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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①] "약 털어 먹어가며 재봉질... 그땐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열아홉 살부터 50여 년 봉제일을 해온 이근표는 몸을 혹사하며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딱 한번 욕심을 낸 적이 있다. 호황기를 틈타 사업에 도전했다. 패션 브랜드들이 많아지고, 이대 앞 보세 의류사업으로 시작한 이랜드가 큰 회사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친구들과 의기투합했다. 미싱사 다섯이 모여 패션브랜드들의 하청공장을 차렸다.

하지만 경영은 의욕만으로 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하는 방식이 다른 미싱사들이 모여서 일을 하려니 계속 어긋났다. 뜯어서 다시 박음질하고 또 다시 뜯는 일이 많아졌다. 본사에서 나온 품질점검을 통과 못하는 경우도 생겼다. 돈을 벌기보다 까먹기만 했다. 이러다가는 빚까지 지겠다는 위기 의식에 2년여 만에 공장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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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안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이근표는 얼마 뒤인 1989년 결혼을 한다. 서울에 올라와 13년 동안 수많은 옷을 만든 뒤였다. 일하면서 우연히 만난 이천의 옆 동네 여주 출신 아가씨, 정용숙에게 마음이 갔다. 만나면 동향이라고 괜히 말을 걸곤 했다. 궁합도 안 본다는 네 살 차이였다. '오빠' '오빠'로 불리다가 남편이 되었다. 그때부터 계속 짝을 이뤄 옷을 만들었다. 1년 365일, 하루 24시간을 내내 붙어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저녁에 어디 가서 술 한 잔 하고 싶어도 미안해서 못 가는 건 안 좋은데, 아내이니까 뭐든 맡길 수 있고 심적으로 안정돼서 좋아요."

 친구들과 차렸던 하청공장을 접고 결혼을 한 이근표씨는 단칸방 월세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친구들과 차렸던 하청공장을 접고 결혼을 한 이근표씨는 단칸방 월세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 윤성희

부엌 하나 달랑 달린 단칸방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저는 아무 것도 없었어요. 예식도 아내가 가져온 돈으로 하고... 장모님이 많이 도와주셨죠. 장모님 생각하니까 괜히 눈물 나네."

결혼한 해에 첫째가 태어났지만 정용숙이 일손을 놓을 형편이 아니었다. 갓난아이를 어머니한테 맡긴 채 출산 6개월 만에 재봉틀을 다시 잡았다. 부부가 주말, 휴일 가리지 않고 계속 일을 했다. 아현동에 방 2개짜리 전셋집을 얻을 정도로 돈이 모인 뒤로는 정용숙의 어머니가 아예 들어와 함께 살았다.

"둘째를 낳을 수가 없었어요. 사글세에 아무것도 없으니 벌어야 하니까요. 근데 첫째 다섯 살 때 전셋집으로 옮기면서 다른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용숙이 '다른 생각'을 한 덕에 형과 다섯 살 차이 나는 둘째가 태어날 수 있었다. 그 전셋집에서 거의 20년을 살았다. 이근표의 다짐 덕분이었다.

"내가 어려서 학교를 여러 군데 다녔기 때문에 우리 자식들만큼은 한 군데에서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얘기를 아들들한테도 여러 번 했고요. 둘째가 군대 휴가 나와서 자기는 아현동이 고향이어서 친구들이 엄청 많다고 하더라고요."

둘째가 열아홉 살이던 2016년 집을 사서 이사를 갔다. 부부가 쉬지 않고 20년 넘게 일한 덕분이었다. 26년을 같이 살면서 살림을 도맡아온 이근표의 장모가 장하다면서 누구보다 좋아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집을 산 지 1년여 뒤 쓰러진 장모는 201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 새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집의 밑바탕이 된 사람이에요. 우리 친정엄마가 아이들 다 키워주고, 우리를 일어나게 해줬으니까요."(정용숙)

이근표 부부에겐 여전히 감사하고 그리운 사람이다.

단가는 떨어지고 4대 보험은 꿈도 못 꿔

반 백 년 봉제노동자로 일하면서 이근표는 서울의 여러 지역을 오갔다. 패션산업이 부침을 겪을 때마다 하청공장들도 영향을 받아 계속 변두리로 나갔기 때문. 그도 신림동, 망원동에서 일하다가 지금 일하고 있는 신당동 공장으로 옮겼다. 웨딩업체의 하청으로 결혼식 피로연 때 입는 화사한 옷들을 만든다.

