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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청년연합(1983-1992)은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맞서 공개적인 정치투쟁을 벌였다. 민청련의 상징은 두꺼비. 민담에 두꺼비는 뱀에게 대항했다가 잡아먹히지만 뱀의 뱃속에서 두꺼비 알이 부화해 뱀을 죽이고 그 자양분으로 수백 수천의 새끼 두꺼비들이 탄생하게 한다. 민청련 활동 중에 정권으로부터 당한 폭압에 많은 민청련 두꺼비들이 세상을 떠났다. 윤석열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광장의 젊은이들은 아마도 그들 두꺼비들의 후손이 아닐까. 민청련 두꺼비들이 살아냈던, 때로는 애틋하고 때로는 안타까운 삶의 흔적들을 함께 기억했으면 한다.
김근태는 인재근에게 청혼하기로 결심했다. 1978년 8월경이었다. 신랑은 32세, 신부는 26세 때였다. 그때 정황을 25년이 흐른 뒷날 김근태는 구술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인재근씨가 그때 부천에 살고 있었는데 독립해 살고 있었어요. 독립하고 살고 있다는 걸 알고, 그 집에 약도를 물어 찾아가서, 나 여기서 좀 살자고 했어요. 그때 26살. ⋯ 우선 좀 내가 살 데가 없다고 그러고, 거기서 내가 염색공장에 출근을 하고 그랬을 거에요. 살자고 우선 좀 살자고 하니까 받아들여졌고, 그때 내가 고단해서 코피 좀 흘렸을 거에요. 인재근은 코피 흘린 게 내게 연민의 정을⋯

김근태는 서울 성북구 월곡동에 위치한 염색공장에 취업해 있었다. 매일 오후 6시 반부터 새벽 3시까지 야간 근무를 해야 하는 보일러 직공이었다. 취침 시간은 고작 4-5시간이었다. 기관실 한켠에 놓인 허름한 침대에서 아침 8시까지 눈을 붙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고서는 낮에는 노동운동에 뿌리내리기 위한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사람들 만나서 연락하고, 의견을 나누고, 뭔가 결정된 일을 집행하곤 했다.

인재근의 자취방에 들이닥친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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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일상이었다. 수면 시간도 부족하고 영양 상태도 부실했다. 그의 벗 신동수는 회고했다. 그즈음 김근태는 피곤해 하고, 코피 잘 나고, 잘 조는 사람이었다. 모임을 마치고 각자 되돌아가느라고 전철이라도 함께 타고 갈 양이면, 으레 졸고 있는 그를 보았다. 전철 안에서 뭔가 좀 물어보려고 말을 걸려는데, 김근태는 벌써 잠에 취해있더라는 것이다. 인재근은 그런 남자 친구를 안타까워했다. 둘이 함께 있을 때 김근태가 코피라도 흘리게 되면, 인재근은 짐짓 유머로 대하곤 했다. 여자친구에게 연민의 정을 이끌어내려고 그러는 거냐고 물었다.

둘다 수배 중이었다. 김근태는 1975년 이래로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었다. '오둘둘 시위' 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혐의였다. 오둘둘 시위란 긴급조치 제9호를 발동한 박정희 정권의 폭압에 맞서서, 1975년 5월 22일에 일어난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시위운동을 가리킨다. 박정희의 폭정을 규탄하며 자결한 서울농대 학생 김상진의 추모집회이기도 했다. 수배를 받은 이후 벌써 3년이 지났다. 김근태는 그동안 쉼 없이 운동의 길을 개척했다. 학생운동에서 노동운동으로 이전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인재근도 수배를 받고 있었다. 그녀는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간사로 재임하면서 동일방직 노동조합 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경찰은 그것을 문제 삼았다. 그녀의 동료들이 연루된 재판이 1978년 5월 하순에 처음 열렸다. 김근태는 조언했다. 첫 재판이라서 인정심문만 했을 것이다. 앞으로 계속될 재판 중에 오고 가는 문답을 잘 정리하여 머리 속에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혹 불운하게도 뒤늦게 검거돼 취조를 받게 된다면, 이미 법률적으로 기정사실화되어 있는 사안에 한정해서 진술해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다행히 재판 결과 동료들이 집행유예 정도로 풀려난다면, 그때는 인재근에 대한 경찰의 추적도 종결될 터였다.

인재근은 경기도 부천 심곡동, 단독주택의 방 한칸에서 지내고 있었다. 원래 아버지가 지은 집인데, 다른 방은 셋방으로 내놓고, 방 하나만 사용했다. 터도 넓고 햇빛도 따사롭고 밝은 집이었다. 옆 쪽에는 모를 낸 논이 있고, 앞쪽으로는 세 개 산 봉우리가 보였다. 밤이 되면 개골개골 개구리 합창이 들리는 집이었다. 방도 시원스레 넓었다.

