 한다.

언론은 누구를 위한 도구이어야 하는가. 권력의 언저리에 기생하며 '단독'을 흘려 받는 집단이 아니라, 정보의 중심에서 행정부와 시민을 향해 합리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존재여야 한다. 언론이 국민의 의견을 대의(代議)하고, 소통 방식을 선진화하는 국가적 대의(大義)를 가져야 할 때다. 정부의 기자실 개편과 개방을 수용하고, 스스로 진보하는 것이 마땅한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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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paper ⓒ gunter (p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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