"패션산업이 잘 될 때는 많이 벌었죠. 일을 많이 했으니까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본사에서 자꾸 잡일을 시키더라고요. 와서 가져가던 옷들을 협력업체더러 갖고 오라고 하고, 옷에 씌우는 포리백도 본사에서 하던 걸 하청에 떠넘기고요. 그러면서 단가들이 떨어졌어요."

옷 한 벌 당 본사에서 받은 돈을 미싱사와 협력업체 사장이 절반씩 가져가는 구조였다. 미싱사는 받은 공임을 다시 미싱보조와 나눈다. 그런데 협력업체 단가가 떨어지면서 미싱사가 가져가는 돈도 줄어드니 봉제인들은 장시간 노동으로 줄어든 수입을 메우고 있다.

"아직도 옛날 시스템 그대로 굴러가요. 건너 공장 사람은 일만 있으면 새벽 6시나 6시 반에 출근해서 저녁 8시, 9시까지 해요. 말로는 나이 들어 잠이 없어서 일찍 나온다는데 그게 아니야. 패션 시장들 대부분이 그래요. 밥 먹는 데 5분도 안 걸리나 봐. 그렇게 밥 먹고 5분도 안 쉬고 바로 일을 하더라고요."

 봉제업은 현재도 4대 보험을 적용받는 사업장이 거의 없다. 이근표씨는 심장수술을 받으면서 보증인을 세워야 했었다.
봉제업은 현재도 4대 보험을 적용받는 사업장이 거의 없다. 이근표씨는 심장수술을 받으면서 보증인을 세워야 했었다. ⓒ 윤성희

여전히 봉제업에서는 하루 12시간 노동이 우습다. 그런데도 수입이 20~30년 전과 같으니 새로 봉제일을 시작하는 젊은 노동자들이 없다. 대부분 환갑을 훨씬 넘겼고, 50대 노동자도 귀하다. 봉제업을 떠나는 이들도 많다. 여성들은 요양보호사 등으로 많이 빠졌다. 똑같이 저임금이긴 하지만 4대 보험도 되고 노동시간도 더 적어 좋아한다고. 그래서 떠난 사람들은 잘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은 옷들을 다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데서 만들어 오니 우리가 설 자리가 굉장히 좁죠. 4대 보험, 퇴직금 같은 것도 없고, 그냥 열심히 일만 해야 돼요. 지금 와서 후회하는 게 그렇게 열심히 일한 거예요. 친구들 중에서 내가 제일 동안이었는데 지금은 제일 늙어 보여요."

변변한 환기시설도 없는 공장에서 50년 가까이 먼지를 먹으며 일해 오면서 이근표는 몸이 많이 상했다. 2012년 위암 수술을 받았고, "심장도 한 번 뚫렸죠".

"심장수술을 받아야 했는데 아내가 어찌할 바를 몰랐대요. 의료보험이 없다고 병원에서 월급쟁이로 보증인을 대라고 해서요. 처형 동서한테 (보증을) 부탁했더라고요."

수술 후 보증인 이야기를 들은 그는 이 일을 그만 둬야 하나 잠깐 고민도 했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재봉틀을 놓을 수 없었다. 수술하고 1주일 만에 바로 일을 시작했다. 그나마 위암 수술 받고는 2달 가까이 일을 쉬었다. 그동안 그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미싱사를 새로 구하기 힘들기 때문. 잘릴 걱정은 없었지만 일을 못하는 동안 생계 걱정은 컸다. 유급병가도, 산재보험도 신청할 수 없는 현실이 야속했다.

좋은 인력을 두고 왜 명품을 못 만들까요?

망원동에서 일하던 2013년 그가 앞장서서 미싱사들의 모임인 '다다회'를 만들었다. 사장과 객공이 1:1로 받던 공임이 자꾸 줄어들고 사장들의 횡포가 심해지면서 미싱사들끼리 뭉칠 필요를 느꼈다. 함께 모여서 미싱사들의 처우 개선을 도모하길 희망했다. 공장들의 노동 조건 정보도 공유하고 친목도 다졌다.

