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으로 보존한 그날의 기억
과거사 답사는 여느 역사 답사와 다른 점이 있다. 일반적인 역사 답사는 건축물이나 유물, 유적지 등 과거의 흔적이 최소한 남아 있고 그걸 실마리로 답사를 진행하는데 과거사 답사는 현장에서 과거 사건의 흔적을 찾기 힘든 경우가 많다. 민간인학살의 경우 인적이 드문 외곽 지대나 깊은 산골짜기에서 사건이 일어났고, 사건 발생 직후 유족들이 현장에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그 후에도 국가는 사건을 철저히 은폐해 왔다.
사건을 입 밖에 내는 것조차 금물인 그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유가족들은 사건의 흔적을 땅 위에 남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답사 현장에서 만나는 위령비는 그러한 유족들의 노력의 결실이며, 우리에게 사건의 기억을 전해주는 '매체'로서 중요하다. 그러다 과거사 답사를 하다보면 사건의 규모와 중요성에 비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아무 표식이 없는 곳이 많다.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 응당 있어야 할 안내판이나 기념물이 아니라,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이 유족들의 몸과 마음을 '매체'로 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전쟁 피해 기억의 대멸종 앞에서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졌어도 상황은 그리 좋지 못하다. 현장에는 여전히 사건을 알 수 있는 시설이 별로 없다. 일부 현장에만 위령비나 진실화해위원회 안내판이 있을 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 지역 시민들도 사건에 대해 잘 모른다. 답사를 하다보면 '우리 지역에서 이런 일이 있었는지 처음 알았다'며 놀라고 허탈해 한다.
왜 과거사 사건은 오늘날 제대로 기억되지 못한 채 잊혀지고 있을까? 단순히 무관심해서가 아니다. 민간인학살과 그 기억은 사건 발생 당시부터 국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억압되었고, 교육 과정, 미디어의 관심 밖에서 방치되었다. 일반적인 교육 과정과 미디어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알기가 더 어렵다. 노근리사건, 거창사건처럼 일찍부터 알려진 사건과 달리 전국의 산골짜기, 바닷가, 들판 여기저기에서 일어난 수많은 민간인학살들이 지역 주민들에게 알려지기는 참으로 난망이다.
흔적을 남기지 못한 기억들은 이제 차츰 사라질 운명이다. 한 사건의 기억을 생물 종 하나로 친다면 우리는 1950년 한국전쟁 전후 일어난 민간인학살 사건에 관한 망각, 기억의 대멸종을 목적에 두고 있다. 머지않아 당시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세대 전체가 사라지고 나면 우리 사회는 전쟁 피해에 관한 기억의 커다란 맹점을 영원히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답사로 시작하는 과거사 기억 활동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을 비롯한 국가폭력을 기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중에서 현장 답사는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중요한 기억 활동이다. 그래서 다크투어리즘, 메모리얼투어 같은 명칭으로 어두운 역사, 상처 입은 공간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이 많이 운영되고 있다. 전라북도에는 만경강을 끼고 서로 이웃한 익산과 전주 두 도시에 한국전쟁기 민간인 집단피해 사건을 볼 수 있는 답사지가 있다.

▲만경강 위아래의 익산, 전주와 국가폭력 답사지 ⓒ 구글맵
한 번은 폭격으로, 또 한 번은 폭발로 파괴된 익산역
1950년 7월 11일, 전쟁 발발 후였지만 이리는 평온했다. 이리시와 인근 익산군 주민들은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실감하지는 못했다. 다만 이리역 앞, 극장 등지에서 지역 국회의원의 주도로 시국강연회가 열렸고, 젊은 남자들은 징집대상이 되었으며, 비행기가 가끔 날아다는 정도였다. 평온함이 깨진 것은 오후 두 시경이었다. 음악 수업 중이던 이리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은 비행기 소리를 듣고 운동장으로 뛰쳐나와 책보와 종이를 던지며 장난을 쳤다. 그런데 비행기에서 무언가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폭탄이었다.
비행기는 2대였고 양쪽 날개에 프로펠러가 있었으며 원 안에 별 모양과 줄무늬가 선명했다. B-29는 이리역과 그 주변을 무차별 폭격했고 주민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군은 왜 후방 지역인 이리역을 폭격했을까? 두 가지 설명이 있다. 미군 조종사들이 이리시를 교전 지역인 천안, 평택으로 잘못 알고 폭격했다는 것과 진화위 보고서가 제시한 또 다른 가능성으로 개전 초기 수세에 몰린 미군의 기간 시설 파괴작전에 따른 폭격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오폭이었거나 계획된 폭격이었거나 간에 민간인이 희생된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1948년 폭격으로 파괴되기 전인 이리역 모습 ⓒ 국토정보맵

