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th Socialist Club(HSC)이 오마이뉴스를 통해 2025년 3월부터 5월까지 연재한
5편의 시리즈는 '의료는 건강과 생명을 결정짓는가?'라는 물음을 중심에 둔다. 이들은 의료의 효과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며,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을 강조하고, 의료를 사회문제 대응 기술로 재위치시키는 데 집중한다. 그러나 이 연재는 개념적 정밀성과 실증적 근거의 빈약함, 논리적 구조의 불균형, 그리고 전략적 수사에 대한 지나친 의존으로 인해 공적 담론으로서 갖추어야 할 설득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고 있다.
1. 서사의 구조: U자형 곡선으로 구축된 수사적 전개
HSC는 1편에서 "의사 파업에도 사망률은 감소했다"는 자신들의 프리프린트를 인용하며 의료의 효과를 의심한다. (프리프린트를 '논문'이라고 언론에 공개한 반칙은 잠시 접어두자) 2~4편에서는 미국과 영국, 한국의 기대여명 변화 사례를 기술하며, 기대여명의 변화는 의료보다 사회구조와 초기 생활조건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지막 5편에 이르러서는 의료는 생사에는 영향을 덜 미치지만,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여전히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처음엔 의료의 힘을 걷어내며 회의적 문제제기를 펼치다가, 끝에 가서는 다시 "그럼에도 의료는 여전히 중요하다"는 반전을 시도하는 전개이다. 그러나 '의료에 씌워진 신화'를 해체하고, 끝에서는 다시 '사회적 기술'로 복권시키는 이 흐름은 논리적 연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수사적 도식에 의존한다. HSC는 일관되게 의료를 '생과 사' 대 '삶의 질', '기대여명' 대 '일상적 회복'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속에 배치하며, 처음엔 전자(생과 사, 기대여명)를 부정하고, 후반부에는 후자(삶의 질, 일상)를 회복시킨다.
문제는 이 구도가 설명의 복잡성을 줄이는 대신 현실의 복합성을 제거한다는 데 있다. 실제 의료는 생존과 삶의 질을 동시에 다루는 다층적(multi-layered)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HSC는 설명 가능한 층위를 이분법에 가둔 채 일부만을 취사 선택해 의료를 서사적으로 재구성한다. 독자가 읽게 되는 것은 의료의 입체적인 실체가 아니라, HSC의 '프리즘'에 의해 굴절된 의료다. 그 결과 이 연재는 비판적 분석을 수행하는 듯하면서도, 결국 앞서 제기한 문제들을 자의적 구도로 회수하면서 자가당착에 빠진다.
2. 논증의 취약함: 기준 없는 영향력 판단
HSC는 여러 차례 의료의 효과가 과장되어 있다는 주장을 반복하지만, '효과가 크다/작다'를 판단하는 명시적인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 무엇과 비교해서 '작다'고 말하는 것인가? 얼마나 작은지를 수치적으로 제시한 적이 있는가? 그리고 '작다'는 얼마나 작아야 작다고 부를 수 있는가? 이러한 형식적 의문에 답하지 않은 채 '크다/작다'의 수사적 구분만 반복하는 것은 실증적 설득력을 결여한 주장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고혈압 조절이나 영아사망률 감소, B형 간염 백신 효과 등은 모두 실질적인 사망률 감소에 기여해온 의료 성과다. 그러나 이들은 HSC 글에서 단지 '환경 개선'이나 '사회적 변화'의 부산물로 축소되며, 의료의 기여도는 별다른 근거 없이 '과장되었다'고 평가절하된다. 이때 필요한 것은 인구집단 기여분율(Population Attributable Fraction)과 같은 실증 기반의 인과 기여도 판단인데, HSC는 이를 생략한다.