한 사람 두 사람 모여 어느새 50명이 넘었다. 그 힘으로 다다회를 앞세워 사장들을 만나면서 토요일을 격주라도 쉬자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사장들도 공감해 1~2년 정도 지켜졌지만 어느 순간 토요일에 일하는 공장들이 다시 늘어났다. 아웃도어가 유행하면서 일이 줄어든 시기였다.

"요즘은 주로 온라인 쇼핑몰로 주문이 들어오는데 거긴 배송날짜를 박아놓고 판매를 하잖아요. 그 날짜에 맞춰야 하니까 월, 화요일에 놀다가도 주문이 들어오면 수목금토를 오래 일하게 되죠. 일이 없으니 일감이 조금만 들어와도 사람들이 정신없이 일하면서 다시 옛날처럼 되더라고요. 그렇게 반복이 되는 게 참 불쌍하죠."

다다회 모임을 이어가던 2018년,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산하에 서울봉제인지회가 출범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 꿈이었어요. 봉제인들이 일하는 시간이 줄고 처우가 좋아지길 바라고 다다회를 만들기도 했으니까요. 봉제인지회가 그걸 해줄 것 같아 바로 가입했지요."

 이근표씨는 봉제인들이 토요일은 쉬었으면 하는 마음에 미싱사 모임을 꾸리기도 하고, 서울봉제인지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이근표씨는 봉제인들이 토요일은 쉬었으면 하는 마음에 미싱사 모임을 꾸리기도 하고, 서울봉제인지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 윤성희

봉제인지회는 봉제인공제회도 만들었다. 사고를 당하거나 갑자기 아플 때, 비수기에 일이 없어서 생활이 힘들 때 어디 손 벌릴 데가 없는 봉제노동자들끼리 서로 부조하며 의지하기 위한 장치였다. 하지만 조합원 몇 백 명에 불과한 봉제인지회로는 사양산업으로 치부되는 봉제업의 내리막길을 막을 뾰족한 방도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10명 미만 영세 공장이 대부분인 한국과 달리 베트남, 중국의 공장 규모는 크다. 그나마 예전엔 소량 생산은 국내에서 이루어졌는데 지금은 해외 공장들도 옷을 몇 십 장씩 생산하기도 하니 경쟁이 안 된다.

"우리 봉제 산업을 지켜야 하는 이유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왜 이 좋은 손기술을 활용 안 할까요? 왜 자꾸 외국에 가서 품질 안 좋은 옷만 만들고, 재고가 쌓여 쓰레기가 되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기술개발만 하면 구찌 같은 명품을 우리가 더 잘 만들 수 있을 텐데... 이리 좋은 인력을 가지고 있는데 왜 그런 유명 브랜드를 못 만들까요?"

그는 해외에서 옷을 만들더라도 쿼터제라도 도입하기를 희망한다. 60%는 해외에서 생산한다면 40%는 한국에서 생산하는 식 말이다.

"아무리 사양산업이더라도 지금 일하는 사람은 어떻게 먹고는 살게끔 해줘야 하지 않겠어요?"

"좋은 옷이요? 제가 만든 옷이요"

이근표는 2019년 지금 공장으로 옮기면서 월급제를 택했다. 근무시간도 오전 9시 출근, 오후 7시 퇴근을 지키려고 한다. 주말에도 쉰다. 보통 직장에선 당연한 일이 봉제업에선 유별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바꾸고 싶지는 않다.

"월급제를 택한 건 벌이가 너무 굴곡이 심해서예요. 어떤 달은 둘이서 700만 원을 벌다가 어떤 달엔 400만 원을 버는 식이니까요. 또, 객공은 하나라도 더 만들어야 하니까 쉬운 작업하려고 옆 사람들하고 눈치보고 경쟁해야 되는데 그것도 싫었고요."

