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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대관령 기슭에 '왕릉'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사람들에게 익숙한 왕릉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일 것이다. 강릉에 위치한 '명주군왕릉'은 엄밀한 의미에서 왕의 무덤이 아니다. 어떻게 신라 태종 무열왕의 6대손 김주원은 왕릉에 모셔지게 되었을까.

김주원의 생애를 톺아보기에 앞서 만나 볼 커플이 있다. 희대의 로맨스를 남긴 김주원의 부모님이다. 강릉에는 유명한 커플이 꽤 많다. 경포대의 애틋한 사랑꾼 박신과 홍장, 신으로 모셔지는 범일국사와 정 씨녀의 사연도 흥미롭다. 하지만 내 기준에 으뜸은 김주원의 양친인 무월랑(無月郞)과 연화낭자(蓮花娘子)다. 강릉여행의 필수코스로 꼽히는 '월화거리'가 두 사람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강릉 남대천 북쪽에 위치한 월화정. 황금잉어 구조물 위로 2층 구조의 누각이 보인다.
강릉 남대천 북쪽에 위치한 월화정. 황금잉어 구조물 위로 2층 구조의 누각이 보인다. ⓒ 이준수
 월화거리에서 바라본 월화정. 월화교로 연결되어 있어 걸어서 통행이 가능하다.
월화거리에서 바라본 월화정. 월화교로 연결되어 있어 걸어서 통행이 가능하다. ⓒ 이준수

황금잉어가 맺어준 인연, 무월랑과 연화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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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무월랑과 연화낭자의 자취를 좇아 월화정에 올랐다. 2004년에 복원된 월화정은 지대가 높은 곳에 있어 시야가 탁 트였다. 우리 부부와 두 아이는 안내판에 적힌 무월랑과 연화낭자의 사연을 함께 읽었다. 그런데 큰 아이가 월화정 앞의 거대한 잉어 구조물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황금 잉어가 두 사람을 이어줬다고 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잉어가 강릉에서 경주까지 갔어?"
"보통 잉어가 아니야. 무려 황금 잉어라고! 자세한 사연을 들어보자."

허균이 지은 <별연사고적기>에 재미난 기록이 남아있다. 신라 35대 경덕왕 시절, 무월랑 유정은 화랑도 사관으로 명주(현재의 강릉 일대)에 재임한다. 무월랑은 연화봉에 올랐다가 연화낭자에게 한눈에 반한다. 연화낭자도 수도에서 온 늠름한 화랑이 싫지는 않았던 모양. 깊은 만남을 이어가던 두 사람은 무월랑의 임기가 종료되면서 위기를 맞는다.

"만일 그대와 전생에 인연이 있다면 부부가 되었으면 좋겠소."

무월랑은 언약만을 남기고 서라벌(경주)로 떠난다. 이후 반년 간 연락이 끊긴다. 인연이 아니라고 판단했던지, 연화낭자의 아버지는 북평(현재 동해) 집안의 총각과 연화낭자의 혼인 날짜를 잡는다. 차마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는 못하고 조용히 속만 끓이던 연화낭자는 비단폭에 편지를 쓴다. 그때 평소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던 연못에서 큰 황금색 잉어가 튀어 오른다. 맞다, 바로 그 황금잉어다. 잉어의 등장에 이야기를 듣던 둘째가 손뼉을 쳤다.

"커다란 잉어가 경주까지 편지를 배달한 거지?"
"맞아. 실제로는 아는 사람이나 집안의 하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옛이야기에서는 잉어야."

천지신명의 조화로 연화낭자의 러브레터는 경주의 무월랑에게 닿는다. 운명적 사랑을 직감한 무월랑은 그 길로 강릉을 향해 내달린다. 죽어라 말을 달린 정성으로 마침내 연화낭자와 혼인한다. 마침 무월랑이 도착한 시점이 연화낭자가 다른 사람과 혼인하기로 되어 있던 그 날짜였다나.

"말도 안 돼. 진짜라면 천생연분이네."
"그런데 다른 전설도 있어."

나는 딸에게 색다른 버전의 '잉어 편지 커플'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한 서생이 강릉으로 공부하러 왔다가 처녀와 결혼을 약속해. 처녀의 부모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보내려 하니 여자가 편지를 잉어에게 부탁하지. 그리고 과거 시험에 합격한 서생과 결혼하는 이야기. 무월랑과 연화낭자 이야기와 굉장히 비슷하지?"
"거의 똑같네. 그래도 무월랑과 연화낭자 이야기가 더 멋져. 왕자와 공주 같아."
"게다가 무월랑과 연화낭자의 아들인 김주원이 오늘 우리가 갈 '명주군왕릉'의 주인공이라고."