▲익산역에 있는 1950년 미군 이리역미군폭격 희생자 위령비와 이리역 폭발 희생자 추모탑 ⓒ 강변구
이리역은 그로부터 27년 후 다시 파괴되었다. 이번에는 폭격이 아닌 폭발이었다. 1977년 11월 10일 인천에서 광주로 가는 한국화약주식회사의 화약열차가 이리역에 머무는 동안 다이너마이트 914상자 22톤, 초안폭약 100상자 2톤, 도화선 1톤 등 대량의 화약을 실은 상태로 폭발을 일으켰다. 당시 열차 호송 직원이 열차 안에서 잠을 자면서 화약상자 위에 양초를 켜 두었다가 불이 옮겨 붙은 것이다. 엄청난 폭발로 인해 이리역 구내에 깊이 15m, 직경 30m의 큰 웅덩이가 패였다. 위험물질을 실은 기차가 역 구내에 지나치게 오래 머물렀고, 위험물 관리 소홀까지 겹쳐 발생한 인재이자, 국가의 재난참사였다. 폭발 사고로 사망자 59명 등 1402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익산역 답사는 그나마 위령비가 있어서 다행이다. 현재 익산역 광장 주차장 쪽에 있는 '미군 이리역폭격 희생자 위령비'가 유일한 실마리가 되어 준다. 이리역 폭발 사건을 알려면 주차장에서 역 구내로 더 들어가서 선로 옆에 있는 '이리역 폭발 희생자 추모탑'으로 가면 된다. 위령비는 그나마 역 광장 한 켠에 있는데, 추모탑은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다. 광장에도 추모탑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가 있었으면 한다.
전주 황방산에 묻은 뼈항아리
2003년 4월 14일 오전. 전주시 서쪽 외곽에 위치한 황방산에 고 이도영 박사와 월간 <말> 김재중 기자, 전주형무소 형무관으로 근무했던 고 이순기씨, 유족 조병권씨가 모였다. 이순기 전 형무관이 학살 장소를 정확히 짚었다. 하지만 그곳엔 이미 납골당이 들어서 있었다.
"바로 여긴데 건물이 들어서 버렸구만."
건물을 지을 때 다량의 유해가 나왔을 거라고 추측되지만 행방을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취재팀은 안타까운 마음을 누르고 납골당 건물 뒤쪽으로 올라가 보았다. 그때 김재중 기자의 눈에 잡풀 속에서 햇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는 물체가 눈에 띄었다. 흙 위로 드러난 유해였다. 전주형무소 사건의 진실은 그렇게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다. 짧은 시간 발굴에도 유해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아버지를 잃은 조병권 유족의 탄식이 이어졌다. 그러나 더 이상 발굴을 진행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유해는 항아리에 수습해 다시 땅에 묻었다.