김근태는 그 집에서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결혼하자는 청혼의 말이었다. 두 사람 다 경찰의 수배를 받는 상태에서는 단순히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혼해서 같이 살면, 둘 다 좀 더 안전해 질 수 있지 않은가. 그뿐만이 아니다. 자신은 살 데도 마땅하지 않고 생활이 고단하므로, 같이 산다면 그 고단함이 덜어질 수 있었다.

김근태가 결혼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는 그해 5월 21일 인재근의 아버지를 만나 뵌 때부터였다. 그날 인재근의 집에서 아버지를 뵈었다. 김근태는 꾸밈 없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기로 결심했다. 지금의 처지에 대해서 물으시면 어떻게 할까 망설여지긴 했다. 딸도 미래의 사윗감도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부모로서는 쉽지 않은 충격을 받겠지만, 그렇더라도 거짓말을 하지는 않겠노라고 생각했다.

인재근이 "어머, 아버지"라고 외마디 소리를 냈다. 아버지가 딸네 집에 도착하신 것이다. 방안에 머물러 있던 김근태는 당황했다. 나란히 누웠던 베개와 담요를 치웠다. 금지된 어떤 짓을 하다가 들킨 것 같아서 무안해졌다. 아버지를 뵙자마자, 청년은 큰 절을 올렸다. 얼떨결에 한 일이었지만 적절한 행동이었다.

아버지는 몇 가지 물으셨다. 무슨 일을 하는지, 부모는 어떤 분이신지 등을 물었을 것이다. 결국 "모든 일, 자네를 믿겠네"라고 말씀하셨다. 순박함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표정도, 눈도 그랬다. 딸에게도 몇 마디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여자는 혼기가 차면 시집을 가고, 그 다음 단계에 그에 맞는 것을 해야 한다"는 타이름이었다. 그리고는 오래 앉아 있지 않았다. 후닥후닥 말하고는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사윗감 청년이 불편할까 봐 배려해 준 행동이었다.

어머니도 그 뒤 따로 만나 뵈었다. 사윗감으로 순순히 받아들이시는 것 같았다. 두 분 부모님 다 사윗감의 사람됨을 신뢰하는 듯했다. 오랜 삶의 연륜에 힘입어 내린 판단이었을 것이다.

인재근은 김근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결혼식이나 그 밖의 특별한 예식을 준비하지는 않았다. 신랑 신부가 둘 다 경찰에 쫒기는 처지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근태가 소지품 가방을 챙겨 들고 부천 인재근의 셋집에 들어서는 것으로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시작됐다.

 1978년 결혼을 기념하여 사진관에서 평상복을 입고 촬영한 사진
1978년 결혼을 기념하여 사진관에서 평상복을 입고 촬영한 사진 ⓒ 민청련동지회

두 사람은 결혼 기념으로 사진을 찍어두자고 의견을 모았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사진관을 찾았다. 특별히 의복을 갖춰 입지 않았고, 입던 옷차림 그대로 포즈를 취했다. 12월쯤 되는 겨울이었다. 신부는 두터워 보이는 재질의 셔츠를 입고, 양모로 짠 카디건을 받쳐 입었다. 머리카락이 어깨를 덮었다. 김근태 옷차림도 비슷하다. 격자 무늬의 두터운 셔츠에 면으로 된 털옷을 받쳐 입었다. 그의 머리 스타일은 장발이다. 당시 유행이었다. 구불구불 물결치는 풍성한 머리카락이 귀를 덮었다. 두 부부의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세상에 당당하듯 정면을 응시했다.

세상 밖으로 나온 김근태 인재근 부부

김근태와 인재근은 또 한번 결혼 사진을 찍었다. 1980년 4월 26일, 첫 번째 사진을 찍은 지 1년 반쯤 지난 때였다. 결혼식장에서 혼례복을 입고 찍었다. 곱게 차려 입은 신랑 신부가 앞에 서고 안경을 낀 점잖은 주례 선생님이 뒤에 자리 잡았다. 14개의 촛불이 놓인 연단 좌우에 '신랑 김근태군, 신부 인재근양'이라고 쓰여있고, 축하 꽃바구니 하나가 신부 발치에 놓였다. 띠에는 '축 화혼 김대중'이라고 적혀 있었다. 유력한 대통령 선거 후보자가 꽃바구니를 보낸 것이었다.