황금잉어가 이어준 사랑으로 태어난 아기가 강릉 김씨의 시조 김주원이라고? 우리 아이들은 화들짝 놀랐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외할머니가 바로 강릉 김씨이기 때문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즐겼던 판타지 연애담이 현실로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자동차를 몰아 경포호를 한 바퀴 돈 후 대관령으로 갔다. 왜 곧장 대관령으로 가지 않고 경포를 에둘러갔냐고? 바로 그 길에 '매월당김시습 기념관'이 있으니까. 생육신 중 한 사람인 김시습도 바로 강릉 김씨란 말씀. 여기서 또 숨겨진 사실 하나, 무월랑과 연화낭자의 사연을 담은 <별연사고적기>의 저자 허균의 어머니 또한 강릉 김씨. 핏줄로 이어진 인연은 촘촘하고 질기다는 진실을 되새기며 꼬불꼬불 대관령 삼왕동으로 향했다.

 능향전 주변의 무인석, 문인석과 홍살문 앞쪽에 위치한 명주군왕비. 시설물 관리가 잘 되어 있다.
능향전 주변의 무인석, 문인석과 홍살문 앞쪽에 위치한 명주군왕비. 시설물 관리가 잘 되어 있다. ⓒ 이준수

김주원, 왕이 될 뻔한 사나이

"아빠, 그런데 김주원은 왕이 아니라고 했으면서 왜 왕릉이라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군왕은 우리가 흔히 아는 왕이 아니라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 같은 사람이야."
"이름은 왕인데, 진짜 왕은 아닌 거네."
"그런 셈이지."

어째서 왕이 아닌데 명주군왕릉이라고 부르는가. 주차장을 비롯해서 번듯하게 조성된 명주군왕릉 일대를 보고 있으면 흡사 진짜 '왕릉'을 떠올리게 된다. 입구에는 신성한 구역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고, 안내판이 설치된 구조물도 기와를 얹어 멋스럽다. 전후사정을 알지 못하는 이라면 당연히 신라 왕 중 한 명이 묻혀 있겠거니 하고 넘어갈 법하다. 하지만 그 어떤 곳에서도 '군왕'이라는 호칭을 소상히 설명해 주지 않는다.

다만 김주원이 신라 태종 무열왕의 6 세손이라는 설명은 반복해서 다루어진다. 왜일까, 이 의문은 차차 해결하기로 하고 홍살문을 넘어 구석구석 살폈다. 주차장 맞은편으로 여러 전각이 눈에 띈다. 모두 강릉 김씨와 관련된 곳이다. 무열왕 김춘추를 기리는 숭열전(崇烈殿), 김시습을 배향한 청간사(淸簡祠), 김주원의 위패를 모신 숭의재(崇義齎) 등이다.

전각을 빠져나오자 '명주군왕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에 김주원이 진짜 왕이 되지 못한 사연이 적혀있다. 김주원은 선덕왕 때에 이찬이자 상재(上宰)를 맡은 고위직이었다. 그러던 중 선덕왕이 왕자를 남기지 않고 죽는다. 마침 정의태후의 교지를 받든 군신회의에서 김주원을 새로운 왕으로 추천한다. 김주원이 왕이 되기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그런데 명주군왕비에는 흥미로운 문장이 이어진다.

"경주 북쪽의 알천이 범람해 큰 비로 넘쳐서 입궐을 하지 못하자 임금의 자리는 하늘의 뜻이라 하여 잠시도 비울 수 없다 하며 상대등(上大等) 김경신(金敬信)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38대 원성왕이다."

흠, 갑자기 왜? 비 이야기가 있는 걸로 봐서 당시 기상 상황으로 인해 결정적인 행동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왕위 경쟁에서 밀려난 김주원은 어머니 집안의 연고가 있는 강릉으로 오게 된다. 그러나 명주군왕비는 훈훈한 표현으로 당시의 흐름을 보여준다.

"원성왕이 왕위를 권하였으나 사양하고 북쪽으로 옮겨 명주군왕으로 책봉되었다."

왕좌를 두고 벌어진 원성왕 세력과의 갈등이 일시적으로나마 원만하게 조정되었다는 의미일 테다. 훗날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전국적 규모의 반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아서 온전한 결합은 아니었던 것 같다.

통일신라 9주 5경 중 '명주'는 지금의 고성, 속초, 양양, 인제, 강릉, 동해, 삼척, 울진, 태백, 평창, 정선 일원을 아우르는 지역이다. 김주원의 집안은 대대로 명주 땅에 기거하며 권세를 누린다. 강릉 김씨의 시작이다.

