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린초 사이에 나타난 고라니의 모습 ⓒ 이경호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릴 무렵, 세종보 인근의 둔치는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무대가 된다. 지난 8일 밤, 기린초 사이로 고라니 한 마리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인기척에도 놀라지 않고 느릿하게 풀을 뜯는 모습은 이곳이 단순한 농성장이 아닌 살아 있는 생태계의 한 복판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한 시민은 휴대폰을 꺼내 조심스럽게 촬영하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가까이 오는구나."
말보다 먼저 다가온 건 놀라움과 신비였다. 인간이 들어선 자리에 스치듯 나타난 생명과의 조우. 놀라지 않게 하려고 본능적으로 몸을 낮춘 순간, 그곳에는 정적과 경외감이 흘렀다.
잠시 후, 또 다른 고라니의 울음이 멀리서 들려왔다. 첫 번째 고라니는 긴장한 듯 숨을 죽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마리 고라니가 농성장 근처를 휘젓는다. 추격과 도망, 경쟁과 긴장이 오가는 야생의 몸짓이 어둠 속에서 펼쳐졌다. 동료들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싶은 고라니의 마음을 확인 했다.
죽은 강이 아니라, 살아 있는 땅
고요할 것만 같던 세종보 농성장의 밤은 결코 적막하지 않다. 이곳은 여전히 살아 있다. 고라니뿐만이 아니다. 흰수마자, 미호종개, 수달 같은 멸종위기종이 되살아난 강을 타고 돌아오고 있다. 모래톱이 드러난 자리에 새들이 다시 앉고, 작은 논과 습지는 제 역할을 되찾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생명은 여전히 위태롭다. 세종보가 아직 강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은 '정비'라는 이름으로 강의 숨통을 끊었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고, 물고기는 떠났으며, 둔치의 생명망은 파괴되었다.
문재인 정부는 세종보 해체를 약속했지만, 정권은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보 철거 논의가 사라졌고, 오히려 해체 계획은 전면 백지화되었다. 그렇게 생명은 정치의 타협과 무관하게 살아가고, 또 죽어갔다.
고라니, 멸종 위기의 그림자
▲기린초군락지에서 먹이를 먹는 고라니의 모습
고라니 이경호
우리가 만난 고라니는 단순히 '흔한 야생동물'이 아니다. 고라니(Hydropotes inermis)는 세계적으로 멸종위기에 처한 종이다.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은 고라니를 '취약(Vulnerable)' 종으로 지정하고 있다. 특히 중국에 서식하는 중국고라니는 '심각한 위기(Critically Endangered)' 상태이며, 사실상 한국만이 고라니를 천재(棲在)하는 나라다.
고라니는 물가 습지와 얕은 숲, 들판을 좋아한다. 강과 논, 습지 주변의 서식지가 파괴되면 가장 먼저 자취를 감추는 생물 중 하나다. 그런 고라니가 세종보 농성장에 매일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강이 흐르고 있고, 생태계가 회복되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이 보를 허물어야 한다. 그래야 강이 흐른다. 그래야 생명이 산다. 보 하나가 무너지면, 강 하나가 살아난다. 그리고 그 강을 따라 생명이 돌아온다. 우리는 그 마지막 경계에서, 고라니가 보여준 생명의 증거를 기억하며 싸우고 있다. 세종보는 철거되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보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생명 하나하나를 지키는 싸움이다. 더 이상 '여론'이나 '공론화'라는 이름으로 미루지 말고, 이제는 실행해야 할 때다.
강은 이미 말하고 있다. 살아 있는 생명이 그 증언을 대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