 1980년 4월26일 혜화동 흥사단 건물에서 거행한 결혼식 사진
1980년 4월26일 혜화동 흥사단 건물에서 거행한 결혼식 사진 ⓒ 민청련동지회

둘은 그새 나이가 들어서 각각 34세, 28세였지만 여전히 젊고 고운 나이였다. 새하얀 면사포를 쓰고 웨딩 메이크업을 한 신부가 특히 고왔다. 주례를 맡은 이는 서울상대 학장을 지냈고, 경제학과에 재직 중인 변형윤 교수였다. 신랑이 서울대에 재학 중일 때 그의 학문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영국 유학을 주선, 권유했던 스승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서울대내란음모사건'의 연루자로 지목되어 전국에 지명수배를 받고 있을 때, 김근태의 대학 졸업을 가능하게끔 배려해준 분이기도 했다.

하객들도 많았다. 결혼식 장소는 서울 혜화동에 위치한 흥사단 본부 건물이었다. 신경림 시인은 생애 말년(2022년)에 남긴 구술을 통해서 '까마득한 옛날'에 '근태 결혼식'에 참석했고, 변형윤 교수가 주례를 봤던 것을 상기했다.

두 개의 결혼 사진이 찍히는 사이 기간에, 그러니까 1년 반쯤 되는 시간 동안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공사 간에 그랬다. 첫 아이 병준이가 태어났다. 1979년 12월 태생이었다. 그 후 한달여 만에 김근태의 어머니가 세상을 떴다. 암 치료를 위해 원자력병원을 출입하던 노모가 1980년 1월 20일에 돌아가셨다. 공부를 잘해 기대가 크던 막내 아들이 경찰에게 쫒기며 수배자 생활을 하는 것이 못내 가슴 아프던 어머니였다. 다행히 막내 아들 장가간 것도 보았고, 첫 손자가 출생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제서야 생명의 끈을 놓은 것을 보면, 걱정하는 마음을 비로소 내려 놓았던 것 아닐까.

정치권력의 급격한 변동도 있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독재자 박정희가 암살됐다. 18년간 계속되던 독재 체제가 권부의 내분으로 붕괴됐다. 그로부터 한 달 반만에 12.12 사건이 일어났다. 신군부 내부의 역관계가 전두환 중심으로 재편됐다. 1980년 봄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세 사람이 '3김'이라고 불리던 시기였다. 곧 다가오리라 믿고 있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다각적인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또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고조되면서 아래로부터의 민주혁명의 열기가 점차 뜨거워지고 있었다.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불안정한 정치 정세가 조성되어 있었다.

정세 변동 덕분에 신랑 신부의 수배자 신분이 사실상 해제됐다. 자유로운 합법적인 활동 영역이 열렸다. 경찰에 쫓기며 은밀한 수배자 생활을 해오던 학생운동, 노동운동 참여자들이 이 시기에 하나 둘 결혼식을 올렸다. 김근태, 인재근 부부도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 상을 당하지 않았는가. 결혼식을 미루려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가족과 친지들이 간곡하게 권유했다. "너희들 그러다간 평생 결혼식도 못해 볼지 모른다"고.

결혼식 날 신랑 신부는 생후 4개월 된 아들 병준이를 안고 식장에 등장했다. 또래 수배자들이 다 그랬다. 어린 아이를 업고 안은 채들 결혼식을 올렸다. 그뿐인가. 부부는 신혼여행도 셋이서 함께 했다.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서 공주 우금치로 갔다. 갑오농민군의 기개와 희생을 부부가 함께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갓 백일이 지난 아들 병준이는 떼도 쓰지 않고 잘 울지도 않고 착하게 굴었다. 마치 엄마 아빠에게 결혼 선물이라도 주는 듯 했다.

 김근태 인재근 부부가 갓 백일 지난 어린 아들 김병준을 안고 1980년 신혼 여행지로 방문했던 공주 우금치 전적 기념비.
김근태 인재근 부부가 갓 백일 지난 어린 아들 김병준을 안고 1980년 신혼 여행지로 방문했던 공주 우금치 전적 기념비. ⓒ 국가유산청

"내 정식 결혼은 부천 심곡동 단칸방"

뒷날 30년이 흐른 뒤, 인터뷰어가 김근태에게 물었다. "수배자 시절에 결혼도 하시고, 득남도 하시고 그러셨잖아요. 1978년 8월에 약식으로 결혼하시고, 1980년도 4월달에 다시 정식 결혼을 하셨지요"라고. 잠시 생각하더니 김근태는 답했다. 인터뷰어의 표현을 정정했다. 앞의 것이 정식 결혼이고, 뒤의 것은 사회에 신고하는 결혼이었노라고. 부천 심곡동 한칸 방에서 둘만이 치렀던 남루한 결혼이 김근태에게는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제대로 된 정식 결혼이었던 것이다.

#민청련#김근태#인재근#2025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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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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