 조선시대 양식으로 조성된 무덤. 2기가 위아래로 있는데 그 이유는 어떤 곳에서도 설명이 나와있지 않았다.
조선시대 양식으로 조성된 무덤. 2기가 위아래로 있는데 그 이유는 어떤 곳에서도 설명이 나와있지 않았다. ⓒ 이준수

명주군왕릉과 명주군왕지묘의 비밀

안쪽으로 들어가니 넓은 돌이 깔린 뜰과 능향전이 나왔다. 매년 음력 4월 20일, 강릉 김씨 대종회에서 '능향대제'를 거행하는 장소였다. 김주원의 봉분은 능향전 오른쪽으로 난 계단을 타야만 만날 수 있었다.

여기서 주목! 돌길 옆에 까만색 석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여기에 '명주군왕릉'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다. 무심코 넘어갈 수 있지만 반전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 무덤에서 밝혀진다. 나는 딸을 붙잡고 물었다.

"여기도 비석이 또 있지? 스마트폰 번역 앱으로 뭐라고 쓰여 있는지 볼래?"
"명주군왕... 지묘? 이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 김주원의 묘지라는 뜻이야. 근데 이상하지 않아? 아까 계단 옆 비석에는 명주군왕릉이라고 되어 있었잖아."
"어? 진짜 그러네!"

김주원은 실제로 왕위에 오른 적이 없다. 따라서 16세기에 김주원의 무덤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명주군왕릉'이라 돌에 새길 수 없었던 것이다. 첨언하자면 '군왕'이라는 제도 또한 신라에 없었다. 고려 시대에 접어들어서야 군왕이라는 '호칭'이 등장한다. 고려의 왕이 신라 최후의 왕 경순왕에게 하사한 '낙랑군왕'이 그 시작이다. 따라서 '명주군왕릉'은 강릉 김 씨 후손들이 자랑스러운 선조를 기리는 뜻에서 '고려식'으로 예우를 하여 붙인 명칭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강릉 김씨 후손이 얼마나 '명주군왕릉'을 정성으로 가꾸어 왔는지는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일단 무덤 일대에 배치된 돌사자, 석인, 석등 관리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매년 능향 대제를 올리며 깨끗이 청소하고 풀을 깎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무덤 양식도 조선시대 풍으로 단정하다. 김주원은 신라시대 사람이므로 고대 국가의 '언덕에 가까운' 고분을 상상하기 쉽다. 예전에 삼척에서 답사한 '실직군왕릉'만 해도 경주 천마총처럼 크게 솟은 둥근 봉분이었다. 하지만 명주군왕릉은 조선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봉분 아랫부분에 사각형의 둘레돌을 둘렀다.

김주원의 묘는 앞뒤로 2기가 나란히 있다. 아내의 묘가 함께 마련된 것인가? 짐작만 할 뿐 실체는 알 수 없다. 문화유산 해설에도 2기가 있다고 표기만 되어 있을 뿐 자세한 내용은 나와있지 않다. 무덤가에서 아내가 말했다.

"김주원이 왕은 못 되었지만, 복 있는 사람인 것 같아.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돌보아 주잖아."
"어떤 사람은 죽어서야 빛을 발하기도 하나 봐. 1565년에 후손인 김첨경이 강릉 부사가 안 되었으면 어쩔 뻔했어. 족보도 만들고, 심지어 꿈에서 김주원을 만났다잖아."
"설마 이 무덤도 그때 세운 거야?"
"응, 수소문 끝에 유해를 담은 항아리를 찾았대."
"사람 인생, 죽어서도 모른다더니..."

우리 가족은 능향전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았다. 장모님께서 강릉 김씨이므로 나 또한 김주원과 무관할 수 없었다. 가짜 왕이면 어떻고, 진짜 왕이면 어떤가. 묘지가 왕릉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들 중요한 건 현재에도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누군가는 왕이었지만 잊히고, 누군가는 왕이 아니었지만 끝내 기억된다. 얼마 전 온 가족이 대통령 선거 투표소에 함께 다녀온 우리는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미래의 과거'인 현재는 시점에 따라 언제든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 역사의 평가는 과거를 기억하는 자의 판단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2025년의 대한민국은 어떤 방식으로 기억될까. 김주원의 경우처럼 한참 동안 잊혔다가 먼 훗날 빛을 볼 수도 있고, 그저 짙은 어둠 속에 망각될 수도 있다.

명주군왕릉의 단단한 돌계단을 내려오며 김주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 또한 흘러가는 찰나일 뿐이라고. 왕이 되지 못한 것도, 잠시 잊혀진 것도, 다시 위세를 회복해 왕릉에 모셔진 것도 거대한 흐름의 작은 단편이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관령을 떠났다.

#김주원#명주군왕릉#월화정#월화거리#강릉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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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미래의창 2024>, <선생님의 보글보글, 산지니 2021> 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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