고혈압을 예로 들어보자. 고혈압 조절이 인구집단에 주는 효과는 다수의 연구에서 일관되게 입증되어 있다. Blood Pressure Lowering Treatment Trialists' Collaboration은 2021년 Lancet에 게재된 메타분석에서 수축기 혈압을 5mmHg 낮추는 것만으로도 주요 심혈관 사건 위험이 10% 감소하며, 모든 연령대에서 사망률 감소 효과가 있음을 밝혔다. 또한 한 연구에서는 고혈압을 조절하면 뇌졸중 없이 사는 기대수명이 평균 27개월, 주요 심혈관 사건 없이 사는 기대수명이 32개월 증가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2~3년의 기대수명 연장은 그들의 기준에서 '큰' 성과인가, 아니면 '작은' 성과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그들의 주장은 공허한 수사에 머문다.
3. 이분법적 구조와 현실 왜곡
HSC는 의료를 '생과 사를 다루는 기술'과 '삶의 질을 개선하는 기술'로 구분하며, 전자는 의료가 잘 하지 못하고 후자에 더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이 구분은 얼핏 보기에는 직관적으로 이해되지만, 실제 의료의 모습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당뇨병 치료는 혈당 조절을 통해 관상동맥 질환, 신부전, 사지 절단과 같은 심각한 합병증을 예방함으로써 생존율을 높이는 동시에, 식이요법과 자가 관리 교육을 통해 환자의 일상적 자율성을 향상시킨다. 암 치료는 생존율 향상과 동시에 통증 조절, 미용 재건, 심리적 안정까지 포괄한다.
이처럼 대다수의 의료 행위는 '생과 사'와 '삶의 질'의 교차점에 존재하며, 단선적 구분은 실제 임상 현실(clinical practice)을 설명하지 못한다. HSC가 사용한 이분법은 오히려 의료를 사회경제적 구조의 하위 범주로 밀어 넣기 위한 서사적 장치로 읽힌다. 그들이 슬쩍 언급하는 이반 일리히의 '탈의료화(demedicalization)' 개념 역시, 본래는 의료가 삶의 모든 문제를 독점적으로 정의하는 현상을 비판한 것이지, 이처럼 의료를 생존과 삶의 질로 인위적으로 분리하여 그 가치를 재단하려는 시도가 아니었다. 맥락을 제거한 개념의 오용은 그들의 논지를 더욱 위태롭게 만든다.
4. 인용의 선택성과 해석의 자의성
'의료종사자의 파업의 건강영향연구에 대한 체계적 문헌고찰', Marmot 보고서, GBD 결과 등은 HSC의 글에서 반복적으로 인용되지만, 모두 HSC의 결론을 지지하는 방식으로만 선택적으로 활용된다. 예컨대 체계적 문헌고찰 논문은 의료 종사자의 파업 당시 사망률 변화가 없었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하면서도, 그 해석에는 극도로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저자들은 "기존 연구들의 질이 대체로 낮고, 데이터가 불완전하며, 파업 기간 동안 응급 의료가 유지되거나 다른 병원으로 환자가 이전되는 등의 대체 효과가 존재했다"고 명시적으로 경고한다. 논문의 실제 결론은 다음과 같은 정책적 함의를 논하는 데 있다.
(원문)
this review suggests that strike action by health care workers can be conducted safely as it relates to patient mortality. [...] Most notably, while patient outcomes are a valid concern that should weigh heavily in discussions about the justifiability of strike action, strike action should not be dismissed on this point alone as it is far from inevitable that patients will be harmed when health care workers go on strike.
(번역)
"이 리뷰는 최소한 의료 종사자의 파업이 환자 사망률과 관련하여 안전하게 수행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 환자 결과는 파업의 정당성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타당한 우려이지만, 의료 종사자가 파업에 돌입할 때 환자가 피해를 입는 것은 결코 불가피한 일이 아니므로 이 점만으로 파업을 기각해서는 안 된다."
즉, 이 논문의 핵심 메시지는 '과잉 의료'에 대한 단죄가 아니라, '파업의 정당성'에 대한 복합적인 논의를 제안하는 것이다. 그러나 HSC는 이러한 신중한 경고와 복합적인 맥락을 모두 생략한 채, '사망률이 늘지 않았다'는 표면적 결과와 '과잉의료'라는 자신들의 결론을 직접 연결하는 논리적 비약을 범한다. 이는 설득의 과정이라기보다, 정해진 방향에 근거를 끼워 맞추는 논리 전개 방식에 가깝다.
