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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1960년으로 예정된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 대비하여 비판세력 제거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정적 조봉암을 구속하고, 함석헌을 구속한데 이어 12월 19일에는 민주당 의원들이 점심시간에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보안법 개정안을 3분만에 국회 법사위에서 변칙처리했다.

야당과 무소속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농성에 들어가자 12월 24일 자유당의 한희석 국회 부의장은 경위권을 발동하여 무술경위 3백여 명을 동원, 야당 의원들을 끌어내게 한 뒤 자유당 의원들로만 보안법 개정안 등을 변칙으로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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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이 폭력을 동원하여 개정한 보안법은 △보안법 적용 대상의 확대 △이적행위 개념의 확대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구성된 결사 또는 집단의 지령을 받고 그 이익을 위해 선전, 선동하는 행위의 처벌규정 신설 △군인 및 공무원의 반항·선동행위 처벌규정 신설 △헌법상 기관의 명예훼손행위에 대한 처벌규정 신설 △사법경찰의 조서 증거능력 인정 및 구속기간 연장가능 △군 정보기관의 간첩수사에 대한 법적 근거 마련 △허위사실을 적시 또는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적시 또는 유포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 등의 내용을 담았다.

이 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되자 야당과 법조계·언론계는 언론의 자유와 인권 보장을 침해하는 악법으로 규정하고 강력히 투쟁했지만, 이승만정권은 무술경위들을 동원하여 야당 의원들을 끌어내고 변칙 처리하기에 이르렀다.

1959년 새해를 맞은 장준하는 비장한 마음으로 "새해는 '민권의 해'로 맞고 싶다"는 기명 '권두언'을 썼다.

우리가 이 사업에 첫 발을 옮길 제 비록 대해에 일조격인 일일망정 뜻을 '민권의 제고'에 두었었고 행을 그 보위 신장에 옮겨 왔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외침은 항상 자성에 그 기점을 두어 왔으며 우리의 주장은 "민권의 정립 없이는 나라의 부강도 국민의 태안도 바랄 수 없고, 민도의 향상 없이는 특권의 횡포와 민권의 유린을 막을 길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유의 나무는 피를 마시고 자란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가 특권에 항거하여 민권을 쟁취하려는 힘이 자라면 자랄수록 이를 막으려는 무리들의 행위는 날로 악랄해질 것입니다… 지각 없는 집권자들에 대한 민의 반항은 항상 민의 희생을 가져왔고 희생의 결과는 더욱더 큰 항거란 형태로 나타났으며 이렇게 하는 동안에 민은 그 자리를 더욱 더 굳게 하고 민권을 약탈하려는 무리와 대결하여 결국 단결된 민의 힘으로 그 적을 물리쳤던 것이 선진 민주국민들의 산 체험입니다... 민권의 확립은 구국의 원칙이요, 재건의 목표요, 치국의 방향이요, 우리의 공통된 염원이기에 이 해를 민권 확립의 해로 맞아 이 해를 빛내고 보람있는 해로 보내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장준하는 1959년 2월호의 제작중에 국가보안법파동 (2.4파동)을 지켜보게 되었다. 자유와 민권을 사시로 내걸고 싸워온 장준하에게 이승만정부의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보안법 개정은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이었다.

마침 '권두언'을 쓰고 있던 참이었다. 장준하는 권두언을 쓸 때는 며칠씩 앓다가도 글귀 하나 하나를 마치 피를 토해내듯 혼이 절규하듯 써내려가곤 했다. 장준하는 권두언을 쓰고 있다가 보안법파동을 겪으면서 내용을 바꾸기로 했다. 그리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었다. 다음은 당시 편집장 계창호의 증언.

"어떻게 써야 좀더 신랄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이승만의 엉터리 짓을 단죄하고 국민이 무섭다는 것을 알릴 수 있을지 선뜻 펜이 안간다."

"형님, 그럴 것이 아니라 쓰시기도 힘든데 차라리 백지로 내시지요, 백마디 말보다 더 위력이 있을지 모릅니다. 간디의 무저항이 무력 항쟁보다 더 강하지 않습니까?"

"백지로 내면 인쇄가 잘못된 것으로 알지 않을까?"

"아니지요, 권두언 자리 두 면을 테로 두르고 머리에 권두언이란 글귀와 제목을 넣고, 또 끝에 장준하라고 박으면 그렇게는 안 볼 겁니다."

우리 언론사상 초유의 백지 권두언 '무엇을 말하랴'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우리는 글보다 더 강한 무언의 권두언으로 국내외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한편으로는 <사상계>의 발행날짜도 지킬 수 있었다.

장준하는 뒷날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 자유당 정권의 횡포를 보고 <사상계>는 너무도 허기지고 말할 기운이 떨어져서 '무엇을 말하랴 - 민권을 짓밟는 횡포를 보고'라는 제목만 붙인 백지 권두언 (통권 67호, 1959년 2월호)을 내놓아 극한적인 항의를 했다. 그래서 그 정권에서는 <사상계>를 마치 무슨 대정부 포격용 포탄쯤으로 위험시했고 심지어 항간에서는 자유당정권을 넘어뜨린 것은 <사상계>라 할 만큼 그의 비정을 가차없이 매도해 왔던 것은 사실이다.

장준하는 이승만 독재정권 12년 동안 야당이나 언론, 학계의 누구보다 가장 치열하게 이승만과 싸웠다. 그것도 무슨 조직이나 집단의 힘이 아닌, 마치 볼테르처럼 붓 한 자루로 맞섰다. 기획특집과 시론, '권두언'을 통해 이승만의 비정(秕政)을 파헤치고 규탄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권두언'을 쓸 자유를 박탈당하기도 했다.

장준하는 <사상계>의 백지 권두언을 나중에 또 한 차례 '썼다'.

1966년 10월 26일 민중당이 주최한 〈특정재벌 밀수진상 폭로 및 규탄 국민대회〉 연사로 참가하여 행한 연설이 문제되어 구속되었다. 이 때문에 11월호의 권두언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하여 '이 난을 메꿀 수 있는 자유를 못가져 죄송합니다. - 교도소에서'의 24자가 실렸다.

'백지사설'은 1984년 <동아일보> 광고 탄압 때 익명의 백지광고로 부활되고, 박정희 독재체제에서 <씨알의 소리> 등 비판적 잡지에서 이어졌다.

장준하의 <사상계> 권두언은 매호마다 '중천금(重千金)'의 무게를 지니면서, 독재정권을 비판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키잡이가 되었다. 대부분 본인이 직접 썼지만, 더러는 발행인의 뜻에 따라 주간이나 편집위원이, 나중에는 편집부장이 집필하기도 했다.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실록소설장준하#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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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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