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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사진/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자료사진/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 jonasleupe on Unsplash

한 아이가 SNS에 남긴 욕설 한마디가 문제가 됐다. 상대방이 학교폭력을 당했다고 신고했고, 교육청에 보고하면서 사안 조사가 시작됐다. 아이들도, 교사도 "그런 것도 학교폭력이냐"고 되물을 정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피해 학생과 보호자의 분노가 워낙 커서 교육청의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에 심의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전담 조사관에 의해 SNS로 건넨 욕설 전후의 상황과 두 학생의 학교생활 등이 두루 조사가 될 테지만, 칼자루는 피해 학생과 보호자가 쥐고 있다. 그들이 느낀 정신적 충격과 신체적 고통을 제삼자가 단정하거나 판단할 순 없다. 학교폭력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은 온전히 피해 학생과 보호자에게 있다.

이 글을 통해 학교폭력에 대한 사안 처리의 맹점과 최근 부쩍 늘어난 전문 변호사의 개입 등 '교육의 사법화'를 지적하려는 건 아니다. 이미 여러 차례 기사를 통해 원인과 양상, 사안 처리 절차 등 학교폭력의 '요지경'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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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X', 'X같네', '개XX' 같은 기존의 욕설이 특정 개인과 집단을 향한 혐오 표현으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거다. 기존의 욕설은 서로의 대화를 매끄럽게 이어주는 '윤활유'일 뿐, 악의로 받아들이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의미를 강조하는 '수식어'로, 자주 듣다 보니 더는 귀에 거슬리지도 않는다.

"'석열이 형'을 내쫓고 '찢재명'이 '부활'했네요."

한 아이는 이재명 민주당 후보의 제21대 대통령 당선을 이렇게 표현했다. 요즘 아이들은 파면된 윤석열 전 대통령을 재임 당시에도 '석열이 형'으로 불렀다. 평소 말투가 투박하고 행동이 '조폭스러워' 붙은 별칭이다. 조롱 섞인 표현이긴 해도, 남자 고등학생들에겐 '상남자' 같은 그의 이미지가 싫지만은 않은 듯했다.

국회의원과 당대표,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떼고 정치인의 이름만 부르는 거야 이상할 게 없지만, 인터넷 극우 커뮤니티에서나 볼 수 있는 혐오 표현을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통용하는 모습이 당혹스러웠다. 심지어 이재명 대통령을 '찢통령'으로 줄여 부르는 게 유행이다.

느닷없이 이 혐오표현이 화두가 된 건, 한국사 수업 때다. 1909년 이재명 의사가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기 위해 거사를 벌였다는 내용을 설명하자, 아이에게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반응이었다.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걸 그가 모를 리 없지만, 이재명에 대한 혐오 표현으로 순간 주위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순국한 이재명 의사의 업적을 아는 아이들은 드물지만, 해당 혐오 표현의 유래에 대해선 모르는 경우가 거의 없다. 과거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 시절부터 야당과 보수 언론에서 십수 년째 떠들어댄, 이른바 '형수 욕설'을 극우 커뮤니티 등을 통해 끊임없이 '복습'한 결과다. '선플'보다 '악플'이, 칭찬보다 혐오가 훨씬 각인 효과가 큰 법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향한 황당한 억측과 혐오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혐오도 만만찮다. 그가 서거한 지 15년도 더 지났지만, 혐오 표현은 아이들 사이에서 집단적 DNA가 되어 유전되고 있다. 노벨평화상 수상이라는 대한민국의 청사에 빛나는 공적조차 "김정일과 협잡을 통해 돈으로 산 것"이라는 황당한 억측이 여전히 난무하고 있다.

김대중에겐 '원조 홍어'라는 멸칭이 따라붙는다. '홍어'는 타지 사람들이 전라도 출신을 싸잡아 조롱하는 표현이다. 5.18 당시 계엄군에 학살당한 희생자들의 유해를 옮기는 장면을 두고, 일베 등 극우 커뮤니티에서 '홍어 택배'로 표현하여 온 국민의 분노를 샀다. 이후 일베가 단죄되기는커녕 되레 전라도 혐오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전개됐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김대중을 혐오하는 이유는 정부 부처에 여성부를 신설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후 여성부는 여성가족부로 명칭이 바뀌었다. 여성가족부는, 특히 남자 고등학생들에게는 척결해야 할 '페미의 소굴'이다. 3년 전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을 내건 윤석열이 당선되고, 지난 대선 때 이준석 후보에게 20~30대 남성의 표가 쏠린 것도 그래서다.