공장 사장도 봉제인지회 조합원이어서 월급제가 가능했다. 통하는 게 많지만 4대 보험은 이곳도 없다. 사장도 보험료를 감당할 형편이 안 되기 때문. 공장을 옮기면서 이젠 월급쟁이가 됐다고 하자 둘째아들이 "아빠, 그럼 4대 보험 들어가?"라고 물었다. 안 된다고 하자 아들은 "지금도 그런 데가 있느냐"면서 "요즘은 알바를 해도 4대 보험은 들어주는데…"라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여전히 근무 조건은 열악하고, 월급제로 수입도 줄었다. 하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난 걸로 만족한다. 부부가 함께 산책을 하고, 2주에 한 번씩 이천에서 혼자 지내는 이근표의 어머니를 찾아간다. 두 번의 수술을 하면서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건강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은 덕분이다.

"마음의 여유가 생겼죠. 그렇다고 객공 때만큼 일을 안 하는 건 아니에요. 해줄 만큼 해줘야 내가 떳떳하게 월급을 받으니까요. 미싱하는 친구들이 정시에 출퇴근하고. 토요일엔 쉬면 좋겠어요. 너무 새벽같이 나와서 일하지 말고요. 자기 몸 축나는 줄도 모르고 그러는 걸 보면 참 안타까워요. 이 얘길 꼭 하고 싶어요."

 어떤 옷이 좋은 옷이냐고 묻자 이근표 씨는 "제가 만든 옷"이라고 답하며 웃었다. 실제로 그는 TV에서 그가 만든 옷을 입고 나오는 방송인, 연예인들을 종종 본다.
어떤 옷이 좋은 옷이냐고 묻자 이근표 씨는 "제가 만든 옷"이라고 답하며 웃었다. 실제로 그는 TV에서 그가 만든 옷을 입고 나오는 방송인, 연예인들을 종종 본다. ⓒ 윤성희

계속 무거운 이야기가 이어져서 분위기를 바꾸려고 그가 생각하는 좋은 옷이란 무엇인지를 물었다. "좋은 옷이요?"라고 되묻던 그가 "제가 만든 옷이요"라고 답하고는 '하하하' 웃었다.

"평범하게 꾸준하게 입을 수 있는 옷들. 그러면서도 유행도 크게 타지 않아도 예쁜 옷들이 있잖아요. 유명 브랜드들 보면 디자인이 복잡하지가 않아요. 심플한데 안에 처리를 예쁘게 하지. 지금은 겉보다는 안 디테일을 참 많이 신경 쓰더라고. 그건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왜 못할까요?"

TV를 보다가 종종 부부가 만든 옷을 입고 나온 사람들을 본다. 뉴스 기상캐스터, <히든 싱어>에 나온 가수 엄정화 등등. 잠깐만 나와도 한눈에 "저거 우리가 만든 거야" 알 수 있다. 일은 힘들지만 우리가 만든 옷을 예쁘게 입는 사람들을 보면 뿌듯하다. 그래서 부부는 고되지만 이 일을 손 놓을 수 없다.

첫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을 찍기 위해 오늘 만든 옷 좀 보여 달라고 하니 조용조용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던 이근표의 얼굴이 밝아진다. "여기서는 베스트라고 하는데 오늘은 이 작업을 했어요. 한번 보여드릴까요?" 의자에서 바로 일어나 테이블 건너에 있는 하얀색 볼레로와 조끼를 들고 와서 "이 정도면 입을 만하겠죠?"라며 묻는다.

목소리에 뿌듯함이 가득 담겼다. 아닌 게 아니라 화사한 옷을 보니 자연스럽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50년 봉제장인의 혼이 담긴 옷을 보니 사그라지고 있는 빛을 붙잡고 싶었다. 사양산업에는 새 길이 없는 걸까? 아니면 새 길을 만들 의지가 없는 걸까? 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을 붙들고서 어둠이 내린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워크진 <일과봄>에도 실립니다.하루하루를 정성껏 살아내는 이들의 인생이야기를 전합니다. 그의 삶에서 우리의 인생을 엿봅니다.

*이 기사는 이근표씨를 지난 2023년 8월부터 2025년 5월까지 4차례 정도 만나서 인터뷰를 진행한 것을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땀의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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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엔 이야기가 있다는 믿음으로 삶의 이야기를 찾아 기록하는 기록자. 스키마언어교육연구소 연구원으로 아이들과 즐겁게 책을 읽고 글쓰는 법도 찾고 있다. 제21회 전태일문학상 생활/기록문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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