5. 현실로부터의 유리: 의료의 잔여화
HSC는 구조적 요인이야말로 건강의 결정요인이라고 간주하며, 의료는 마치 잔여적인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의료가 구조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이 서술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화 또는 전략적 축소다. 그들은 "사회 구조가 개선되지 않으면 의료는 무력하다"고 말하지만, 이 명제를 뒤집어 "의료가 없었다면 개선된 사회 구조만으로 지금의 건강 수준을 달성할 수 있었을까?"라고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치료 가능 사망률(Amenable mortality)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는 적절한 시기에 양질의 의료 서비스가 제공될 경우 피할 수 있었던 사망이 그만큼 적었다는 뜻으로, 사회 구조만으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는 의료 시스템의 명백한 성과다. 의료의 '잔여성'은 현실보다는 그들 담론의 전략을 반영한다.
6. 결론: 문제 해결을 차단하는 '편리한 신념'의 해악
결국 이 연재는 의료에 대해 말하는 듯하면서도, 실은 현실의 의료가 아닌 자신들이 비판하기 쉽게 재구성한 '허수아비(straw man)'를 세우고 공격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더 큰 문제는 이 담론이 단순한 해석의 오류를 넘어, 구조적으로 정책 대안과 사회적 합의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HSC의 글은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공론장의 건강한 작동을 방해한다.
첫째, 건강 문제를 '의료'와 '사회 구조'라는 양자택일의 전쟁터로 변질시킨다. 현실에서 저소득층 당뇨 환자의 건강을 개선하려면 저렴하고 질 좋은 음식에 대한 접근성(사회)과 꾸준한 혈당 관리 및 합병증 검진(의료)이 동시에 필요하다. 그러나 HSC의 프레임은 이 둘을 자원을 두고 다투는 경쟁 관계로 설정하는 효과를 낳는다. 그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러한 문제 제기는 현실의 정책 논의를 '어떻게 두 가지를 효과적으로 연계할 것인가?'라는 생산적 질문 대신, '식품 바우처와 합병증 검진 중 어디에 예산을 쓸 것인가?'라는 파괴적인 제로섬 게임으로 전락시킨다. 이는 통합적 해법의 가능성을 지워버린다.
둘째,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의료 기술의 가치를 폄하한다. 사회 구조 개혁은 중요하지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제다. 그 과정에서도 '좌주간부 관상동맥 중재술(Left main stenting)'과 같은 실현 가능한 기술들은 수많은 생명을 구한다. 하지만 HSC의 논리에 따르면, 이러한 구체적인 의료적 중재는 '지방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무너진 것이 근본 원인'이라는 거대 담론 앞에서 '지엽적'이거나 '기술주의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이는 '모든 것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의미 없다'는 식의 정치적 허무주의를 조장하며, 지금 당장 생명을 살릴 수 있는 현실적인 기술들의 발전과 적용을 무력화시킨다.
셋째, 제도 개혁에 필수적인 파트너인 의료계를 협력의 주체가 아닌 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사회적 합의의 토대를 파괴한다. 성공적인 정책은 정부, 시민사회, 전문가 간의 신뢰와 협력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과잉 의료'와 같은 프레임으로 의료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방어적인 태도를 유발하면, 건설적인 대화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이는 정책 설계에 필수적인 파트너들과의 신뢰 관계를 무너뜨려, 결국 제도 개혁의 정당성과 실현 가능성 모두를 해친다.
이처럼 HSC의 담론은 '과학적 문제제기'를 가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문제 해결의 주체들 간의 대화와 협력을 해체하는 공론장의 부정적 역학으로 기능한다. 바로 이것이 이 담론이 가진 진짜 해로움이며, 분석적 개입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