이재명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여성가족부는 '성평등가족부'라는 이름으로 역할이 확대, 개편될 예정이다. 아직 정부 조직법이 개정되기도 전인데, "이재명은 페미충"이라는 말이 아이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극우 커뮤니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미래 유권자들'과의 지난한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으로 옮겨 붙은 혐오

 21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론조작을 한 혐의를 받고 있는 보수단체인 ‘리박스쿨’(이승만 박정희 스쿨) 서울 종로구 사무실에서 4일 오후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 수사관들이 압수수색을 벌이고 있다. 또한 경찰은 손효숙 리박스쿨 대표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했다.
21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론조작을 한 혐의를 받고 있는 보수단체인 ‘리박스쿨’(이승만 박정희 스쿨) 서울 종로구 사무실에서 4일 오후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 수사관들이 압수수색을 벌이고 있다. 또한 경찰은 손효숙 리박스쿨 대표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했다. ⓒ 권우성

아이들의 김대중 전 대통령을 향한 혐오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조롱을 거쳐 이재명 대통령으로 옮겨 불붙은 모양새다. 후보별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지난달 23일, 특별한 기념일이라며 아이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키득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의 SNS 단톡방엔 '놈현이 자살한 날'이라는 소개 글까지 내걸렸다.

일베나 팸코 등의 극우 커뮤니티에선 5월 23일을 '중력절'이라고 부른다. 노무현이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했다는 걸 희화화한 악의적 표현이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극악한 명명이지만, 아이들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사용한다.

철부지들의 혐오는 SNS를 무기 삼아 대상을 수시로 바꿔가며 날 선 공격을 이어간다. 표적은 대개 장애인, 여성, 이주 노동자 등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다.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와 연민은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이 문제를 제기하면, "아니꼬우면, 강자가 돼라"는 식으로 응수한다. 혐오는 늘 한결같이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형태로 나타난다.

최근 시내버스 기사들이 파업했을 때, 아이들은 등하교의 불편함을 토로하며 그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전국의 기사들이 연대하여 파업하는 이유에 대해 궁금해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파업은 노동 조건의 향상을 위해 집단이 동시에 업무를 멈춰 사용자에 부담을 가하는 노동자의 헌법적 권리라는 설명은 그들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들의 권리를 위해 왜 우리가 불편을 감당해야 하느냐?"는 반박이 터져 나왔고, 그걸로 대화는 끝났다. 아이들에겐 운전기사들의 노동권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운전기사에겐 시내버스를 이용하는 시민들이 사용자의 입장일 수 있다는 판단은커녕 아이들 스스로 '미래 노동자'라는 인식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더욱 충격적인 건, "누가 시내버스를 운전하라고 강요했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된다"는 한 아이의 싸늘한 대꾸였다. 그는 파업하는 이들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냈다. 장애인들의 지하철역 점거 농성도, 임금 체불과 불시 단속에 항의하는 이주 노동자들의 시위도 '지질한 자들의 대거리' 정도로 여겼다.

최근 '1만 명의 청소년 극우 전사'를 양성하겠다며 공교육에 잠입한 '리박스쿨'이 화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승만과 박정희 두 전 대통령을 추앙하는 사설 교육기관이다. 아이들에게 왜곡된 역사의식을 심어주고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려는 극우 세력의 파렴치한 행태가 목불인견이다. 선거철 여론 조작을 목적으로 '댓글 부대'까지 운용한 의혹이 있는데, 이건 명백한 범죄다.

경찰 수사를 통해 그들의 범죄 행각을 발본색원하게 될 테지만, 극우 세력의 카르텔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지 새삼 깨닫게 한다. '표현의 자유'에 기댄 이들의 만행이 극우 커뮤니티를 통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혐오 표현이 보통명사처럼 사용되는 현실이 거기서 비롯됐다고 한다면 억측일까.

#리박스쿨#혐오표현#인터넷극우커뮤니티#여성가족부#찢재명찢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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