▲유해를 항아리에 임시 안치하고 있다. ⓒ 월간 <말>

▲2003년에 묻은 뼈 항아리가 2019년 1차 발굴 때 다시 나왔다. 그 자리에 선 성홍제 유족회장. ⓒ 성홍제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전주형무소에서 학살된 민간인 2400여 명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전주시 진북동(현 전주동부교회 인근)에 위치했던 전주형무소에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4·3사건, 여순사건 관련자들이 많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7월 초순부터 중순까지 육군 7사단 3연대 소속 군인들에게 끌려나간 후 집단사살되었다. 희생 규모는 1400여 명으로 추산되는데 재소자들은 전주형무소 인근 공동묘지, 소리개재, 황방산 등지로 끌려가 학살되었다. 대부분 전주시 외곽에 위치한 곳이면서도 도로를 이용해 차량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군경이 후퇴한 다음에는 인민군이 전주를 점령했다. 인민군들은 텅 빈 전주형무소에 우익인사들을 채워넣었다.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1950년 9월 26일, 27일 양일간 전주형무소에서 인민군 102경비연대, 전주형무소장 이하 간수, 내무서원, 지방좌익에 의해 '반동분자'로 규정된 우익인사가 1000여 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판단되며, 같은 시기에 전주 소재 장로교신학병원(현 전주예수병원) 근처 채석장, 완주군수 사택 안마당 방공호, 천주교회 앞 방공호 등에서 60명 정도가 희생"되었다. 학살 이튿날 28일, 인민군이 전주형무소를 전소키시고 시신을 방치한 채 철수했다.
이렇게 석 달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민간인 2400여 명
이 국군과 인민군에 의해 차례로 희생되었다. 국군에 의한 학살이 집단 총살 후 매장하는 방
식이었던 데 비해 인민군에 의한 학살은 형무소 인근에서 곡괭이, 삽 등으로 후려치는 방식
으로 이루어졌으며 175구를 제외하고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해갔다. 수습되지 못한 175구의
시신은 현재 황방산 학살 현장 바로 근처의 '애국지사묘'에 안장되어 있다.

▲전주동부교회 뒤편 골목. 왼쪽 주택 구역이 형무소가 있던 자리이다. 오른쪽 교회 자리는 형무소 공장 등이 있었다. ⓒ 강변구

▲황방산에 위치한 애국지사묘. 인민군 등에 의해 희생된 우익인사 175구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 강변구
'기억의 매체' 없이 기억 전승이 가능할까
전주형무소 사건을 알리는 기억 매체는 황방산 현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선 희생지 표지판과 반대편의 '애국지사묘'뿐이다. 두 기억 매체의 맥락 없는 병치와 그 사이의 깊은 균열 앞에서 해설자는 무슨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새삼 당혹감을 느낀다. 답사 참여자는 오로지 해설자의 설명만으로 당시 사건을 상상해야 한다. 이런 자리에 위령비가 세워지고 시민들에게 사건의 내용을 알려줄 기념관(추모관) 같은 안내시설이 있다면, 그리고 전주형무소 터인 전주동부교회 골목에 작은 안내판이라도 하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부터 황방산은 전주 서북방 외곽에서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12.3내란의 먹구름을 찢고 평화의 빛이 밝아오는 때에 관련자 수사와 처벌 이후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국가폭력의 원류로 거슬러 올라가길 원한다면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우리가 사는 동네 주변의 학살지를 찾아가 보자. 정보를 수집하는 일은 간단하다. 지역명을 넣고 민간인, 학살을 함께 검색하면 전국 거의 모든 군 단위에서 크고 작은 사건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에 아연실색하게 된다.
기억의 매체 없이도 기억이 전승될 수 있을까? 상처 입었던 몸이 썩어서 편안해지고, 고통스러운 영혼도 하늘로 올라간 뒤에는 텅 빈 현장만 남는다. 그러다 찾는 사람이 줄어들고 기억하는 사람도 없어진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우리가 잊어버린 폭력의 역사는 언젠가 낯설고 기괴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다. 뒤늦게 그것이 우리가 잊어버린 무엇과 묘하게 닮았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는 이미 늦다. 죽은자가 산 사람을 구해주려면, 일단 우리가 먼저 그들을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황방산 학살 현장을 알리는 표지판. 2009년과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 후 설치된 표지판이 훼손되어 2016년에 다시 세웠다. ⓒ 강변구
*글쓴이
강변구는 역사책 편집자로 일했고, 지금은 전주에 살며 대학원에서 기록학을 공부합니다. 국가폭력 기록, 기억 활동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인천월미도 미군폭격 사건을 다룬 <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를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