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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08 11:00최종 업데이트 25.06.08 11:00

미중 무역회담, 왜 하필 '런던'일까?

6월 9일 미중 무역회담이 보여주는 영국식 외교술

영국에서 산 세월이 벌써 35년째다. 영국 여성과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낳고 길러냈다. 자녀들은 영국에서 초중고를 거쳐 대학까지 마치고, 지금은 모두 독립해서 제 삶을 살고 있다. 시간의 길이만큼 추억도 쌓였고, 느낀 것도 많다. 셀 수 없이 많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만큼이나.

하지만 아무리 영국에서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고 있어도, 문득문득 한국이 그리울 때가 있다. 고향의 골목 냄새, 분주한 시장의 소음, 어릴 적 먹던 국밥 한 그릇이 떠오른다. 가족과 함께 한국을 찾았던 어느 가을, 그 따뜻한 인심과 부산한 활력이 반가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며칠 지나지 않아 영국이 다시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초록 들판, 회색빛 하늘, 예측할 수 없는 날씨마저도.

 한영기
한영기 ⓒ 김성수

이럴 때면 스스로가 욕심쟁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중국적자'는 아니지만, 마음만큼은 분명히 '이중감정자'다. 익숙한 곳에 있어도 낯선 것이 그립고, 낯선 곳에 있어도 익숙함이 그립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그것이 삶이라는 것을. 어쩌면 우리는 언제나 '다른 어디'를 그리워하도록 설계된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의 흐름 속에서, 오는 6월 9일에 열리는 미중 고위급 무역회담의 장소가 '런던'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순간, 무릎을 쳤다. "그래, 역시 런던이지."

싸움은 당사국이, 공간은 제3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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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고, 왜 하필 런던인가? 그 이유는 단순히 지리적 중간 지점이어서가 아니다. 런던은 정치적 중립지를 넘어서, 외교의 무게감을 지닌 도시다.

세계대전도, 냉전도, 심지어 브렉시트까지 겪고도 꿋꿋이 살아남은 나라, 한때의 대영제국은 몰락했지만 외교만큼은 아직 살아있는 나라, 그 이름이 곧 영국이다.

전통적으로 런던은 싸움의 무대가 아닌, 대화의 거실이었다. 갈등의 당사자들이 직접 맞붙으면 감정이 격해질 수 있다. 하지만 제3자의 조용한 공간, '중재의 무대'에서라면 목소리의 톤도, 말의 온도도 달라진다. 회담 장소가 런던으로 결정된 건, 그 자체로 이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셈이다.

"대화하자. 싸우지 말고."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보자. 전 남자친구와 현 남자친구가 서로 오해와 감정이 얽혀 갈등을 빚고 있다. 직접 마주하기엔 불편하다. 그때, 둘 다 잘 아는 '전 여친'의 거실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자고 한다. 그 거실이 바로 런던이다. 익숙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그래서 더 편하게 마음을 풀 수 있는 공간.

티타임이 품은 외교의 기술

영국 외교의 정수는 티타임에서 드러난다. 격식 있고 차분하게, 하지만 유연하고 부드럽게. 복잡한 문제도 "차 한 잔 하시죠" 로 시작하면, 의외로 실마리가 생기기도 한다.

회의실 한 켠에 놓인 스콘과 딸기잼, 얼그레이 향이 풍기는 다기(茶器)들. 이는 단순한 다과가 아니다. 서로를 자극하는 단어들이 오가기 직전, 한 모금의 티가 감정을 가라앉히는 역할을 한다. 이 차 한 잔이, 핵심 의제를 품은 문장을 보다 부드럽게 포장해 주는 셈이다.

"Sorry, but…"("그러긴 하지만…")

영국 외교는 이렇게 시작된다. 부드러우나 단호하게.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결코 자신이 할 말은 빼먹지 않는다.

"오늘 날씨 참 흐리네요."

이 단순한 날씨 이야기 속에도 외교의 온도 조절 기술이 담겨 있다. 런던 날씨처럼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의 흐름. "무역 정책도 마찬가지 아닐까요?"라는 말이 이어질 수 있다. 영국식 대화는 늘 겉보다 안이 깊다.

줄 서는 신사들, 펍(선술집)의 철학

내가 영국에서 감탄했던 문화 중 하나는 '줄 서기' 문화다. 왕족도, 총리도, 평범한 시민도, 줄 앞에선 평등하다. 이 단순한 규율 속엔 질서, 존중, 그리고 타협의 가치가 스며 있다. 영국 외교의 정신이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과 중국, 두 강대국도 런던의 땅 위에서는 줄을 서야 한다. 영국은 그 자체로 무언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영국 펍의 'Last Call(마지막 주문)' 문화도 흥미롭다. 아무리 치열하게 논쟁하던 사이도, 펍의 문이 닫히기 전엔 마지막 에일 한 잔 앞에서 웃고 헤어진다. 회담에 시간 제한이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이러니하게도 제한이 있기에 현실적인 합의가 가능하다.

감정을 감추는 기술, 침묵의 품격

"흥미롭네요.(That's quite interesting…)"

영국 외교가 종종 쓰는 이 말에는 다양한 의미가 숨어 있다.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면서 속으로는 신중한 거절일 수도, 조심스러운 유보일 수도 있다. 바로 'Stiff upper lip', 즉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태연한 척하는 태도. 영국 외교의 숨겨진 무기다.

나는 지난 35년간, 영국 여성과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며 그 문화를 가까이에서 보아 왔다. 이 나라 사람들은 말을 아낀다. 대신에 눈빛과 미묘한 말투, 유머 속에 본심을 감춘다. 겉으론 조용하지만, 속은 누구보다 깊고 치밀하다. 런던의 회담장이 격렬한 고성이 아닌, 낮은 목소리의 유머와 위트로 채워질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외교의 승리, 유머의 승리

회담 결과가 어떻든, 나는 이런 장면을 그려본다. 회의가 끝난 어느 저녁, 런던의 한 조용한 펍. 미국 대표와 중국 대표가 나란히 앉아, 각자의 잔을 들고 건배한다.

"이런 회담이라면 또 해도 좋겠네요."

그건 단지 외교의 승리가 아니다. 바로 영국식 대화 문화와 유머, 침묵의 기술이 이뤄낸 승리다.

"Well, let's see what happens over a nice cup of tea, shall we?"
("자, 좋은 차 한 잔 하면서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죠, 어떨까요?")

오늘도 런던은 조용히, 그러나 은근하고 우아하게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여전히, 어김없이 '런던의 티타임'이 있다.

#영국#미국#중국#외교#6월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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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wadans) 내방

<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해외입양 그 이후],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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