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육아삼쩜영'은 웹3.0에서 착안한 것으로, 아이들을 미래에도 지속가능한 가치로 길러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서울, 경기도 가평, 부산, 제주, 미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보호자 여섯 명이 함께 육아 이야기를 씁니다.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는 매년 특별한 행사가 열린다. 보호자가 직접 기획하고 준비하고 진행까지 도맡아 하는 책축제가 바로 그것이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7월에 책축제를 치를 예정인데 어느덧 9회째다. 어쩌다 보니 나는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책축제의 총괄을 맡게 되었다. 보호자 중 지원자를 받아 TF팀을 꾸리고 본격적인 준비에 돌입했다.
보호자들이 개최하는 학교 책축제
이런 책축제는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아이들에게 매주 책을 읽어주던 선배 보호자들이 나온다. 제주의 작은 시골마을에 사는 아이들에게 어떻게든 책 읽는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었던 보호자들은 흔히 '경력단절여성'이라고 부르는 돌봄노동자들이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 시간적 여유가 생긴 몇몇 보호자들이 책을 매개로 하나둘 학교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책을 가지고 다양한 놀이를 진행했다. 아이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었던 보호자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책축제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처음에는 매년 치르는 학교 축제에 작은 한 코너 정도를 운영했다고 한다. 하지만 점점 행사는 커지고, 더 많은 보호자들이 참여하는 이 학교의 중요한 단독 축제가 되었다.
책축제 준비는 우선 주제를 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책'이 주제였던 때를 지나 환경, 여름, 방학, 꿈, 나 등 다양한 주제들을 다뤄왔다. 그에 맞는 그림책을 선정해 읽어주고 책과 연관된 활동을 기획해 아이들과 함께 해왔다. 보호자들의 경력은 끊겼지만, 그들의 능력과 열정마저 끊긴 건 아니었다.
이번 책축제의 주제는 '여행'이다. 주제를 정하고 나서 축제에 참여하는 아이들도, 축제를 준비하는 보호자들도 여행을 떠나는 느낌으로 즐겁게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벅차 올랐다. 기획팀을 먼저 꾸려 두 차례의 회의를 거쳤다. 여행을 가운데에 두고,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가지를 뻗어나갔다.
여행은 예상보다도 훨씬 더 광범위한 것들을 다룰 수 있는 주제였다. 시간 여행, 공간 여행 뿐만 아니라 문화 여행, 맛 여행, 책 속 여행, 내 마음 속 여행에 이르기까지. 시선을 좀 더 넓히니 동물의 여행과 난민의 여행, 장애인의 여행까지 다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너무 폭이 넓어지면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다양한 여행을 다루기 전에 여행 그 자체에 초점을 먼저 맞추기로 했다. 방향을 잡고 쏟아져나온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추리기 시작했다. 정적인 것보다는 동적인 것을 선호하는 초등학생들의 특성을 생각해, 책을 매개로 하지만 좀 더 몸을 쓸 수 있는 활동을 집어넣으려 했다.
바쁜 와중에도 TF팀에 지원해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는 보호자들을 위해서는, 너무 많은 부담을 줄이고자 노력했다. 아이들의 기대와 즐거움은 놓치지 않으면서, 보호자들의 힘을 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밑에서 쉼 없이 물갈퀴를 휘저어대는 오리처럼, 준비를 떠맡은 소수의 보호자들은 힘을 합쳐 행사에 필요한 것들을 세세하게 준비하고 있다.
책을 친구처럼 받아들였으면

▲아이들에게 책 읽는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었던 보호자들이 모여 9년째 책축제를 열고 있다. ⓒ unsplash
글만 쓰던 나는 작년부터 팔자에 없던 디자인을 열심히 하고 있다. 쉽게 사용 가능한 디자인툴이 다양하게 나온 덕분이다. 올해는 다른 TF팀 보호자들에게도 디자인툴 사용법을 직접 가르쳐주었다. 아이들에게 제공하는 게시물이나 인쇄물의 퀄리티가 점점 높아지니, 아이들의 반응도 더 뜨겁다. 디자인 뿐만 아니라 영상 편집도 직접 하기 시작했다. 글도 쓰고 디자인도 하고 영상도 편집하며 하루하루 책축제 날짜를 향해 다가간다.
재능을 기부하고 더 개발하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다. 창의력이 무척 뛰어난 한 보호자는 잊혀진 명작 이야기들을 엮어 세계지도를 만들고, 아이들이 책에서 단서를 찾아내 보물찾기를 할 수 있도록 구상 중이다. 학창 시절 연극부였던 보호자는 인형극을 준비하고 있다. 직접 대본을 쓰고 콘티를 짜고, 작은 인형들에게 옷을 만들어 입힌다. 책 내용으로 가사를 써서 AI의 도움을 받아 삽입곡도 만들었다.
책축제가 열리는 체육관 무대 앞에는 작년부터 커다란 현수막을 걸고 있다. 책과 관련된 명언들이 형형색색의 글자로 적힌 현수막이다. 그 안에는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속담부터,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내가 살던 마을의 작은 도서관이었다. 하버드 졸업장보다 소중한 것이 독서하는 습관이다.'라고 말한 빌게이츠의 명언까지 다양한 책과 관련된 글이 적혀 있다.

▲책축제가 열릴 때마다 걸리는 책 명언 현수막. 아이들이 단 하나의 문구라도 마음에 새기길 바라는 보호자들의 마음을 담았다. ⓒ 박순우
아이들은 책축제에 참여하는 중간중간, 그 문구들을 눈으로 훑는다. 무엇이 아이들에게 남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다만 한 아이라도 이 축제를 통해 책을 멀리에 있는 신기루가 아닌 가까이에서 언제든지 찾을 수 있고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친구처럼 받아들이기를 바랄 뿐이다. 윌리엄 서머싯 몸의 '책 읽는 습관을 기르는 것은 인생에서 모든 불행으로부터 스스로 지킬 피난처를 만드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보호자들이 직접 나서서 모든 것을 준비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임금은 없다. 소수의 보호자는 몇 개월의 시간을 할애해 일을 하지만, 모든 것은 봉사의 일환일 뿐이다. 그럼에도 신이 난다. 조금이라도 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더 아이들에게 기쁜 순간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더 좋은 것들을 아이들에게 주고 싶어서. 우리는 함께 웃고 울며 축제를 준비한다.
당장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누군가는 돈도 안 되고 경력도 되지 않는 이런 활동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돈이 되지 않으면 내보일 수 있는 경력이 되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일까. 실패와 실수 투성이인 인생을 살아오면서 적잖은 후회와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하지만 마흔이 넘어 내 글을 쓰면서부터, 그 모든 순간들이 나를 만들어왔음을 알게 되었다.
잠깐 지나친 회사도, 몇 년 쌓지 못한 경력도, 잠시 배운 기술도, 쓰라린 아픈 경험조차도 모두 내게 남아 지금의 나를 움직이는 자양분이 되었다. 이제 나는 그 실수와 실패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모든 순간의 점들이 하나로 이어져 기다란 선이 되고, 그 선은 나의 인생이 되었으니까. 당장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지금 내가 지나고 있는 이 순간이 훗날 내게 어떤 궤적을 만들어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밀려드는 일을 하면서도 지치지 않고 즐겁게 일하는 스스로가 나조차도 신기하다. 나와 같은 마음인 다른 보호자들을 목격하는 기쁨 역시 무척 크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것을 아이들에게 줄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더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 책축제 날짜가 점점 다가온다. 책이라는 존재가 아이들의 마음 속에 축제처럼 환하게 빛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날을 기다린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