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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혁명으로 이승만 독재는 종언을 고하고, 허정의 과도정부에 이어 내각책임제 개헌에 따라 실시된 총선으로 장면 민주당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동안 반독재투쟁을 벌여온 민주당은 집권 과정에서 신구파로 분열하고, 신파의 장면이 간신히 내각책임제의 첫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지식인(선비)의 정치참여를 두고 예부터 논란이 많았다. 공자의 주장은 명쾌하다.

"나라에 도가 섰을 때는 나서야 하고, 도가 깨지면 나서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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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왕도(王道)일 때는 나서도 되지만 패도(覇道)일 때 공직을 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유교사회의 올곧은 기준이었다.

장준하는 4월혁명을 학생과 지식인 중심의 혁명으로 인식하면서, 혁명과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지식인의 역할과 책임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당시 <사상계>를 중심으로 엮어진 지식인 그룹은 어느 대학이나 언론사에 못지 않는 유능, 유력한 집단이었다. 이 같은 현상은 박정희정권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세간에서는 '사상계 그룹'을 새도우 캐비넷(예비내각)에 비유하기도 했다. 실제로 <사상계> 편집위원 중에 국무총리나 장관에 기용된 사람도 여럿 있었다.

장준하는 참으로 '인복(人福)'이 많은 편이었다. 독립운동과 귀국하여 김구 주석을 모실 때나, 특히 <사상계> 시절에는 한국의 대표적인 지식인들과 교우관계를 갖게 되었다. 여기에는 <사상계>가 한 시대의 지성과 양식을 대표하는 잡지라는 평가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지만, 장준하 개인의 겸손한 품성과 학구적인 인품에 기인한 바도 적지 않았다. 그는 <사상계>의 경영이 대단히 어려울 때에도 필자의 원고료를 거르지 않았고, 빚을 내서라도 필자·학자들을 융숭히 접대했다. 지식인을 대접할 줄 아는 '지식 경영인'이었다. 자기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한 처지에서도 동지들의 어려움을 들으면 망설이지 않고 도왔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항상 인재들이 모이고, <사상계> 편집위원의 구성은 전문분야에서 최고수준의 인물을 선임했다. 장준하가 민주당 정부에 참여하게 된 것은 편집위원인 김영선이 교량역할을 했다.

김영선은 장면 국무총리와 가까운 경제통으로 민주당 정권이 수립되자 재무장관이 되었다. <사상계>의 동인 중의 일원이었던 그는 장준하와도 가까운 사이였다. 하여, <사상계>사내에 '국제연구소'를 설치하기로 합의하고, <사상계> 편집위원들을 주축으로 한 국내의 학계·언론계·문화계·경제계의 저명인사 30여 명을 연구위원으로 위촉하여 활동을 개시했다. 첫 사업이 30여 명 모두에게 연구 착수금을 지급하고 연구과제를 주어 그 중 10여 개 완성된 논문을 <사상계> 특별부록으로 출간했다.

<사상계> 1961년 2월호부터 5월호까지 3회에 걸쳐 발표된 필자와 논문은 다음과 같다.

이갑섭, '외국원조 도입의 제문제', 박기순, '무역정책의 방향', 나웅배, '우리나라 재정의 구조문제', 박동묘, '곡가정책의 문제점과 그 혁신책', 최철주, '농지개혁과 한국농업', 한웅빈, '한국농업금융의 이상책' 등이다.

장준하는 <사상계>가 집권당 정책산실의 역할을 한 데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렇게 되자 <사상계>사는 잡지사라기보다 오히려 나라 정책 산실과도 같은 것이 되었으며, 종래에는 국정에 관한 토론이라도 잡지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후부터는 직접 국정에 반영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그 생각이 앞섰던 것이 사실이었다."

장준하는 이승만 치하에서 <사상계>의 정치적 중립을 고수해 왔던 원칙을 바꾸어 직접 장면 정부의 '정책산실'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을 두고 뒷날 "후회도 되지만 그때로서는 부득이"한 바도 없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부득이'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는 오매에도 잊을 수 없이 지긋지긋하였던 독재(자유당 정권)가 쓰러지고 바야흐로 나라가 자유의 신천지가 되려는 그 시점에 그 나라를 피안의 잔치집으로만 건너다 볼 수는 없는 것이고, 둘째는 이 땅에 난생 처음으로 민중의 힘으로 쟁취한 민주주의가 시작되는 것으로 그 유아적인 민주주의를 기르는데 정치하는 사람에게만 맡겨서는 힘이 부친다. 그러니 우리가 도움을 주어 함께 길러 나가자. 이런 생각이 <사상계>의 전 동인들의 일치된 견해였고, 셋째는 그 건의 당사자인 김영선 장관 자신이 우리의 중요한 동인으로 늘 생각을 같이하여 온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의견은 곧 우리 전동인의 의견이나 같은 것이었다는 그것 등이었다.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실록소설장준하#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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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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